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의 미궁호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6
야자키 아리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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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좀 더 내면을 봐줬으면 합니다. 외견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인상인 인축에 무해하고 몸집은 이렇게 작아도 두뇌는 명석.

두뇌 회전도 빠르고, 책략에도 능합니다. 포커페이스에도 자신이 있습니다."

그야 그럴 테지. 점 눈인데.

-p. 170, 「작은 사람과 큰 하늘 - 다시 봄 이야기」

 

빛바랜 분홍색에, 쀼죽 튀어나온 코와 커다란 귀. 오른쪽 귀는 뒤로 젖혀졌다. 검은 구술을 꿰매 붙인 점 눈.(p.20) 그랜드 호텔의 버틀러 '야마자키 돼지돼지씨'의 생김새다. 버틀러가 무엇이냐고? 호텔은 가본 적이 없어서인지 나는 처음 듣는 직업이었는데, 돼지돼지씨는 직원 교육 및 호텔의 전반적인 관리를 맡고 있단다. 배구공만한 크기의 봉제 인형이 움직이면서 이렇게 일을 한다고? 호텔은 이 기이한 볼거리 때문에 관광객들로 북적대진 않을까? 그러나 꽤나 괜찮은 서비스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찾아오기 힘든 이 호텔에 찾아온 손님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돼지돼지씨는 나타난다. 몇 번을 찾아와도 돼지돼지씨를 만나지 못하는 이도, 단 한 번의 방문임에도 돼지돼지씨를 만나는 이도 있다. 다행히도 나는 그랜드 호텔에 찾아온 다섯 손님 덕분에 돼지돼지씨를 종이 위에서나마 만나는 행운을 누렸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해 두자. 혹시 무섭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사람 나름이다. 누군가에겐 귀엽고 다정다감하지만 누군가에겐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법.

 

「인형의 밤」을 위해 돼지돼지씨를 설득하는 역할을 맡게 된 스기야마 오리는 설득을 하면서 돼지돼지씨에게 감화되어 자신도 역시 학창시절의 '연극'에 대한 열정을 되찾는다. 유성우가 내리는 밤, 그랜드 호텔에서 유성우를 바라보면 「부드러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여자친구 가나에를 따라 그랜드 호텔에 찾아온 아키미쓰는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다. 봄에 결정된 『오셀로』연극 상연을 위해 오디션을 보는 도중, '친구를 따라', '심심해서'라는 이유로 두 부녀가 그랜드 호텔을 찾아온다. 하지만 친구 따라 오디션을 보러왔으나 돼지돼지씨의 권유로 덜컥 데스데모나 역을 맡게 된 딸과 오셀로가 된 아버지. 「부루퉁한 데스데모나」를 위해 돼지돼지씨가 나섰다! 그리고 겨울, '어디 갇혀서 원없이 원고를 써 봤으면 좋겠다'고 무심코 내뱉은 말에 정말 그랜드 호텔로 끌려오게 된 호러 작가 구마노이. 풀리지 않는 원고에 머리를 감싸쥐던 그는 우연히 돼지돼지씨를 만나 공포에 떨게 된다. 그 무서웠던 돼지돼지씨와의 만남이 글에만 옮겨졌다 하면 너무나도 귀여워 고뇌하던 그는 감기에 걸려 며칠간 돼지돼지씨의 극진한 간호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귀여운 중년판 앨리스 이야기, 「앨리스의 미궁 호텔」을 펴낸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봄, 야심차게 준비했던 연극이 상연되고 또다시 그랜드 호텔에는 손님들이 찾아온다. 연극 무대에서 돼지돼지씨를 만난 사람들, 세상은「작은 사람과 큰 하늘」이 있다. 그들에게도 소소한 행복은 찾아올 수 있겠지.

 

너무나도 귀여운 돼지돼지씨와의 만남은, 정말 그랜드 호텔의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돼지돼지씨를 당장이라도 찾아보게 만들어줄 정도로 귀엽고 앙증맞았다. 돼지돼지씨의 매력은 귀여움과 앙증맞음 뿐만이 아니다. 다정하고 따뜻한, 그리고 침착한 돼지돼지씨의 성품은, 그가 별다른 마술을 부리지 않더라도 그를 만난 손님들에게 '약간의 위로'로 그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 배려심 깊은 서비스는 그랜드 호텔을 최상급으로 만들어 주는 게 아닐까? 아마 호텔로서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직원이리라. 공공연한 비밀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계절별로 소소하게 사연을 가진 손님과 돼지돼지씨와의 만남, 그리고 그렇게 위로를 받고 돌아가는 에피소드도 매력적이지만, 단연코 좋았던 에피소드는 마지막 「작은 사람과 큰 하늘」이 아니었나 싶다. 에피소드 속에서 『오셀로』가 상연되면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귀여운 돼지돼지씨의 모습으로 만나는 것도 상당한 즐거움이었고, 직접적으로 얽히지는 않았지만 그랜드 호텔의 주변을 맴돌던 인물들이 모두 모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행복을 바랐지만 매 번 호텔을 찾아와도 동행인만 행복을 찾아 떠나가버린 가나에와 소설의 성공으로 나도 직접 찾아와보겠다고 호텔에 숙박하는 작가 도리우미, 그리고 연극의 주역들의 어머니이자 전부인으로서 무대를 지켜보는 히로코, 매 번 꽃을 배달하지만 누나가 말하는 돼지돼지씨가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는 오리의 동생 요시나리까지. 나 역시 그들 중의 한 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그랜드 호텔을 찾아올 것이고 언젠가 마음이 지쳐 있을 때 돼지돼지씨를 만나 따뜻한 위로를 받겠구나 하는 상상에 마음이 훈훈해져온 것이다.

 

야자키 아리미의 <앨리스의 미궁호텔> 속 돼지돼지씨는 호텔 버틀러이지만, 실제로 돼지돼지씨는 더 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작가의 봉제 인형을 모델로 돼지돼지 시리즈를 내놓았다고. 덕분에 어떤 때는 형사로, 혹은 산타클로스로, 요리 선생님, 그리고 심지어 호스트이기까지 하단다. 게다가 이렇게 귀여운 모습을 한 돼지돼지씨이지만 실은 40대 남자로 예쁜 아내와 귀여운 두 딸까지 있다고 하니 어엿한 가장이자 아버지로서도 분명히 따뜻하겠지. 이 사랑스러운 봉제인형을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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