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7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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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다. 여름은 역시 공포의 계절인지, 요즘은 웹툰에서도 공포 특집을 내세우며 독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는 것 같은데(물론 의연하게 대처하시는 분도 있음,ㅋㅋ) 귀신, 유령 등등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매체는 책 빼고는 꺼리는ㅡ영화는 말도 못하고, 옥수역 귀신이니 봉천동 귀신이니, 하도 무섭다는 소리가 많아 겁쟁이인 나는 오늘도 한 발 뒤로 물러서 외면한다.

 

 

실은 공포 보다는 '놀람'을 싫어하는 게 맞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학교 다닐 때 아이들과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으레 흘러나오곤 하는 것이 '무서운 이야기'인데 그 대부분은, 분위기를 한껏 숨죽여놓고서는 갑자기 '왁!' 하고 놀래키는 것이다. 아아... 난 그런 게 너무 싫다.

그래서 공포 영화에서 으레 흘러나오는 으스스한 분위기의 음악에 갑자기 귀신인지 유령인지 그것처럼 보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지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거나 그런 게 어찌나 무서운지. 비주얼에 굉장히 약하기 때문인지, 소설을 읽으며 상상을 하거나 심리적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은 어찌어찌 참을 만 한데 그렇게 갑자기 놀라게 하거나 좀 거북한 형상을 보는 것이 난 너무 싫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공포 영화나 만화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것이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 떠돌아다니는 괴담 말고 어린 시절에 권선징악이라는 교훈을 대부분 내포하고서는 도깨비가 어쨌다~ 구미호가 어쨌다~(그러고보니 전설의 고향도 무지하게 싫어했다) 등등의 이야기는 의외로 또 재밌게 듣곤 했는데, 어려서 겁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막상 떠올리려니 잘 생각이 나진 않지만 옛날에 선비 한 명이 산 길을 걷다가~ 하는 이야기는 또 생각보다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을 전율시킨 천재 작가,라는 호칭이 붙은 교고쿠 나쓰히코는 그 어린 시절 어머니, 할머니가 머리맡에서 들려주시곤 하는 괴담, 설화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를 미스터리와 결합해 설화를 재해석하는 소설, <항설백물어>다.

 

일본에는 에도 시대의 일본화집이자 괴담집인 <회본백물어>가 있다고 한다. 교고쿠 나쓰히코는 이 기담집에 실린 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팥 씻는 동승의 영혼 이야기 「아즈키아라이」, 스님으로 분장한 여우 이야기 「하쿠조스」, 세 노름꾼의 목이 끝까지 다투었다는 「마이쿠비」, 사람으로 둔갑한 「시바에몬 너구리」, 말을 잡아먹자 말의 영혼이 드나들었다는 「시오노 초지」, 버들가지에 목이 감겨 아들을 잃은 여인 「야나기온나」,  그리고 단림황후의 시신을 버린 곳에서 때때로 여자의 송장이 등장한다는 「가타비라가쓰지」까지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동승이 팥을 씻으러 갔다 떠밀려 죽은 뒤, 그 곳에서는 그의 영혼이 나타나 팥 씻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행인이 물에 빠져 죽는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지금으로서는 고전 설화에 불과하나, 분명 당시 사람들에게는 현재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괴담의 형태였으리라.

이 이야기들이 괴담으로 소문이 퍼져 있었을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 모모스케는 그러한 귀신 이야기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이다. 덕분에 괴이한 소문이 퍼졌다, 하면 그 곳에 가 이야기를 모아선 기담집을 개판하는 것이 그의 목적. 우연히 쏟아진 비를 긋기 위해 들어간 오두막에서, 그는 기묘한 인물들을 만난다. 부적을 팔고 다니는 어행사 마타이치, 변신술에 능한 지헤이 영감, 그리고 산묘회라는 인형사 오긴까지.

 

그 패거리는, 의뢰를 받음에 따라 '진실'을 밝히기 꺼려지는 사건을 연극을 벌여 '요괴의 소행'으로 마무리짓는 것이 특기인 이들이다. 쥐도새도 모르게, 물밑작업을 하고서는 세상에는 '이러이러한 요괴의 소행이었다'하고 마무리. 모모스케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우연히 혹은 교묘하고 계획적으로 마타이치의 간계에 끌려 또 한 명의 연기를 펼치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회본백물어에서 전해지는 설화다ㅡ라는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로 위와 같은 형태로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또 다른 작품인 <백귀야행> 시리즈는 항설백물어 시리즈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이나 요괴의 소행이라 일컬어지는 사건을 과학과 논리로 풀어 규명하고 해결한다.

하지만 반면에, 이 <항설백물어> 시리즈는 아무래도 인간의 마음 속 근심과 어둠에서 비롯된 사건을 요괴의 소행으로 마무리짓는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시점이 모모스케로 진행되는 만큼, 독자 역시 '요괴의 소행일텐데'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보면 그것이 결국은 마타이치와 그 일행들, '소악당'이 벌인 연극의 진상임을 뒤늦게 듣게 된다. 분명히 이야기의 패턴이 정해진 만큼, 그들이 벌이는 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다면 이런 걸 어떻게 꾸며냈지? 하고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덕분에 결론적으로는 모든 원인은 마음 속 근심과 어둠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한들, 진상은 인간의 소행. 세간에서 사건을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그저 기묘한 사건에 그치고 마는데다, 뒤늦게 진실을 알아차리는 모모스케와 행동을 함께하는 덕에 자세한 트릭과 간계에 대한 설명은 그다지 자세하지 않다. 그야말로 소악당들의 기예와 술수,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독자들은 알고 있다. 유가와 교수가 현대 불가사의한 사건을 과학적으로 풀어내어 봤자, 너무나도 전문적인 과학 공학 지식을 모두 다 따라갈 수는 없다는 것을.

오히려 그보다 그거는 이랬지만 실은 이러이러한 연극이었어, 하는, 옛날 이야기를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인식하게 하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시선이 신선하고 꽤나 재미가 있었다.

 

그 요괴의 소행은, 그저 인간 마음 속의 근심에 불과한 일이 형상화 된 것이었다. 두려움은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죄책감, 불안감, 욕심. 요괴의 소행이 아닌, 자신 스스로에 대한 공격, 다른 이에 대한 시샘과 질투가 불러일으킨 비극.

언제나 옛날 이야기가 들려주는 교훈처럼, 실은 이 항설백물어가 내리고 있는 결론 역시 그러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토록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의 설화라서일까, 혹은 '소악당'이자 '의인'이라 할 수 없는 일행들의 행동이 그래도 따뜻하게 느껴져서일까.

 

혹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똑같은 인간의 본성과 그 어둠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일까.

 

그래서 오래 전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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