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수장룡의 날
이누이 로쿠로 지음, 김윤수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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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다. 나른하다. 선명하다. 그러나 모호하다. 

이누이 로쿠로의 <완전한 수장룡의 날>을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이다.

 

 

일본의 남쪽 섬, 관광지로 개발하기도 애매한 해안 절벽이 있는 섬의 끝에서 썰물이 빠지고 나면 물 웅덩이가 드러난다.

물 웅덩이에 묽은 청산가리를 넣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면 물고기들이 배를 드러내며 둥둥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작살을 찔러 물고기를 잡으며 놀곤 한다.

그래도 역시 청산가리는 맹독인지라, 청산가리를 넣은 물 웅덩이에는 붉은 깃발이 달린 대나무 대를 세워둔다. 밀물이 밀려오면 자연스럽게 그 대나무는 쓰러져 바닷물과 함께 떠내려간다.

문득, 그 강렬한 붉은 빛에 매료된 것일까. 동생 고이치는 깃발을 잡으려 손을 뻗는다. 그리고 밀어닥친 파도에 휩쓸려가는 동생의 손을 황급히 잡으려 달려갔다가 함께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내내 놓지 않았던, 꽉 마주잡았던 두 손.

 

 

이야기는 푸른 바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붉은 깃발, 그리고 그 바닷물에 휩쓸린 남매의 모습이라는 강렬한 이미지와 함께 시작된다.

순정만화작가 아쓰미는 정기적으로 동생을 찾아간다. 자살 시도를 했으나 미수에 그쳐버려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남동생 고이치이지만, 의식만은 그대로 남아있기에 SC인터페이스라는 기술의 도움을 받아 정기적으로 의식을 접촉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고이치는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아쓰미와의 센싱을 단절해 버린다. 고이치는 어째서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일까? 고이치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쓰미는 동생의 진심을 파헤친다. 그러나 계속되는 센싱은 아쓰미의 현실과 의식, 현실과 꿈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갈 뿐이다.

침식되어가는 경계가 모두 허물어졌을 때, 그 곳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꿈을 꾸면서 '아, 이건 꿈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토록 생생한 일상이었건만, 문득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나서야 지금까지 꿈 속을 헤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혹은 완전한 비일상 속에 들어있는 내 모습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눈을 뜨면 그것은 꿈 속에서의 일탈이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우리는 안심한다. 불안했든 꿈 속과는 달리, 이 곳은 단단하게 나를 받치고 있는 현실이라고. 그 곳으로 돌아왔다고.

 

<완전한 수장룡의 날>에서는 상당히 강렬한 이미지와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소재로 그 꿈과 현실의 경계를  서서히 침식한다. 그 모호한 분위기가 잘 살아있는 소설이다.

만화가로서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생각했는데, 문득 침대에 누워 있던 동생이 등장한다. 동생은 창 밖으로 뛰어내린다. 권총으로 머리를 겨냥한다.

익숙한 공간이었다고 생각했던 집 밖의 문을 열었더니 그 밖에는 어린 시절 여행을 떠났던 남쪽 섬의 해안 절벽이 펼쳐져 있다.

정신을 차려보면, 아쓰미는 자신도 모르게 잠들어있거나 고이치의 의식과의 센싱을 하고 있기 일쑤다.

고이치는 묻는다. 샐린저의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속 시모어 글래스는 어째서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냐고. 고이치도 정말 SC인터페이스 속의 자신이 현실인지 시험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쓰미의 의식을 함께 따라가고 있노라면 독자 역시 문득 아쓰미의 의식 속을 헤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해안 절벽, 섬을 떠나 배 밑에서 언제나 깡깡이질을 하며 배의 녹을 뒤집어썼던 젊은 날의 외할아버지, 지느러미가 있는 수장룡 플레시오사우르스는 공룡이 아니라며 어린 고이치의 그림에 다리를 마구 그려넣었던 외할아버지. 해안에서 보물을 찾고 있는 두 소년소녀, 모래사장 밑에서 발견한 플레시오사우르스.

아쓰미의 의식 속을 돌아다니는 이 모든 오브제들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아니, 그저 말 그대로 의미 없는 나열일 뿐일까.

그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글 속에서 함께 머물고 있는 아쓰미의 모습은 아쓰미의 현실인지 그녀의 의식 속인지 독자들은 그 모호한 경계를 아쓰미와 함께 배회한다.

 

아쓰미의 기억 속 강렬한 이미지와 그녀의 상상 속 그 모습들은 너무나도 나른하고 고요한지라 그 묘한 분위기에 취해, 호접몽에 들어간 듯한 애매한 경계를 함께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까지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그 분위기와 여운을 곱씹어보게 되는 것이다.

서서히 경계가 침식되어가는 '분위기'. 바로 그것이 <완전한 수장룡의 날>이다.

 

 

그 고요하고 나른한 분위기에 휩싸여 소설 속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상당히 좋았다. 소설의 끝까지 이것은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혹은 의식 속을 배회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계속되는 반복이 조금 지겨워지려는 찰나, 그 모호함을 명확하게 만드는 결말 또한 반복되는 이야기를 읽었다는 허탈함 대신 만족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그렇게 의식과 현실 사이의 모호함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동안, 작가는 자기 스스로 그 모호함을 조금 뚜렷하게 만들어 아쉬움을 남긴다.

바로 '호접몽' 그리고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문득 나는 호접몽 이야기가 생각났다.

장자라는 사람이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어쩌면 그 꿈은 나비가 꾸는 장자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중국 고사다.

이전에 sc인터페이스를 통한 코마 워크에 대해서 스기야마 씨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마치 호접몽 같군, 하며 감상을 내놓았다.

-P.73

 

 

르네 마그리트 그림에 <빛의 제국>이라는 작품이 있다.

언뜻 보기에 평범한 풍경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못가에 서 있는 이층짜리 서양식 저택과 그 뒤로 반짝거리며 펼쳐진 푸른 하늘 사이에 이상한 대비를 발견할 수 있다.

즉 거기에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풍경이 그려져 있다.

서양식 저택 창문으로 보이는 실내 불빛. 수면에 비치는 건물의 색감과 가로등 불빛, 이것들을 본뜬 그림자는 모두 밤의 색깔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하늘만은 빛을 지닌 한낮의 밝고 푸른 하늘로 표현되어 있다. 낯익으면서 절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마법 같은 풍경.

-p.145

 

 

이처럼 직접적으로 호접몽과 빛의 제국을 언급함으로써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 개인적으로는 김이 빠져 버리게 만들었다.

분명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명백하다. 호접지몽이자 그림 속 세계처럼 낮과 밤이 혼재한 듯한 현실과 의식의 모호한 경계.

이를 조금 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녹여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 모호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 속에서 훨씬 더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뿐만 아니라, 식물 인간 상태에 놓인 인간에게도 '의식'이 존재하기에 그 의식과의 접촉을 시도한다는 SC인터페이스에 대한 설명도 꼭 그렇게 구구절절해야만 했을까.

작가는 참고 문헌을 통해 SC인터페이스라는 장치의 개연성을 높이고 있는데, 간단히 설명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설정에 너무 힘을 쏟아부었다.

심지어 장치 관리자가 설명하는 내용을 아쓰미도 멍하니 못 알아듣고 있는데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 순간 흐트러지는 집중력이 상당히 아쉽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는 동안 내어놓은 결말은 꽤 재미가 있다.

복선은 적으나 상당히 핵심을 찌르고 있고, 조금은 급하게 마무리짓는 듯한 느낌 역시 지울 수 없으나 그럼에도 앞에서의 구구절절한 설명을 하나로 모은 매듭은 깔끔한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예상했던 대로의 장면이 반,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 반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소설의 전반을 지배하는 현실과 의식을 넘나드는 서술 속에서 엿보고 예상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적지만 꽤나 정곡을 찌르는 복선을 깔아두었다고 생각한다.

 

이누이 로쿠로는 <완전한 수장룡의 날>로 가이도 다케루의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이후 2011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했다.

만장일치를 할 정도였을까? 생각하면서도 다른 작품을 못 봤으니 경합하는 후보작 속에서는 뛰어난 작품이었으니까,라는 예상을 조심스레 해본다.

극작가로서 이미 경력을 어느 정도 쌓은데다 간결하고 담담한 문장에서 풍겨오는 분위기는 꽤 마음에 들었기에, 다음 작품을 한 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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