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트레크 저택 살인 사건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아, 또 속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얄미우면서도 기분좋게, 그리고 완벽하게 속아넘어간 것은 참 오랜만이라 즐겁다.

쓰쓰이 야스타카의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이다.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 '저택'이라는 말이 붙은 이상 대부분의 미스터리 독자들은 생각한다. 오호라, 또 기묘한 구조의 저택을 배경으로 온갖 말도 안 될 것 같은 트릭을 가져와 아마도 밀실 살인, 그것도 연쇄 살인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고. 저택의 구조는 보고 있지만, 아마 생각하기도 어려운 트릭을 가져와 독자들을 농락하기 시작하겠지. 범인은 대충 감이 올지 몰라도 그 범인이 왜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는지는 작가가 밝혀주고 나서야 아마 알 수 있을 거야.

 

 

아이큐 178의 천재라 불리곤 했던 SF계의 거장 쓰쓰이 야스타카. 개인적으로는 그의 단편집 <최후의 끽연자>만 읽어봤다. 뛰어난 상상력에 감탄하면서 틀림없이 최근의 작품일 것이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꽤나 나이가 많은 작가님에 무려 단편들이 대체적으로 발표된 해가 1970년대에 머물러 있어서 그 당시에 이런 생각을 한거야?! 하고 깜짝 놀랐다. 그 단 한 권으로, 그는 나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 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 중에서는 본격 미스터리라고 소개될 만한 작품은 세 작품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로트레크 저택 살인 사건>은 누가봐도 '본격 미스터리'가 틀림없어 보이는 제목에 '제거됨'을 나타내는 듯한 표지의 그림이다.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다.

 

 

 

과거 사촌의 잘못으로 인해 척추를 다친 뒤 난쟁이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하마구치 시게키는, 오랜만에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소유였지만 이제는 기우치씨의 별장이 되어버린 로트레크 저택에 초대를 받는다. 시게키와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를 화가 로트레크의 그림을 모았으니 구경도 할 겸, 그리고 나름대로의 친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쓰리 버진스'를 만날 겸.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들려온 두 발의 총성, 그리고 시체로 발견된 히로코. 저택에 머무르던 이들은 외부인의 범행이 아닐까 의심하지만, 경관들이 버티고 있는 와중에 두 건의 살인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분명히 범인은 내부인 중의 한 명이라는 것. 과연 범인은 누구이며, 어째서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이상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듯하다.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보여지곤 하는 다양한 인간과 그를 둘러싼 주변을 그려내는 대신, '본격'을 지향하는 미스터리는 한정된 공간과 인물만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의 미친듯한(이 아니라 미친) 행각을 그려내거나,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을 가지고 독자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분노에 빠뜨리는 것은, 결코 '본격 미스터리'의 역할이 아니다. 오로지 체스판 위에 놓인 말들의 움직임과 감정만으로, 그리고 그 밖의 요소는 철저히 배제한 채,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듯, 저택 안에 모여있는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한정된 관계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이상 '살인사건' 이외의 이야기 자체는 단조롭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로트레크의 그림과 함께 병치되는 듯한 시게키의 사연은 안타까우면서도 독특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애정관계나 이해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여느 '저택 미스터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벌어진 살인사건ㅡ.

 

 

하지만 이 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쓰쓰이 야스타카의 기상천외한 트릭을!

 

 

 

 

영화의 반전이 그다지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최고의 반전!'이랍시고 온갖 홍보를 다 해놓고 막상 '짐작했던 그 결말'이 나와 관객의 김을 새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영화에는 '최고의 반전!'이랍시고 홍보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반전이 없는 것이 반전이야?

실은 그보다는, 아무 생각없이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이 즐겁다. 그다지 미스터리는 아니더라도 문득 보고 있었는데 앞의 암시와 복선이 합쳐져 기분 좋은 놀람을 안겨주는 것, 얼마나 좋냐고.

 

그러나 미스터리는, '반전 없어요'라고 말하면 장사가 되질 않는다. 이미 독자가 '속는 것'을 전제로 읽게 되는 문학이기 때문에. 그래서 언제나 어딘가에서 '속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속고 마는 것이 나라는 독자다.

그리고 언제나 작가에게 패배한 뒤 곱씹는 것이다. 언제쯤이면 이들에게 속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과, 어차피 속는 재미가 있는거니 그냥 별 생각없이 속아준 거야,라고, 분한 마음을 슬그머니 핑계삼는 위안. 그리고 언제나, 다음 책을 펼치며 생각한다. '이번에는 속지 말아야지!'

 

 

 



"반드시, 그 누구라도 처음부터 다시 읽을 수밖에 없다!"

"허겁지겁 다시 읽어야 하는 독자는 이미 게임에서 패배한 상태이다."

 

 

 

 

아아, 이렇게 떡하니 '속일테니까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봐!'라고 말하는 듯한 책 속의 문구들. 이걸 본 이상 결코, 지지 말아야지 하는 알 수 없는 투쟁심이 끓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두고보라지, 나는 다시 펼쳐보진 않을거야!하고.

그래서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읽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여기서도 어딘가에 분명히, 트릭이 있을 거야. 속으면 안돼, 속으면 안돼....

 

하지만 의외로 이야기는 너무나도 뻔하게 흘러가기 시작하고, 어느샌가 말로만 들었던 '초판 한정 봉인' 부분에 도달하고 만다. 도대체 뭐길래, 이 시점에서 봉인을 해 버린 것인가!

 

 

 

실은, 읽는 동안 '뭔가 이상하다' 싶은 부분이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다. 뭐가 이상하긴 한데 정확하게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샌가 소설 속 문장에 설득당해 그 안개 속의 모호함이 사라진다. 그리고, 풀린 봉인 속에서 친절하게 하나하나 '복기'를 해 주는 쓰쓰이 야스타카의 계책에 완벽히 넘어가버린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허겁지겁 다시 앞부분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당했구나. 졌다. 완패야. 분하지만 앞을 뒤적이며 '그래 이게 이상했는데!'하며 무릎을 탁 치고 만다.

 

 

 

하지만 그 패배가, 결코 씁쓸하지 않다. 이 기상천외한 트릭에 감탄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씁쓸하기는 커녕 작가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속아넘어가준 내가 기특할 정도다.

그의 계책이 참으로 얄밉다. 하지만 기분은 좋다.

사이코패스의 무자비하고 자극적인 살인이 있는 것도,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너무나도 새롭고 신선한 무대장치 위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런 저택 미스터리에 불과했건만, 봉인이 풀린 순간부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내가 어떻게 하나, 두고보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반전이 있다고 광고를 하고 있음에도 완벽하게 속아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그 반전이 상당히 유쾌하다.

 

 

 

어찌보면 평면적인 모든 요소를, 트릭 하나 만으로 뒤집어버린 쓰쓰이 야스타카의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 나는 그저, 읽어보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반전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읽다보면 깨닫는다. 어느샌가 앞을 뒤지고 있는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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