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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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어떻게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럴수가 싶은, 인간으로서의 윤리관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저럴수가 싶은, 극악무도한 행동에 경악한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런 짓을...'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아닌 동물들에 비유하곤 하는 저 말은, 최근의 행태를 보면 이렇게 말하기가 민망하고 짐승에게 미안해질 정도다. 인간이 아닌 짐승이 어찌 그런 짓을 하겠는가! 감히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악의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언어는 달라도, 생각하는 바는 비슷한 것 같다. 소설의 제목인 '비스트'는 스웨덴에서 범죄자 중에서도 성폭행범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을 보면. 성범죄, 특히 아동 성폭행범을 생각하면 치가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얼마 전 읽었던 야쿠마루 가쿠의 <어둠 아래> 역시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고, 읽는 내내 분노에 몸을 떨었었더랬다.

마찬가지로 아동 성폭행범의 범죄, 그리고 그에 대한 처벌에 대한 딜레마를 그려내고 있는 <비스트>. 북유럽에서 날아온 성범죄, 그리고 그에 대한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이 사회가 그 아이들 보호에 실패했다고 해서 스테판손에게 성범죄 '용의자에 지나지 않는' 자를 자기 멋대로 저형할 권한을 쥐어준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p.330

 

 

 

 

작가의 전력이 독특하다. 실제 범죄자와 전직 기자의 만남이라니, 묘하다. 기자였던 안데슈 루슬룬드는 교도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취재하던 중 과거 범죄를 저질렀던 전과자이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처한 출소자들을 돕는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는 버리에 헬스트럼을 만나 <비스트>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 성폭행을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범죄의 길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헬스트럼. 그만의 경험이 소설속에 녹아들어 이 <비스트>는 엄청나게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소설이 된 것은 아닐까.

 

 

 

리투아니아의 실화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죄를 처벌해주지 않는 사법기관을 대신해 그 가해자를 단죄한 아버지. 생명은 소중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뻔뻔하게 살아간다는 것 역시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나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나도 이해가 됐었다. 하지만 마냥 옹호해 줄 수는 없는 이 딜레마. 무엇이 옳은지, 여전히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비스트>를 읽고 난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일단 소설의 내용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방금 말한 리투아니아 아버지의 사연과 흡사하다.

 

딸 마리를 애지중지 보살피고 있는 이혼남 프레드리크는, 어느 날 딸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낯선 남자와 마주친다. 그리고 벤트 룬드의 탈옥 소식을 들은 그는 공황상태에 빠지고 만다. 마주쳤던 낯선 남자가 바로 룬드였던 것. 필사적으로 어린이집을 향하지만 그의 어린 딸 마리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고 만다. 탈옥한 룬드를 검거하기는 커녕 이렇게 새로운 희생자를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속수무책인 경찰들을 대신하여, 프레드리크는 직접 총을 든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룬드의 다음 희생양이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아이 아빠가 그 성폭행범을 살해한 건 옳지 않은 일이야. 맞아. 그럴 권리는 없는 거야.

하지만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건 더더욱 옳지 않은 일이 됐을 거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p.361

 

 

 

 

 

성범죄자를 살해함으로써 그의 죄를 직접 처단한다는 것. 그것은 과연 정의일까? 물론 누구에게도 한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을 권리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탈옥한 그를 잡아들이지도 못한 무능력한 경찰 때문에, 사법 제도와 기관 때문에,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내버려둔 채 또 다른 소녀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

 

 

 

실제로, 리투아니아의 아버지는 끝내 구타 흔적이 있으나 구토로 인한 질식사로 판정된 채 변사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과격한 행동에도 지지를 보냈고, 그의 장례식은 끝없는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비스트>의 두 작가는 한 발 앞서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름대로 세워져 있던 내 머릿속의 가치관을 뒤흔든다.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논란 역시 또 하나의 시각에 불과하다고,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프레드리크 스테판손이 범죄를 저지른 건 맞지. 그런데 그를 영웅으로 만든 건 저 군중이 아니오.

그는 그 '자체'로 영웅이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자청했기 때문이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p.389

 

 

 

 

 

프레드리크의 행동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뜨거웠고, 그에게 살인죄로 최고형량을 선고하려는 검사의 움직임에 대해 시위대는 거세게 반대한다.

프레드리크는 딸을 잃은 슬픔, 룬드에 대한 분노, 그 모든 감정들이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끝내 무죄 판결이 내려진 프레드리크를 지켜본 또 다른 선량한 시민은, 이것으로 '잠재적인' 성범죄자에 대한 단죄를 직접 내려도 괜찮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룬드 역시 '잠재적으로' 소녀들을 폭행하고 살해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처럼. 그는 단 한번의 노출로 마을에서 소외되어있는 '잠재적으로' 모두에게 노출을 일삼을지도 모를 마을의 남자를 공격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감정적인 판결인가, 사회를 지키기 위한 판결인가. 딸을 빼앗아간, 또 다른 누군가의 딸을 빼앗아갈지도 모를 성폭행범의 목숨을 빼앗은 아버지에 대한 판결은 어떻게 내려야 할까.

 

 

 

극한의 리얼리티,를 그려냈다. 교도소에서도 확연하게 나뉘어지는 성범죄자에 대한 혐오, 격리 수용하는 성범죄자들에게 수없이 시행하는 교육과 치료, 딸을 잃은 아버지의 분노, 아버지의 복수에 대해 공감하는 여론, 거기에 휘말리는 선량한 시민. 그리고 무엇보다 2004년에 출간되었던 <비스트>의 소설이 그대로 재현된 듯 실제로 벌어진 사건.

정말 상상 속에서만, 소설 속에서만 벌어지길 바란 일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이 <비스트> 속 인물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스웨덴에는 사형제도가 시행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한 사법제도는, 룬드라는 악랄한 성폭행범의 탈옥 기회와 또 다른 희생양의 발생이라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스웨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성범죄는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이고, 그 수많은 범죄자들은 전자발찌라는 허술한 보안으로 감시되고 있다. 그 눈을 피해 여전히 그들은 새로운 범죄를 저지른다.

 

룬드는, 수많은 치료와 교육을 받았지만 끝내 교화되지 못한 채 새로운 희생양을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소설 속 교도소장 렌나트는, 성폭행범들을 교화시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회의적이기만 하다.

이들은 끝내 이렇게 짐승보다 못한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기력한 사법 제도 대신 개인의 복수만이 정의를 실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우선 순위를 두고 있던 모든 가치관이 뒤흔들린다. 모르겠다. 여전히 내릴 수 없는 답. 그리고 그것은 엄연한 '현실'인 것이, 너무나도 슬프고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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