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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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들어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런 책을 잘 못만났다. 고전을 좋아하지만 장르문학으로 분류되는 책들도 꽤 좋아하는 편인데 일 때문에 피곤한 것도 있겠지만 그런 책들조차 요새는 재미가 없었었다. 추리물들조차 별로 흥미를 못 느끼고 흡입력이 좋지 않아 끝까지 읽지 못하고 흐음, 하고 덮어버리던 때가 많았는데 그믐,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다시금 책읽기의 기쁨을 준 책이었다.

밝은 기운이라고는 없지만, 심지어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신선했다. 신선했다는 말이 조금 이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울한 느낌은 그늘이 진 느낌이고 그늘이 진 느낌은 신선과는 거리가 있는 느낌이니까.
각자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신기해서 신선한 것라고 느끼는 걸 수도 있겠다. 어떤 평론가는 이 소설을 죄와 속죄에 관한 이야기라고 썼던데 뭐 그렇게 보는 수도 있겠지만 난 그냥 한 남자를 두고 한 여자는 사랑을 향해 한 여자는 복수를 향해 가는 이야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남자와 여자가 끝과 결말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다.

우주 알이 몸에 들어오면 이런 점이 참 안 좋아. 왜냐하면 어떤 만남이 어떻게 끝이 날지 뻔히 보이거든. 그런데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안 좋게 끝나? 여자가 물었다.
너는 어떤 게 좋아? A, 약간 짧지만 완벽하게 기승전결이 되고 아련한 마음으로 헤어지는 인연. B, A하고 똑같은 기간을 보낸 다음에 조금 더 시간이 추가되는데 끝날 때 굉장히 안 좋게 끝나는 관계.
시간이 얼마나 추가되는데?
글쎄. 하루 정도라면?
그렇다면 A지. 하루 차이가 뭐 중요한가. 다 끝나더라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게 중요하지.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끝나는지는 결말에 나와있다. 남자가 항상 짐작하던 방식으로 결말이 나는데 그가 짐작한 것을 여자도 짐작했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아무리 많은 대화를 나누어도 결국 공유되지 못한 부분이라는 게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내가 보기엔 어렴풋이 짐작은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결말의 순간이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었을 것 같다.
그리고 남자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자신의 삶을 갉아먹어나가는 가해자를 이해하는 방식을, 여자가 완전히 이해했는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여자는 거의 마지막까지 남자 곁에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해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

네가 옆에 있어줘서 다행이야. 여자가 고양이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같은 날 집에 들어갔으면 정말 미쳐 버렸을 거야.
진짜 웃기는 게, 내가 이제 아빠 심정을 알 거 같아. 아빠가 왜 그렇게 엄마를 지긋지긋해했는지. 집에 들어가면 엄마가 한상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하루종일 심심했던 거야. 누구랑 말을 하고 싶은데 계속 참았던 거지. 내가 집에 들어가면 현관에서부터 나를 졸졸 쫓아와. 옷 갈아입고 있는데 옆에서 막 얘기를 해. 오늘 자기가 어디 마트를 갔는데 집 앞 마트에서는 한 봉지에 오백원하는 콩나물을 거기서는 사백오십원 하더라, 그런 얘기. 나는 마감 끝나고 집에 가면 정말 사람이 파김치가 돼서, 그냥 불끄고 자고 싶거든. 누구하고도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야. 그냥 지갑에서 천원짜리 한장 꺼내서 던져주면서 그걸로 콩나물 마음껏 사시라고, 대신 그런 이야기 나한테 하지 말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야.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엄마가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해. 나는 오줌 누고 있는데 화장실 문밖에서 이모가 이번에 대만으로 여행을 갔는데 그렇게좋았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해. 자기도 보내달라는 얘기지. 그리고 우리 엄마는 맨날 어디가 아파. 병원 가보면 별것도 아닌데 내 관심을 끌고 싶은 거야. 엊그제는 나한테 자기 눈알이 튀어나온 거 같지 않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어. 눈이 아프대. 내가 보면 그냥 나이가 들어서 볼살이 빠져서 그런 건데.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하니까 몸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신경이 쓰이나봐. 그런 이야기를 나 잠들 때까지 한 시간이고 두시간이고 해. 우리집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거든. 거실이랑 침실. 잘 때 요 깔고 누워 있으면 누워서도 그런 얘기를 해. 듣다보면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 내가 자기 얘기를 안 들어주면 엄마가 너한테 그 돈을 왜 들였나 모르겠다, 돈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고 말해. 여자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아빠 심정이 이해가 가. 엄마를 막 때리고 가구도 다 때려부수고 싶어. 그 입 좀 닥치라고.

좀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이야기의 결말에 다다르고 말 것 같다. 굳이 반전이 있는 소설이 아니라도 내가 스스로 이야기를 따라가며 결말을 맞이하는 게 소설과 만나는 가장 행복한 방법 같다. 내가 아직 어떤 책을 읽지 못한 독자라면 분명 그럴 것 같다. 이야기의 손을 잡고 조금씩 걸어가다가 어떤 장면과 확 마주쳐야 하지, 누군가 그 장면에 대해 '이랬대!' 하는 외침을 들은 후에 그 장면을 마주하는 것은 같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느껴지는 울림이 다를 테니까 말이다.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 여자 곁을 떠나고 여자가 혼잣말처럼 묻는다. 단어들의 순서를 바꿔가며.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소설 속에서 이름조차 나오지 않은 그 '남자'는 정말로 누구였을까. 그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한 걸까.

책을 덮어도, 다른 소설들 속 어떤 특이한 이름을 가진 주인공들보다 더 오래 기억이 날 것 같다, 이 이름 없는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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