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엮음 / 시공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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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정말 재밌다.

아니,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취향이 있으니 함부로 단정짓진 않겠고, 그저 나는 너무 재밌었다. 얼마나 재밌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직 2011년은 3월을 맞이했을 뿐이고, 앞으로도 많은 일본 미스터리가 쏟아져 나올 터이지만 그럼에도 아마 올해 읽은 가장 재밌는 일본 미스터리가 무엇이었느냐 묻는다면 난 아마 이 작품을 꼽을 것 같다.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를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에 변수는 아직 남아있지만 꽤나 높은 확률로 말이다..^*^

 

이 사건은 뭔가 하늘의 의지가 움직인 것 같습니다. 32년 전의 그날 밤 하늘이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p.512

 

때는 1989년, 쇼와(昭和) 시대가 막을 내리고 막 헤이세이(平成) 연호가 시작된 해. 하모니카를 부는 굉장히 키가 작은 부랑자 노인이 도쿄의 상점가에서 건어물 가게 여주인을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인파가 북적대는 곳에서 소비세 12엔을 내라고 쫓아온 여주인을 죽인 것은 치매가 걸린 노인의 충동살인이 분명했고, 그렇게 상부에서는 사건을 매듭지으려 하지만 요시키 형사는 뭔가 석연치가 않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노인 덕분에 어렵게 찾아낸 그는 26년 전 유아유괴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누명을 써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다 막 출소한 참이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노인의 온화한 성품에 대해 증언하고, 요시키 형사 역시 그렇게 뛰어난 하모니카 연주 실력을 가진 노인이 치매에 걸렸을 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노인이 여주인 사쿠라이 요시코를 죽인 것에는 깊은 사연이 있음을 직감하고 탐문을 나서고, 과거 노인이 소설을 쓸 정도로 지적인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여차저차 손에 넣은 노인의 소설집에 실려있는 이야기는 기묘한 환상소설로, 기차에서 자살한 피에로가 30초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야기, 하얀 거인에 의해 순간적으로 타고 있던 기차에서 다른 기차로 옮겨지는 기묘한 체험이 담겨 있는 이야기 등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에 이어 오랜 세월을 이어져 왔던 노인의 과거와 그 진실과 마주치게 된다ㅡ.

 

'본격과 사회파 미스터리가 완벽하게 융합된 불멸의 걸작!'이라는 책의 띠지는 거짓말이 아니다. 보통 홍보를 위해 과장된 감이 없지않아 있는 것이 띠지이건만 이번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계속해서 속속 드러나는 쇼와 32년(1957년)의 기묘한 사건에서는 본격 미스터리에서 볼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해 벌어진 사건과 결국 그 일련의 현상들이 딱 맞어떨어지는 트릭의 열쇠가 들어있었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노인에 얽힌 사연은 오랫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역사'였다.

 

"나는 누구에게도 으스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권력지향 따위 요만큼도 없는 평화주의자다.

하지만 이렇게 온순한 나를 때때로 당신 같은 남자가 광포하게 만들어.

당신은 이 사건이 뭔지 알고 있나? 이 사건이 일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나 있느냔 말이다!

아직도 치매 걸린 노인이 소비세의 의미를 몰라서 발작적으로 여주인을 죽인 사건이라 생각하겠지."

 

요시키는 입술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노인에 대한 자신의 무력함이 사무쳐 있었던 것이다.

 

(중략)

 

"나를 바보라 부르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 노인을 쓰레기라 부르며 이 이상 힘들게 하는 건 참을 수 없어. 가만히 놔둘 수 없단 말이다!"

 

-p.509~510 중

 

<점성술 살인사건>,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이방의 기사>의 미타라이 & 이시오카 콤비 이외에도 시마다 소지는 <침대특급 하야부사 1/60초의 벽>으로 시작되는 형사 요시키 다케시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이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는 요시키 다케시 시리즈 중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 소개되었다.

 

게다가 미타라이의 까칠함도 좋지만, 그와는 달리 정직과 성실함을 내세우는 요시키 다케시 형사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아직 이 작품 하나 뿐이니 요시키 시리즈가 계속 출간되어 이 분의 매력에 더 허우적 거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건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고...

 

흩어진 퍼즐과 역사적 사실이 맞물려 긴박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다보면,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가 무색해질 정도로 흡입력있다. 그리고 마지막 결말에 이르러서는 가슴아픈 현실에 마음이 찡해질 수 밖에 없었다. 1989년 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이렇게 작품 활동을 통해 파격적인 소재를 통해 메시지를 담았던 시마다 소지의 용기가 대단하다.

 

그 메시지가 뭐냐고요? 읽어보세요..ㅋㅋ

 

 

 

* 지금부터는 시마다 소지의 그 메시지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사 요시키 시리즈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마침 이 작품이라는 것 역시 우리로서는 상당히 감회가 깊을 듯하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소비세 12엔 때문에 벌어진 치매노인의 충동살인이지만, 30여 년 동안 숨죽여있던 사건의 진상에는 가슴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사건이 벌어진 당시의 피에로이자 노인이었던 여태영의 사연은 그냥 단순한 미스터리로 넘길 수 없는 메시지가 있다. 이름부터가 '여태영'이고 배경만해도 1957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의 가차없는 조선인 징병과 그들에게 대한 인간 이하의 대우. 고향이 그리워도 돌아갈 수 없는 여태영, 태명 형제의 이야기는 단순히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마치 옛날 우리 할아버지들인 것만 같아ㅡ가 아니라 맞다ㅡ마음이 아팠다.

 

일제 시대, 조선인 강제 징용 및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갈등을 이루고 있는 주제다(사실 갈등 할 것도 없이 명백한데 말이다!). 여전히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은 우리와 굉장히 달라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이들이 많다. 지금 시기가 시기인지라 조심스럽지만 그런 점에서는 여전히 분통이 터지는 일인데, 이 사안을 시마다 소지는 1989년이라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당시에 '미스터리'로 일본 사회 속 스트라이크 존에 직구를 날렸다. 과연 당시에는 어떤 반향이 일어났을지 모를 일이지만, 확실히 한국인인 우리로서는 읽는 감회가 오히려 더 남다를지도 모르겠다.

 

시마다 소지는 이 사회파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본격'과 융합해 기괴한 사건으로 잘 만든 '본격 미스터리'로도 읽을 수 있게끔 했다. 피에로의 시체가 사라지고 가만히 두었던 시체가 갑자기 움직이고 그리고 눈이 붉은 하얀 거인이 열차의 차체를 들어올렸다고 증언하는 기관사의 목격담은 웬만한 본격 미스터리에서 엿볼 수 있는 퍼즐 맞추기를 넘어서 '혹시 괴담 아냐?'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기괴하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그래도' 결국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퍼즐로 완성된다.

 

기괴한 이야기와 30여 년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생과의 약속을 품고 살아왔던, 내 마음을 흔들고 하늘마저 움직였던 한 남자의 마음을 그려낸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여러가지 의미로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을 것 같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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