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유일한 단편집인 <로즈 가든>의 이야기를 위해서는, 우선 미로 시리즈의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무라노 미로라는 여탐정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알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으로는 <로즈 가든>을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첫번째로 선택하는 것은 조금 아쉬우리라 생각하는데, 실제로도 <로즈 가든>은 <얼굴에 흩날리는 비>,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물의 잠 재의 꿈>에 이어 네 번째 시리즈에 해당하며 그 다음에 비로소 <다크>로 시리즈는 완결되었다.

  덕분에 시리즈는 되도록 그 순서대로 읽고 싶어했던 나로서는 <로즈 가든>의 출간 소식은 참 반갑다. 물론 단편 모두가 같은 시기에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표제작이자 가장 묵직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단편 「로즈 가든」은 모든 단편을 아우르는 충격이 담겨 있기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가장 먼저 출간되어버린 <다크> 이후 차례로 출간되고 있는 미로 시리즈에 <로즈 가든>과 함께 개인적인 시리즈의 완결까지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ㅎㅎ

 

  등장 인물 그 자체로는 상당히 감성적인 '여성' 탐정 무라노 미로를 내세우고 있는 기리노 나쓰오의 시선은 그러나 어둡고 묵직한 세계 속에서 머물고 있다. 상당히 자극적이고 욕망으로 점철된 끈적한 모습조차 차갑고 건조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아니, 내가 이상한건가?;;).

 

 

  어쨌든 <로즈 가든> 속 단편들 역시 지금까지의 무라노 미로를 담아내고 있다. 실은 「로즈 가든」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꽤나 빠른 시기에 발표된 것으로 시간상으로는 <얼굴에 흩날리는 비>와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사이다. 그러니까,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서 탐정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은 후 서서히 정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미로가 머물고 있는 아파트에서 「표류하는 영혼」이 나타난다는 소문의 근원이라 할 수 있을 아파트 주민들 사이의 악의, 「혼자 두지 말아요」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덧없는 관계, 참으로 섬뜩한「사랑의 터널」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무라노 미로는 그렇게 진정한 욕망이 드러나는 거리를 여전히 거닐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압도적으로 존재감을 내뿜는데다 가장 큰 충격을 안겨주는 단편은 시리즈의 시작부터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키워나가게 만들었던 남편 히로오와의 관계가 그려진 「로즈 가든이다.

 

 

꿈속에서 본, 히로오의 햇볕에 그은 뺨에 흐르던 눈물이 떠올라 도무지 전화를 받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한밤중에 걸려 오는 전화는 받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p.7, 기리노 나쓰오, <얼굴에 흩날리는 비>

 

 

  '남편의 죽음'이라는 것은 미로 시리즈의 가장 처음에서 시작해 계속해서 미로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갈수록 커질 수 밖에 없는데, 「로즈 가든」에서는 히로오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인도네시아에서의 행보와 고등학생 시절 미로와 히로오의 첫 만남을 그려내고 있다.

 

 

 

  상당히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미로와 그녀의 세계에 빠져버린 히로오, 그리고 의붓아버지인 무라노 젠조 사이의 관계는 줄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마치 미로의 집 앞에 놓인, 황폐한 정원 속에 피어난 장미처럼. 히로오와 미로의 관계 사이에는 뾰족한 가시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에 들어가려고 몸부림쳤던 소년 히로오와, 그 세계에 갇혀 그 속을 헤매고 있는 미로의 남편 히로오의 고뇌는 또 다른 미로(迷路)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욕망에 충실했던 두 남녀와 또 다른 한 남자, 그 셋의 관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오로지 히로오의 시선으로, 그의 회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기에 진실은 알 수 없다. 히로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애매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렇게 히로오의 마음 속에 피어오른 욕망 역시,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기리노 나쓰오의 시선 바로 그것이었던지라, 쉽사리 외면할 수조차 없다.

 

 

 

  좁은 의미가 아닌 포괄적인 '세계관'을 생각해보자.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담고 있는 세계관은 과연 어떤 것인가.

  신주쿠 2초메에서 야쿠자 조직의 조사원으로 활약했던 아버지의 사무소를 이어받아 탐정일을 시작한 여탐정 무라노 미로. '탐정'이라는 한 마디로 그녀를 설명할 수는 없다.

  끈적끈적한 욕망이 넘쳐나는 거리 속을 차가운 시선으로 걷는 여느 탐정 역시 아니다. 그녀 역시 한 명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으로서 갈등하고 고뇌한다. 그리고 그 뒤에서 그녀를 든든히 지켜주는 무라노 젠조라는 존재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듬직하고 크게 다가온다. 그렇게 생각했던 무라노 젠조였기에 「로즈 가든」 속 히로오가 그려내고 있는 무라젠이 더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세계 속에 푹 빠져있는 동안, 가장 마지막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 이르러서는 1권에서 그저 스치듯 지나갔던 장면이 상당히 중요한 열쇠가 되어 재등장한 것을 보며 도대체 이 작가는 얼마나 치밀하고 촘촘하게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고 놀란 기억이 있다.

만화책 몇몇을 읽으면서도 역시 비슷한 연결고리에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데, 최근 동생이 해 준 얘기에 따르면 만화의 경우 연재라는 형태로 이야기를 짜맞추어 나가는 작업인지라 스토리가 무지하게 안 풀리면 괜히 앞 부분을 뒤적이며 한 번 써먹을 수 있겠다 싶은 소재를 다시 등장시키곤 한다는 것이 진실이란다. 그래도 꽤나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는 참 좋다.

 

 

 

  생뚱맞게 이 이야기를 왜 했느냐 하면 기리노 나쓰오가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써내려가면서 그녀가 생각한 무라노 미로와 무라노 젠조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와의 시리즈와는 달리 너무나도 예상 밖의 아버지-딸의 관계를 맞닥뜨렸던지라 과연 기리노 나쓰오는 히로오의 죽음이라는, 처음부터 죽 이어져왔던 미로의 세계 속에 미로의 고등학생 시절을 고려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는 미로라는 여탐정을 그려내기 위한 본질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히로오의 기억 속 고등학생 미로와 무라젠의 모습은 진실인가? 혹은 미로와 히로오 사이의 게임에 불과했던 것일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들의 모습으로는 미로와 히로오의 치명적인 게임이 끝내 히로오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 것이라고, 히로오는 그렇게 미로(ミロ)라는 미로(迷路)를 헤맸던 것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기에 그 의문에 대한 답과 함께 마지막 퍼즐 조각은 <다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차츰차츰 '무라노 미로'라는 세계를 쌓아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단편집 <로즈 가든>은 꽤나 핵심적인 조각을 쥐고 있는 단편집이다. 그리고 마지막, <다크>와 함께 그 퍼즐을 완성해보고자 한다.

 

 

 

히로오의 머릿속에서 롤링스톤스가 잦아들고 대신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로. 고등학교 동급생. 나는 아내의 세계에서 도망쳐 홀로 이곳을 찾았다. 아니, 도망친 게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들었다. 

-p.17, 「로즈 가든」

 

 

 

욕망이 끝없이 피어오른다. 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그 씨앗을 뿌렸다.

(중략)

난생처음 느낀 복잡한 감정이 당황스러운 한편,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사실에 현혹되었다. 분명 미로에게 빠지리라. 나는 예감했다. 안경점 여자와의 지루한 관계는 뇌리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미로의 세계에 빨려들었음을 깨달았다. 당시 나는 미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몹시도 안간힘을 썼다.

-p.31, 「로즈 가든」

 

 

 

어린아이의 마음이라, 히로오에게 소녀란 성숙하고 관능적이어야만 했다. 열다섯의 미로처럼. 그것은 일종의 재능이다. 재능 있는 소녀를 만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알고는 있지만 단념할 수 없었다. 미로의 세계에 갇혀버린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였다.

-p.40, 「로즈 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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