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포수 이야기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우연히 이 소설을 교정을 하면서 읽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교정보다, 이 소설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딱히 그런 게 있을 리 없지만 나에게는 일본 소설= 장르 소설이라는 편견이 조금 있는 편이었다. ‘빙점이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등의 정통소설도 분명히 있는데도 여전히 나에게 일본 소설은 장르 소설이었다. 아무래도 현재 많이 번역되는 일본 소설들이 그러한 부류가 많아서 일수도 있고. 아무래도 인기 있는 일본 장르 소설들이 많은데 그들의 색깔을 내가 좀 확대해서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을 읽으며 놀랐던 것은 흔히 요즈음의 인기 있는 살인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리를 위해 소설의 재미를 위해 아주 흔하게 사용되는 것이 살인이라는 소재인데, 이 소설은 살인 사건, 혹은 큰 줄거리가 될 만한 폭행 사건조차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싸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서 살인 사건이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사건이 아님에도 요새의 영화나 소설들은 쉽게 그런 사건들을 설정하고는 한다.

 

신기한 게 여기 나오는 주인공은 딱히 누굴 미워하는 게 없다. 주인공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강하게 막는 사람도 없다. 내가 이게 신기한 이유는 모든 강력한 서사에는 안티 히어로, 라고 할 만한 누군가가 있어서 주인공의 곁에서 죽도록 인생을 방해하는 인물이 있어야 이야기는 재미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그게 없다.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이 하고자 하는 일은 방해하는 무언가(그것이 사람이든, 제도이든)가 있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꽤 강한 흡입력을 갖고 있는데 그런 나쁜, 절대악 같은 것이 없다. 이상해, 이상해, 하면서 계속 읽었다. 약간 사냥꾼판 원피스 같기도 하달까. 물론 만화보다는 훨씬 많이 현실적이고 생생하긴 하지만, 주인공을 괴롭히는 어떤 놈도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거나 그렇다.

 

주인공 도미지는 사랑하는 여자 후미에가 있지만 그녀의 아버지의 반대로 혼인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녀의 뱃속엔 둘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 걸 알게 된 그는 그녀와 함께 자신의 고향을 떠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랑 앞에선 한 조각 부끄러움 없던, 주인공 도미지와의 밤을 보내기 위해 집 앞 감나무에 아버지의 부재를 알리는 표식까지 해줄 정도로 그와의 사랑에 적극적이었던 정인 후미에는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너와는 혼인할 수 없다며 그와의 도피를 거절한다. 그 순간 그는 엄청난 분노를 느끼기보다, 그녀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그리고 함께 느꼈던 수많은 떨림과 많은 밤들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생각하며 마음 한 곳이 텅 비는 것을 느낀다.

도미지는 후미에를 임신시킨 벌로 고향을 떠나 광산으로 떠나게 된다. 집안 대대로 마타기(곰 사냥꾼)이었던 도미지는 탄광에서 일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난다. 인생을 확 바꿀 사람일 수도 있고, 그냥 그래야 했던 인연이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말이다.

 

 

그 중 인상적인 남자가 우메조다. 우메조는 바깥 세상에서 보자면 늙고 병든 퇴역광부다.

도미지가 업어서 탄광에까지 데려다 줄 정도로 그는 기력이 없는 늙은이다. 도미지가 우메조를 업고 탄광까지 걸어가면서 느끼는 감정이 보편적이면서도, 생생하다.

p.181

일어서 보니 생각보다 가벼워서 놀랐다. 우메조는 뼈와 피부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사냥한 곰을 업을 때보다 훨씬 가볍다. 이 정도라면 오자와의 함바까지 남은 이 킬로미터를 중간에 쉬지 않고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걷기 시작한 도미지의 등에서 우메조가, “미안해, 젊은 친구하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비열한 말들은 자취도 없었다.

어쩌겠어요, 산속에 버리고 갈 수도 없고,” 도미지는 그렇게 대답하고 말없이 걸었다.

늙은 아버지 어머니를 이렇게 업어 드릴 기회가 있을까, 영원히 없겠지, 하고 생각하니 못 견디게 쓸쓸했다.

 

도미지는 고타로의 누나인 이쿠와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걸림돌은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 이쿠는 창부로 살았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마는, 한동안 그녀도 그 삶을 즐기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성정의 여자였다. 그런 여인을 단지 그럴 수 밖에 없는 삶이었다, 라고 생각하고, 안쓰럽다, 고 생각하며 껴안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 그녀와 결혼을 하고 삶을 꾸린다. 나중에 이쿠와 후미에는 도미지를 놓고 말없는 싸움을 하게 되는데 이 장면은 직접 눈으로 읽는 것이 더 매력적일 것 같으니 비밀로 남겨놓는 편이 좋겠다.

 

마지막이 될 곰과의 전투에서 도미지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p.551

곰을 죽이면 비가 온다. 마타기에게 전해지는 전승을 충실히 지키려는 듯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진눈깨비 섞인 차가운 비가 볼을 때리자 도미지는 의식을 찾았다.

죽은 곰 옆구리에 자신이 등을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력을 잃었나 하고 한순간 당황했다. 희미하게 떠오른 숲의 윤곽을 포착하고 이미 밤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떨어지는 빗방울로 목을 축이려고 입을 벌렸다. 왼쪽 볼이 아교로 붙여놓은 것처럼 뻣뻣해서 뜻대로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한 곰이 안내한 대로 마을을 따라 내려온다. 마치 곰은 정령이라도 되는 듯이 그를 인도한다.

생생한 듯한 꿈을 꾸는 이야기, 라고만 표현하기엔 미흡한 느낌이다. 이것이 심장이 뛰는 느낌의 삶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두자. 정확한 느낌은 읽은 사람만 느낄 수 있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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