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맞추다 - 딱 하나뿐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
김미나 지음 / 특별한서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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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맞추다-딱 하나뿐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 김미나 저, 특별한서재 출판사, 초판 발행일: 2017년 9월 29일, 183page.

 

이 책을 읽으며 오롯이 혼자되는 시간동안, 복잡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에세이의 매력은 누군가와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것처럼 편안한 마음을 들게 한다는 데 있다. 쳇바퀴돌듯 이어지는 루틴한 삶에서 가끔씩 숨을 트이게 하는 시간들 중 하나로, 나는 독서를 꼽겠다. 그리고 부담없이 그들의 사색을 들여다보며 또 나만의 사색을 만들어가는 시간을 체면 차리는 일 없이 고맙게 받겠다. 김미나의 저서, <눈을 맞추다>는 작가의 사색에서 나온 이야기들의 모음집과 같은데 읽다 보니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그 부분을 발췌하는 동시에 나의 생각을 조금씩 덧붙여 정리해본다.

 

 

 

1. 특별한 너와 나 - 대체불가한 것의 품격

<나는 예술이야>
나는 하나의 예술 작품입니다. 나는 매일 근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예술 작품이 근사하게 보여야 하는 건 아닙니다. 예술 작품이란 보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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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이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것이 예술 작품의 현존 이유라고 했을 때, 누군가에게 나는 오늘 하루 어떤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을까?
작품을 작품답게 하는 것은,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작품이다'라고 느껴지게 하는 요소에는 그 작품의 타고남도 있겠지만 상대에게 느낌을 전달하는 표현 방식이나 은연중 드러나는 그의 사고, 태도, 습관도 한몫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너와 나의 용기>
지친 하루의 끝에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내일 다시 해봐야겠어." 라고 말하는 용기, 비겁하게 도망을 치다가도 머뭇거리며 다시 뒤를 돌아보는 용기, 막막한 마음에 주저앉아 울고 난 뒤 다시 주섬주섬 자리 를 털고 일어서는 용기, 어이없이 변해버린 사랑에 마음이 부서지는 아픔을 겪고서도 다시 사랑을 믿어보는 용기, 지난날의 부끄러운 순간들을 인정하고서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으로 끌어안는 용기. 보통의 우리들이 가진 아주 특별한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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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호되게 당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고 부끄럽고 떠올리면 괴롭지만 또 한 번 손을 내미려 하는 어찌 보면 결과가 정해져 있는 것에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처럼 보이는 그 태도를 <용기>라고 칭할 수 있는 그 시선은 되려 너무나도 힘들고 견디기 속상하고 아팠던 시간들을 감내한, 아니 감내해 본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과 '공감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새삼 생각해보는 밤.

<쓸모 있는 사람과 필요한 사람>
나의 '필요'가 꼭 '쓸모'와 동의어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굳이 '쓸모'는 없을지라도 곁에 두고 보는 것만으로 좋은 것도 있습니다.
모든 이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세상에 있는 것 만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기에 꼭 '필요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함부로 '쓸모'라는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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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꼭 연락을 일정 시간 이상 신경써서 하지 않아도, 예쁘고 좋은 옷을 입거나 공들여 화장하지 않아도, 생각이 날 때나 힘이 들 때 툭 연락하고, 트레이닝복 혹은 집에서 편히 입는 반팔에 무릎 조금 나온 바지와 슬리퍼 직직 끄는 차림으로 "야 나와" 해도 마치 어제본 것처럼 나와주는 친구들과, 못생겼다 타박해도 예쁘다는 눈빛으로 보는 부모님과, 어떤 모습도 사랑스럽다는 연인이 있다. 내가 필요해서가 아니고 내가 쓸모있어서가 아니다.

<나에 대한 정의의 품격>
그릇 안에만 있어서는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출렁이며 밖으로 넘쳐흐를 때, 비로소 사람들은 나를 '정의'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보여주는 웃음과 따뜻한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가 나를 규정하는 것들입니다. 나의 품격있는 '정의'를 위해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릇의 품격이 아니란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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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을 표현할 수 있는 '정의'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생각나는 몇 가지가 있다. 실은 여자라는 젠더도, 경기도에 산다는 지리적 위치도, 어떤 학교를 졸업했고, 어떤 학과에 소속되고, 어떤 회사에 취업했다는 그 흐름도 실은 '온전한 나' 자신을 표현해내기엔 너무나도 부족한 정보에 불과하다고. 실은 나를 표현하려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에 행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어떤 노력을 하고, 내일은 또 어떤 하루를 살아낼까 하는 기대는 또 어떻게 가지고 있나 하는. 정말 '나만의 생각'이 중요한 거라고.

<진짜 샤넬>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려면 언제나 남들과 달라야 한다." 20세기 초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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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아와
대체 불가능한 독특함, 개성... 이 둘은 한끗 차이 아닐까.

<사자는 하이에나를 질투하지 않는다>
진정한 자신감은 애초부터 자신을 그 누구와 비교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남을 질투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잘 알기에 다른 누군가를 미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주위의 상황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이에나가 사자 주위를 돌며 아무리 기괴한 소리로 킬킬거려도 사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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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자신감은 꾸준한 연습과 시행 착오를 거쳐왔던 시간들, 노력 여부가 합쳐지면서 더욱 단단하고 커지는 것이라면 책에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하고 그런 나 자체가 괜찮은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감이라는 시각. 재미있는 시각이다.

<나의 구원자는 바로 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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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내 마음 속에 있지만, 살면서 얼마나 많은 답을 외부에서만 구하려고 했었는지. 현자가 썼다는 글귀와, 종교와, 수많은 투덜거림 혹은 상담 속에서 내 마음을 대면한 적이 실은 몇 번이나 있을까?

<나에 대한 예의>
남에 대해서는 한껏 할 도리를 다하면서 나를 대하는 일에는 '그냥 대충하면 돼.' 하고 넘어갑니다. ...  남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면서 자신의 못난 점은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며, 남의 가난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 하면서 나의 가난은 단 한순간도 그 비루함을 참을 수 없고, 남을 위해서는 아무리 귀찮아도 오첩반상을 차려내면서 고단한 하루를 보낸 자신을 위해서는 차가운 편의점 김밥이 전부라면, 나는 나의 인생에 사과부터 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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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최선을 다해 상대를 대하려 노력했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거나 이렇다 저렇다 할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었기에 느긋하게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실은 그 느긋함은 무책임함이면서 동시에 자기 존중이 없는 삶 아니었을까 돌아보게 된다. 특히 최근에 회사 자리 이동과 세미나 준비, 정산 같은 일들로 무척 바빴는데, 추석 명절이 중간에 껴있어 내 일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요청이 들어오면 다른 일들을 같이 쳐내주기 바빴고, 결국 추석이 끝나고 한 주 내내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면서 내 일을 해내야 했다. 이외에도 나를 위해 쓰지 않은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실은 나는 나 자신을 존중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존중하며 살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전에 나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나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라는 책 속 글귀가 와닿았다.

<가끔 나의 개가 나에게 가르쳐주는 사소한 것들>
때로는 그저 먹고 자고 해도 괜찮아요. 누가 나와 놀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아요. 혼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놀 수 있으니까요. 내 덩치가 크건 작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싸워야 할 상대를 만나면 용감하게 덤비고 보는 거예요.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지간에 귀여움을 떠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내요. 사랑하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건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요. 세상은 궁금한 일과 궁금한 사람 투성이에요. 낯선 이에게조차 다정하게 굴면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집에 오면 무조건 하던 일을 팽개치고 달려가서 반갑게 맞아줘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건 사랑하는 사람의 품속을 파고드는 것만큼 좋은 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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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를 보며 떠오른 사소한 깨달음이라지만, 은은하게 마음 속에 있던 기억들을 건드리는 글귀였다. 아주 어렸을 땐 아빠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오시면 문 앞까지 나가서 해맑게 맞이하곤 했었고, 지금보다 타인에게 좀 더 마음이 열려있었을 이 때엔 거절당할 두려움에 움츠러들기보다 스스럼없이 다가가 손을 내밀어서다.
최근 러닝이 끝나고 서울숲 한 켠에서 쉬고 있는데, 태어난지 네 달 되었다는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의자에도 인사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인사하고..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해 마구 돌아다니다 나에게도 다가와 애교를 부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한결같은 반가움과 행복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강아지의 태도에서 사소한 기쁨을 다시금 되찾아야겠다고, 한 번 더 생각해본다.

 

 

 

2. 특별한 인생 - 삶을 헤아리는 방법

<삶을 헤아리는 방법>
시험을 치다 보면 한두 문제는 꼭 헷갈리는 게 나옵니다. 그때마다 음,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좀 더 확실해질 거야, 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한번 아리송한 문제는 끝까지 아리송하지요. 인생에서도 마음이 갈팡질팡해서, 혹은 골치가 아파서, 다음에 다시 생각하자고 넘기는 질문들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매번 답을 유예하다보면 결국 내 삶이 빵점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언제 끝나버릴지 알 수 없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 이제 심호흡을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사람인가?
이것이 내가 정말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인가?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이 고비를 넘기고 더 강해질 수 있는가?
나는 정말로 행복한가?
-
정말 해야하는 질문임에도 물을 용기가 없어 유예해버리는, 나를 관통하는 질문들.

<모든 일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니>
당장에는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 나중에 뒤돌아 생각하면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수긍이 가는 순간이 옵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억지로 노력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혼란 속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눈물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일의 이유를 언젠가는 깨달을 날이 올 테니까요.

 

 

 

3. 특별한 존재 - 관계의 본질

<일상의 사랑>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 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베스트 프렌드인 것처럼, 장난을 칠 때는 철없는 일곱 살짜리 애들처럼, 싸울 때는 성숙한 남편과 아내처럼, 그리고 서로를 지켜줄 때는 목숨이라도 건듯 막무가내로 내 편이 되어주는 오누이처럼, 달고 쓰고 짜고 신 삶의 순간을 함께 살아나가는 그런 사랑.

<당신에게는 이런 사람이 있나요?>
울고 싶을 때 나를 웃게 해주지는 못해도 기꺼이 같이 울어주는 사람.
화가 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그만 진정하라고 달래는데 내 마음을 상하게 만든 그 싹퉁머리 없는 것들을 응징하겠다고 나보다 더 화를 내며 소매를 걷어붙이는 사람.
나조차 나를 믿지 못해 우울할 때 나 대신 날 믿어주는 사람.
어려운 문제에 부딪쳐 좌절했을 때 대신 해결해주지는 못해도 결코 나 혼자 그 문제 앞에서 떨고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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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고 고난이고.. 다 답은 있게 마련이고 헤쳐나갈 방법을 스스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헤쳐 나가려 노력하지만 인간이기에 쉽게 좌절하고 또한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럴 때 옆에서 든든하게 나를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힘이 된다. 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한없이 가라앉기만 할 때 괜찮다고 말해주던 누군가, 잘하고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나 그 일에 휩쓸리지 말고 너의 길을 가라고 응원해주던 누군가, 울고 싶을 때 휴지 한장 내밀어주면서 자기도 굵은 눈물 방울 뚝뚝 흘리던 누군가... 그들 덕분에 나는 이렇게 잘 자라고, 잘 지내고 있다는 걸 한 번 더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또 오늘 하루 열심히 살자고 다짐해본다.

<상처의 근원>
끊임없이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어째서 저 사람은 지치지도 않고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의문을 갖는 대신 어째서 나는 지치지도 않고 저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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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주는 누군가가 있어도 그 상처되는 말을 내가 고스란히 떠 안아서 결국 마음 속에 생채기를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냐, 아니면 비판은 받고 인정은 하되 쓸 데 없는 비난은 잘 흘려보내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 것이냐.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다.

 

 

 

4. 특별한 서재 - 나의 벗, 나의 스승, 그리고 나의 우주

<책을 들고 다니면 좋은 점>
지하철을 타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 동안 우리는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게임을 하고 동영상을 보고 인터넷 검색을 합니다. 하루 일과 중에 잠시 빈큼이 생겨도 PC방이나 만화방, 영화관 등 혼자 시간을 보낼 거리는 차고 넘칩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놀 거리를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책입니다.
책은 중간 중간에 쓸데없는 광고가 튀어나와 나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책은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가지고 놀아도 배터리를 충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책은 시간 단위로 돈을 낼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만큼 오래 즐길 수 있습니다. 책은 등장인물의 멋진 외모와 스타일로 나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과 말, 마음 씀씀이를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늘 책을 들고 다니지 않는 걸까요? 어떤 이들은 책이 무거워서 가지고 다니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책이 무거운 건 당연합니다. 그 안에 하나의 세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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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을 들고다니면서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전자책의 등장은 어찌보면 충격적인 일이었다. 가볍고 많은 책을 한 번에 넣어다닐 수 있으면서도 패드에 비해 가격은 꽤 저렴한 편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지인을 통해 전자책을 한 달간 무료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전자책을 들고다니며 읽어보기도 하고, 동사(同社)의  어플을 다운받아 핸드폰에 가지고 다니며 심심하면 책을 읽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손에 닿는 맛(?)이나 읽히는 느낌이 종이책만 하지 못해 조금은 무겁지만 책 들고다니기를 고집하고 있는 중이다.
책이 무거운 것은 당연하다, 그 안에 하나의 세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명철한 정의. 같은 생각이라해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하는 말, 말.


총 네 파트로 나뉘어져있는 이 책의 '작은 우주' 구석구석을 유영하고 나니 요새 바쁘다고 조금 미뤄두었던 나의 일기장이 떠오른다. 나의 역사와 기쁜 날, 슬픈 날, 힘든 날, 그리운 날... 등, 여러 '날'과 '감정'의 집합체인 나의 일기장.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만으로 집에 돌아오면 씻고 침대로 직행하기 일쑤였던 나의 날들에, 일기장을 다시 조심스럽게 초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을 흘려보내지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차곡차곡 정리하고 곱씹으면서 보내야지 싶은, 조금 쌀쌀해지기 시작한 어느 가을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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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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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서른의 반격>, 은행나무 출판사, 1판 1쇄 발행: 2017.10.25(발행 전 가제본 형태로 책이 배송), 235페이지

주인공은 흔하디 흔한 1988년생, 여성, 모기업(책에서는 DM그룹이라고 명명) 인턴, 김지혜. 큰 카테고리로 묶으면 주인공은 나 같기도 하고, 내 친구 같기도 하고, 나와 친한 언니 혹은 선배 같기도 하다. 그만큼 작가가 '흔한 인물'로 주인공을 설정한 이유는 이 소설의 전반적인 스토리와도 관련이 있으면서도 그 누구에게 대입해도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이를 원했음과 동시에, 손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들을 이야기 안에 차용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80년대 정권과 그에 들고 일어났던 청년들의 이야기, 88올림픽과 굴렁쇠 소년,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모아보았을 핑클빵과 국찌니빵, 포켓몬스터빵 속 스티커와 같은 소재는 단순히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 시대의 상징인 동시에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79~80페이지
…규옥이 새삼 묻는다.
"근데 계속 지혜씨라고 불러도 되죠? 기분 나쁘면 이제라도 선배라고 부를까요?"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같은 인턴인데요, 뭐. 동갑이기도 하고."
"그러네요. 동갑."
(…)
"…초등학교 3학년 때 IMF 터진 건 기억나요. 유학 갔던 삼촌 돌아오고 금모으기 운동 한다고 울 엄마 금반지도 팔았대요. 집에 있던 금을 판다고 나라가 구해지나……."
"그러다 중학교 올라갈 무렵 되니 세기말이었잖아요.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그런 노래가 유행할 때 나는 예비중학생 선행학습으로 근의 공식 외우면서 진짜 지구가 망하길 바랐죠."
"핑클빵 먹으면서 포켓몬 딱지 모으던 그 시절이로군요."
"맞아 맞아. 근데 지구는 참 망한다는 소문만 무성하네요. 우리 어렸을 땐 휴거라고 하늘로 다 같이 올라간다고 난리 났었나봐요. 2012년에 한 번 더 멸망한다고 요란 떨더니, 역시 멸망 따윈 안 하더군요. 끈질긴 지구 같으니라고."
우리는 큭큭거리며 김연아 선수의 첫 등장, 슈주의 팬이었던 이력, 매일같이 싸이월드 프로필을 바꾸며 남긴 이불킥 중2병의 흔적 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반올림>의 유아인과 옥림이와 서태지의 부인이 된 정민이, 그리고 88년생 중 가장 성공한 권지용에 대해서도.
"파란만장하네요. 우리 너무 오래 산 것 같아요."


그리고 젊은이들(대체로 20~30대로 상정되는, 좀 더 빠르게는 10대 후반 정도), 특히 직장 생활을 해 본 이들이 겪었을 법한 속내를 살짝 꼬집어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 내용이 '웃프기' 그지 없다. '회사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적절한 성실함과 약간의 능청스러움, 약삭빠르지만 너무 밉지는 않아야 하는 싹싹함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어야 해.' 책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이 책에서 꼬집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고.
더불어 경력이 단절되었던, 이제는 자녀를 낳아 '잘' 키워내야만 하는 능력 있는 여성이 이전과는 달리 회사에 얼마나 약한 존재(소위 '을'로 불리우는)가 되는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회사 안에서 일정 수준의 경험과 시간을 보낸 이가 새 직원을 뽑을 때 느끼는 약간의 으쓱함과 오만함, 그리고 그에 함께 버무려진 씁쓸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지혜씨 본인이 <그 자리가 본인의 실제 자격으로 앉아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것은 단지 '없어보일 것'을 걱정한 팀장의 지시로 머릿수를 채워 앉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텁텁한 맛은 배가 된다.

16페이지
"근데 정말 이런 것까지 직접 갖다 줘야 돼요?"
나가기 직전 최대한 사심 없이, 심지어 황당한 것처럼 질문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핀잔이 이어진다.
"사회생활 안 해본 티가 이런 데서 난다니까.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고, 그냥 이 기회에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
간단한 전략은 성공. 이런 사소한 일에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게 귀찮긴 하지만 이로써 적어도 농땡이를 부린다는 둥, 의자 정리를 해야하는데 나가서 좋겠다는 둥의 잔소리는 안 하겠지.

…유 팀장이 그런 화려한 커리어를 가지고 왜 이곳에 온 건지 용기 내 물은 적이 있다. 한숨과 함께 유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더 살아봐. 결혼해서 애도 둘쯤 낳아보고."

31~32페이지
"앉아 있기만 하면 돼. 진행은 내가 할 테니까. 적당히 도도한 표정이나 짓고 있어."
유 팀장은 팔짱을 낀 채 의자 뒤로 한껏 몸을 기댔다. 간간히 하품을 했지만 손으로 입을 가리지도 않았고 그때마다 내 자리까지 그녀가 뿜어낸 군내가 풍겨왔다. 나는 살짝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봤다. 그러곤 한쪽 다리를 무릎 위로 올려 꼬았다.


그래, 다들 이런 기분이구나.

그 자리는 팔짱을 낄 수 있는 자리였다.다리를 꼴 수도 있고 갑자기 울린 핸드폰에도 여유 있게, 잠시만요, 라며 전화를 받아도 되는 자리.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권력자라고 생각할 거다. 설사 그게 별 볼 일 없는 작은 아카데미의 인턴자리 면접일지라도,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건 결정권을 가졌다는 걸 의미한다. 일정 수준의 경험과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앉을 수 있는 자리. 그런데 나는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소품처럼 앉아 있다. 내가 아니라 낡은 곰 인형이었어도 상관없었을 거다.

우리는 끊임 없이 나이와 수준 등에 따라 나뉜 등급에 따라 교육 받았고, 또 잘 짜여진 커리큘럼에 맞춰 성실하게 제 앞에 닥친 일들을 해왔다. 학생 시절엔 공부를, 조금 더 지나면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혹은 어학 연수를, 시간이 더 지나면 직장인이 되어 스스로의 업무를 처리해 왔다. 모든 흐름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했다. 이상한 것은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기에 오히려 그 흐름에서 벗어날수록 이상한 불안감이 엄습한다는 사실과, 아이러니하게도 그 흐름이 나에게 적합한지 혹은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현실이다. '왜 내가 이 분야를 전공하겠다고 했지?' '왜 내가 이 일에 지원하게 되었지?' '난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그런 물음은 아주 뒤늦게 찾아온다. 바쁘게 걸어가다 정신차려보니 이미 턱끝까지 물에 잠겨있는 사람처럼.

43페이지
나는 그(규옥)의 미련함이 반갑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은 적당히 일을 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분수에 맞게. 주어진 시간과 급여에 맞게. 그러므로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인 우리에게 일이라는 건 꼼수, 눈치, 요령의 삼 요소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최소한의 노동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헤프게 이용당하지 않고, 당연한 듯 착취당하지 않고, 적당히 치고 빠질 수 있다. 계속 못하다가 갑자기 잘하면 칭찬을 받지만 계속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본전도 못 뽑고 신랄히 욕만 먹는다. 아슬아슬 선을 지키는 수준에서 일하고, 할 수 있는 일도 가끔은 못 하는 척 피해가고, 귀찮더라도 가끔 핀잔을 듣는 상황을 만들어 상사를 우쭐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지키며 일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지혜씨. 이런 생각은 비단 책 속에만 갇혀 있지 않다. 현장에서, 일선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 모두의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마음이다. '일'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나. 그래서 일하고 싶은 분야와 전공한 분야를 고집스럽게 통일시키려고 했던 나지만, 그런 나조차도 이 생각에 조금이나마 공감했던 적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여담이지만 내가 처음 일했던 회사는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월급과 함께, 야근에 이은 새벽까지의 술자리 참여를 유도했던 회사였다. 새벽 한두시쯤 되어서야 택시를 타고 겨우 집에 들어가 토막잠을 자고 다음 아침에 무거운 몸으로 출근하던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만두기 직전에 이르러 두 달 정도는 월급이 미뤄질 정도로 직원들과의 약속에 태만했다. 열심히 일하고자 했던 초심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헤프게 이용당한다는 슬픔에 일에 대한 열정도 점점 사그라드는 날들이었다. 지금 그 당시의 나를 평가한다면, '적당히를 모르고 어설프게 열심이었던 사회 초년생' 정도 되는 것 같다. 이처럼 다시 떠올리면 씁쓸함만 남는 과거의 경험들은 '꼼수, 눈치, 요령의 삼요소가 곁들여진 최소한의 노동'을 낳는 밑거름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일부로 전체를 판단하려 해서도, 보편화해서도 안 되는 것이겠지만) 왜 사회는 건강한 일꾼들을 배출하려 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지금 제 모습의 밑거름이 된 젊은 날의 자신을 떠올리지 못하는가. 왜 젊은이들은 '적당히'에 쉽게 타협하는가. 왜 어른들의 세대와 지금 우리 세대는 공감이나 이해 없이 평행선만 달리고 있는가.

128페이지
"누나가 돈 맛을 못 봐서 그래. 철 좀 들어라."
이번엔 지환이 베개를 던졌고 나는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아버지를 닮아 녀석은 워커홀릭 기를 보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특별히 일이 좋아 일만 한 건 아니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택시 운전석에서 보낸 아빠는 남편은 밖에 나가 일을 하고 가정은 아내에게 맡겼던 시대의 평범한 가장이었을 뿐이다. 빠듯한 형편에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은 따박따박 월급을 가져다주는 거라고 생각한 아빠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떤 건지 모르는 상태로 젊음을 흘려 보냈다.
그래도 아빠는 운이 좋은 편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빠는 입이 닳도록 말한 작은 딸기농장을 정말로 사들여 엄마에게 짜잔, 하고 선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택시를 몰아 번 돈으로 딸기농장을 샀다는 사실이 동화 속 꿈 얘기처럼 느껴진다.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얘기니까.
언젠가 그런 얘기를 아빠한테 했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겪어보지 않고 쉽게 말하지 말라는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아빠 세대와 우리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은 그런 건지도 모른다. 각자의 새대가 더 힘들다고 주장하고 그에 비해 상대의 세대를 쉽게 얘기하며 평행선을 달린다.

141~142페이지
"아무튼 고마웠어. 지혜씨가 순수하고 성실하게 일한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거야. 그래서 내가 추천했어. 새로 뽑는 것보단 있는 사람을 쓰라고. 지혜씨는 아직 열정이 있잖아."
열정, 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콱 막혔다.
"나가면서 착한 일 하나쯤 하고 싶더라. 내가 만든 업보를 청산하고 싶은 걸 수도 있고. 그래서 나가는 마당이지만 직접 얘기해주고 싶어서 불렀어. 축하해, 지혜씨. 이제 정직원 될 거야."
얼떨떨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뻐하기엔 너무 찜찜했기 때문이다. 김 부장은 내 눈빛을 읽은 것 같았다.
"그런 표정으로 볼 거 없어. 나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거든. 난 말야, 지혜씨 태어날 때쯤 거리에 나갔던 사람 중 하나였어. 세상은 잘못 돌아가고 있으니까 바꾸라고, 직접 대통령 뽑을 수 있게 투표권 내놓으라고. 탁 하고 쳤더니 억 하고 죽더라는 같잖은 말 하지 말라고……. 그렇게 외치려고 거리에 나가 맨바닥에 드러눕고 목이 터져라 노래했어. 나같은 것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어, 그땐. 세상이 바뀌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서른의 반격>이란 제목을 보며 '서른'이란 나이가 이십대를 종결하고 새로이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고 생각했다. 덧붙여 '반격'이라는 말은 지금의 상태로부터 뭔가 다른 상태의 나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 혹은 나를 골탕먹이고 루즈하게 만들어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는 일상에 변화를 꾀해 보겠다는 다짐으로 보이기도 한다고 적었다. 책을 읽기 전 제목을 분석하고, 읽고 난 후 그 생각을 비교해보는 작업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은 꽤 책의 내용을 관통하는 부분이 있어 그 재미가 쏠쏠했다. 주인공과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만난 인물들이 함께 모여 세상에 반기, 까지는 아니지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줄거리와도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지금의 나는 서른의 나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것일까... 하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앞으로도 이런 생각에 덧붙여 다른 생각들이 차곡 차곡 쌓여갈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어느 부분에서 일치하고 또 불일치하면서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갈 것이다. 주인공 지혜씨가 과거의 자신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고 미래의 자신을 향해 걸어나가듯 나 역시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나갈 것이다.

추가 생각)
 '정진씨'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주인공의 생각이 재미있고 참신했다. 정말+진짜의 첫 자를 딴 정진씨라는 가공의 인물은 혼자 있고 싶을 때 만날 사람이 있다는 핑계가 되어주는, 주인공의 숨을 트이게 하는 장치가 된다. 그렇게까지 핑계를 대야 하나 서글픈 마음이 들게 하면서도 한편으로 지혜씨의 마음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음에도 깊이 이해되는 것 같은 부분이었다.

221~222페이지
…유 팀장이 내게 작은 선물을 주었다. 푸른색 바탕에 볼이 발간 여자아이가 웃고 있었다. 행운을 비는 마트료시카였다. 결혼하기 전 갔던 러시아 여행에서 산 기념품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저한테 이런 걸 주세요?"
"나름의 애정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행운을 빌어. 살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누구나 마음속 깊은 데엔 겹도 모양도 다른 사람이 끝없이 들어 있다는 걸."
유 팀장이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유 팀장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팀장님한테 보여드릴 게 있어요. 고백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나는 구석에 놓인 텅 빈 벤치를 가리켰다.
"소개할게요. 정진씨에요. … 착한 사람 눈에만 보여요."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한 표정이던 유 팀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보인다고 뻥이라도 칠 것 같아?!"
우리는 웃었고 나는 정진씨의 탄생에 대해서 솔직히 들려주었다. 유팀장은 머쓱해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함께할 이유가 없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조금쯤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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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인문학을 묻다 - 인간과 세상을 통찰하기 위한 청춘들의 유쾌한 질문
백두현.백하은.이영창 외 지음 / 휴앤스토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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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인문학을 묻다-인간과 세상을 통찰하기 위한 청춘들의 유쾌한 질문

 

지은이: 백두현·백하은·이영창·정민주·김순영·박이담·홍준호 

초판 1쇄 발행: 2017.09.04, 

휴앤스토리 출판사,

242페이지

 

 

최근 인문학이라는 말이 참 여기저기 많이 등장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각각의 분야를 접목시켜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겠다는 접근 방식은 좋지만, 글쎄다 싶을 때가 많다. 뭐 하나 확실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엮어놓았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나 역시 본 전공이 국어국문학이고 복수 전공으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인문학도 사회학도 완전히 깊이 있게 전공했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고 여러 책들을 읽어보긴 했어도 인문학의 저변에서 자꾸만 맴도는 기분은 지워지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도 쉽지 않았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더 정확할는지도 모르겠다. 되려 어렸을 때의 나는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은 어렵지만 궁금하고, 그건 하기 싫었다. 이렇듯 분명하게 나라는 사람의 취향이나 판단에 솔직한 이 시기를 지나, 한 살 한 살 나이들어갈수록 나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격도 성격이겠지만, 주변의 시선이나 부모님의 기대 등에 나를 재단하는 것이 버릇되고 나니 이제는 정말 나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방법을 잊어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잘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을까. 내 협소한 시선에서 인문학 서적을 본들 무슨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인문학은 내게 어렵고도 두려운 학문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도 모르겠고, 자세히 알고나면 그를 알고 난 나에게 다시금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재차 재단'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지만 궁금하고 알고 싶은 생각이 계속 들어, 이 책을 펼쳤다. <청춘 인문학을 묻다>에서는 인문학의 사전적 정의를 책 말머리에 가장 먼저 보여준다.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영역'이 그것이다. 어떤 시대든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늘 고민해왔고, 각 분야를 놓고 '왜?' 그리고 '어떻게?' 라는 질문에서 늘 자유롭지 못했다. 나 역시 그러한 보통의 인간이어서 그 질문을 수없이 던지곤 했지만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었다. 그랬기에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안다는 고전 몇 가지부터 시작하여 최근 쓰여진 인문학 서적을 읽어보았는데, 각 유명인사들의 '왜'라는 질문과 '어떻게'라는 (주관적) 방법을 나열해 놓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사유하는 방법을 엿보았다는 기분이 들었고 몇 가지는 나에게 직접 적용해보기도 했는데, 그는 단지 그 사람이었기 때문에 잘 적용된 것이기도 했고 혹은 아, 정말 이렇게 하니 명쾌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 책, <청춘 인문학을 읽다> 역시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지 읽기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이 책을 소개하자면 각 분야의 인사들에게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짜여 있다. 쉽게 말하자면 여러 인사들의 인터뷰를 딴 내용을 엮어 만든 책인데, 그 분야는 다음과 같다. 인문운동(이남곡), 국문학(마광수), 한문학(김언종), 정치평화학(이재봉), 법학(류권홍), 신학(김기석), 원불교학(박맹수), 동양철학(김학권), 서양철학(주광순), 물리학(장회익), 경제·정책학(박재완), 문화인류학(이정덕), 건축학(이재훈) 등이다. 전체적으로 그들의 생각은 명쾌하지만 아무래도 저마다의 관점을 엮어놓은 책이다보니 나에게는 와닿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섞여있었다는 느낌. 말머리에서도 그에 대해 염려(?)해서인지 미리 밝혀놓음을 볼 수 있었다.

 

말머리에서
책은 각 인문학 분야에 대한 20대들의 질문, 그리고 각 분야 교수님들의 답변들로 구성되어 있다. 교수님들이 그 학문의 대표성을 띄는 것이 아닌 개인적인 의견을 낸 것임을 밝힌다. 인문학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어디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는 독자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책을 멈추지 마라.
20대의, 20대에 의한, 20대를 위한 인문학 여행,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부분에 유념하며 책을 한 장씩 넘기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일'에 대한 내 요즘의 고민과 맞닿은 내용들이었다. 최근 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쉼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즐거움보다는 의무감과 부담이 쌓이고 있다는 마음에 힘이 들었다. 그런데 "사람은 왜 일을 하나요?"의 답변으로 적혀 있던 몇 줄이, 눈에 띄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 노동이 즐거우려면 상품으로서 경쟁을 강요당하는 것으로부터 적어도 '자기 실현의 노동'으로 되어야 한다. 자기 실현 과정으로 되기 위한 조건은 '자발성', '전념', '즐거움'이 보장되는 것이다. "
맞다. 이 일을 시작했을 때와 달라진 건 나뿐이다. 처음 시작했던 나는 왜 즐거웠고, 지금의 나는 왜 그렇지 않은가? 그건 내가 일을 사랑하는 마음에 변화가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책에서는 다시금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그 출발과 목표가 '받아들임'이에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집착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받아들임'의 시작은 그 대상이 우선 자기 자신이에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상하나 우열에서 벗어나 자기의 지닌 맛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과정에서 불평등한 수직 사회에서의 왜곡되어온 관념에서 해방된다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에요.

 

돌이켜보면 나는 나의 꿈을 실현한다는 생각에서 점점 벗어나 쳇바퀴 돌 듯 되풀이 되는 일상을 그냥 처리해가고 있던 내 기계적인 태도 때문에 힘이 들었던 거다. 남이 생각한 나대로 끼워 맞추며 살아왔던 날들... 의무감에 떠밀려 힘들었던 날들... 상대방이든 나든, 누군가가 원하는 방향대로 무작정 끌고 나가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듯,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를 잘 조율해 나가야 했던 거다. 다른 이가 원하는 대로 나를 무작정 끌고 나가는 것은 건강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도닥여 주며 다잡아 나가는 편이 나를 사랑하며 일하는 방법이자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건강하게 일하는 방법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어찌보면 당연하고 간단한 말이다. 그러나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요즘의 내게는 울림 있는 말이었다. "많이 힘들었지? 힘들면 좀 내려놔도 괜찮아. 잘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 자신에게 수천번 되뇌었지만 나에 대한 합리화 아니냐며 와닿지 않았던 날들. 이렇듯 지쳐있던 내게 해 준 누군가의 이 말이 큰 사랑과 존중으로 다가왔던 지난 날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리고 책에 쓰인 이 글자 몇 줄이 어깨를 도닥이며 건네는 응원의 한 마디 같다고 생각했다.

 

유학에서 말하는 '삶의 의미' 중
인간은 인, 의, 예, 지 등의 품성을 지니고 있어, 저마다 이것을 심화시키고 완성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다. 결국 유학에서 보는 삶이란 인, 의, 예, 지를 최대한 잘 발현하며 살아가는 모습일 것인데, 결국 이걸 다 합치면 '인' 하나로 귀결된다. 너와 나 사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인이라고.
모든 인간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부연하면, 교수로서 열심히 수업하는 게 인이고, 학생은 열심히 배우는 게 인인 것이다. 즉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는 명분을 다하자는 말이기도 하다. (유학의 핵심 내용인 명분주의) 아버지, 임금, 어머니, 자식 다 명칭이 있는데 그것이 명(名)이고, 아버지가 할 일, 임금이 할 일, 어머니가 그리고 자식이 할 일에 대한 것이 바로 분(分)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저마다의 할 일을 다 하라는 것.

 

이 구절이 참 인상적이었다. 나의 명(名)대로 본분을 다 해나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각 사람이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세상에 나가 나의 온 힘을 다하여 세상이 좋아지는 데 힘쓴다면 그야말로 유학이 말하는 이상적 세계일 것이지만, 그렇게 명확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힘쓸 수 있는 이가 이 바쁜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래서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참 중요한 일 같다. 나를 들여다보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마음 어려워하던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위로받은 감정이 들었듯 갈증을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면 책을 읽으며 저자와 대화해보는 것이다. 인터뷰하는 교수님들이 20대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바 중 가장 많은 것이 바로 독서였다. 학창 시절에는 좋은 성적을 받고, 시험에 통과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던 독서였다면 이제 2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이 즈음에서는 나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한 독서가 필요한 시점 아닐까. 독서의 필요성은 아주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지만, 힘들 때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방법이라 생각하니 무언가 독서해야 하는 이유에 좀 더 납득되는 기분이 들었다.

 

철학에 관하여
가고자 하는, 갖고자 하는 가치나 신념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또 옳은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접해봐야 해요. 그래서 비교적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판단되는 생각을 받아서 정리하고, 나름대로 의식 속에 쟁여놓고 이것을 근거해서 살아가는 것이죠.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올바르고 가치 있는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필수 입니다. 즉 나의 삶을 참되고 바르고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것이 철학이에요.

 

책에서는 '나'라는 사람이 단독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우리는 전체와 결부되어 있는, 쉽게 말하면 관계하고 있는 결합체 속에서의 개인이라고 하는 설명이 많이 드러나있다. 철학 부분을 읽을 때 역시 이웃의 삶은 이웃의 삶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과도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라고도 했었고. 작은 불꽃이 크게 번져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보았던 최근의 경험을 돌이키면, 실은 나의 아주 작은 결심, 계획, 실천들이 아주 중요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나라는 개인이 실은 참 중요한 사람이었다고, 힘내라고 전하는 메시지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일하고, 잘 살아가려면 나를 어떻게 다잡아나가야 할까 하는 고민에 이 책을 집어들었지만, 나 자신이 잘 서 있어 누군가가 또 좋은 영향을 받고, 그 다음의 누군가가 또 좋은 영향을 받는...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이 순간 물씬 인다. <청춘 인문학을 묻다>는 청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고민을 인문학이라는 트렌드에 묶어 제시했지만, (나와 같은) 읽는 누군가로 하여금 위안이 되고 용기를 주는, 뭐 그렇게 크게까지 나가지 않고 쓰는 이에게 배움이 되고 듣는 이에게 인문학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것이 아닐까 싶다. 자기 앞의 생에 똑같은 경로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비슷할지언정 똑같은 삶은 없을테니 나에게 위로를 준 이 책이 누군가에게도 즐겁게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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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의 심장
김하서 지음 / 자음과모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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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서, <줄리의 심장>, 자음과 모음, 274page, 초판1쇄 발행일: 2017년 8월 25일, 정가: 13,000원

 

  인간은 저마다의 행복과 불행에 잠식당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마다 행복의 맛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시 풀어 말하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어느 '존재'로 인해 행복을 느꼈다면, 그것이 부재했을 때의 공포 혹은 상실감을 느낄 자신의 모습을 먼저 상상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가진 것을 잃기 싫어하며 두려워하는가. 평화롭고 안온한 일상에 금이 가는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전율한다. 나의 행복을 앗아가지 마세요. 나를 내버려두세요. 그냥 이렇게 살도록 말이에요.

 

  작가 김하서의 <줄리의 심장>은 사람의 자그마한 불안을 계속해서 건드려 그 불안에 결국에는 잠식당하고야 마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각 단편은 짧은 스토리 안에 저마다 다른 성별과 연령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혼란의 감정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어떤 스토리 하나 아! 끝이 났구나, 하고 명확하게 맺음하는 스토리가 없다. 열린 결말 같지만 그 끝맛은 달달하지도 않고, 쓰거나 짜지조차 않은, 텁텁하고 더는 맛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 어떤 것이다. 체념하게 하는 맛이라고 해야할까. 더 가보았자 뭔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미래라도 결국엔 가고 말아야 하는 걸까. 끝을 아는데도.

 

 

앨리스의 도시 (12p)
순간 여자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깨달았고 심장은 얼어붙은 듯 잠시 박동을 멈추었다. 여자의 눈동자가 이상했다. 보통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무언가 중요한 하나가 사라진 섬뜩한 눈동자였다. 분명히 여자의 눈은 그를 향해 있었지만 여자는 동시에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열려 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혹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한 여자의 동공은 탁하고 소름끼쳤다. /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등 뒤로 엄습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당황스러웠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주문을 걸듯 태연하게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배어 나왔다.

 

 

버드 (39p)
딸아이는 RS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의 약자인지 어떤 종류의 바이러스 균인지 아무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이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중년의 여의사는 의사들 특유의 차갑고 거만한 얼굴로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좀 두고 보자. 이제 균이 아래로 퍼지면서 폐가 나빠질 것이다. 앞으로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신생아 패혈증과 감염 파트의 전문의인 그녀는 마스크를 쓴 채 대충 그런 말들을 늘어놓고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두고 보자. 제길, 의사라는 작자들은 언제나 똑같이 할 말이 그것뿐이지. 언제까지 두고 보자는 건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는 알 수 없는 적대감에 휩싸여 자기도 모르게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그는 무기력하게 몸을 떠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그리는 각 단편 속 감정들은 너무나도 생생하다.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 당황스러움, 초조함, 안타까움, 그리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의 무력감과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 크게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아는데도 미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음에 나오는 상대에 대한 미움까지 세세한 감정들을 책 속에 그려넣었다. 그리고 장면 장면 하나가 눈 앞에 그려진 듯 생생해서 읽다보면 손에 축축이 땀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 아, 저 상황을 끊고 단호하게 갔으면 좋겠다. 아, 저 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미워하는구나. 안타깝다. 그에게로 가서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 위로는 되지 않겠지만.. 하는 감정의 편린들이 얽히고 설킨다. 그 다음 단편, 다음 단편으로 갈 수록 불안은 더 쉽고 빠르게 엄습하고 감정은 요동친다.

 

 

유령 버니 (101p)
그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와 혼자라는 외로움에 몸을 떨며 그 새벽 전화를 걸 누군가를 떠올렸지만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유령도 곁에 없는 드넓은 우주에 영원히 혼자 버려졌다는 것을. 그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아내의 휴대폰 번호를 찾아 눌렀다. 귓속을 파고든 것은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 건너편의 콘크리트 건물에서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뿐이었고 그도 어둠 속에 갇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 완벽히 고립되었다. 그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어둠 자체가 되는 것, 그것은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일이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줄리의 심장 (106-109p, 부분 인용)
라연이 침입자처럼 고요한 풍경을 찢고 훌쩍이며 걸어나왔다. 나는 딸아이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라 멍하니 있었다. 다음 순간 짜증이 났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울음소리에 라희마저 깨어나 평화로운 아침이 유리창처럼 깨져 버릴까봐 신경이 곤두섰다. ... 그날 아침 햇살은 여전히 찬란했지만 평온한 일상은 박살이 났다. 서재의 문이 활짝 열린 채 첫째 라연이 어깨를 떨며 비명을 지르듯 울다가 딸꾹질을 했다. ... 라연은 연극이라도 하듯 인형처럼 힘없이 주저앉더니 눈동자가 완전히 돌아간 채 하얀 거품을 게워냈다. 연극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멍청한 관객처럼 물끄러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경기를 일으키는 다섯 살짜리에게서 그 이상의 무얼 기대한 걸까. ...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라연을 버려 둔 채 라희를 안은 것도 잊고 나쁜 유혹에 이끌리듯 털 뭉치에게 다가갔다. 하얀 털과 대비되는 붉은 가슴이 적나라하게 활짝 열려 있었다. 참았던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내 눈은 화려하고 잔혹한 풍경을 뇌리에 각인 시켰다.

 

 

  뼛속을 파고드는 외로움을 어떻게 저렇게 생생히 표현했을까. 간절히 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혼한 전처의 핸드폰을 누르고, 그 이후 들려온 안내 음성에서 더 지독하게 외로워지는 남자의 뒷 모습과 그를 삼킨 어둠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살아난다. 찐득한 슬픔과 소름끼치는 적막이 생경하다. 단편 <줄리의 심장> 역시 한 순간 사진처럼 찍혀 눈으로 박혀 드는 그 장면 장면들을 캐치해내는데, 자신의 몸을 제어하지 못하고 어딘가로 떨어질 때, 가령 깊은 물 속에 빠져 잠겨들 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주마등처럼 기억 하나하나가 눈을 통해 머릿속으로 박히는 장면은 가히 인상적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연달아 반복될 때 인간이 느끼는 당혹감에 대한 차분한 표현 표현들이 가만히 읽혀 들어올 때 읽고 있는 나 역시 당황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디스코의 나날 (249p)
제발, 나를 내려줘! 율은 악을 쓰듯 소리친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이를 꽉 깨문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잡고 있는 두 손을 놓아버리면 그만이다.

 

 

  단편 <파인애플 도둑> 마지막에서 반짝, 빛나듯 했던 주인공의 감정 외엔 책의 끝머리까지 아무도 행복하지 못한 채 어둠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던 이 책, <줄리의 심장>을 통해 주인공 각자의 복잡다단한 심사 속에서 유영하는 '불안'의 여러 얼굴들을 직면할 수 있었다. 각 개인이 느끼는 행복의 실마리는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느껴왔지만 불안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왔었는데...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혹은 치졸해서 입으로 꺼내기조차 그러한 아주 작은 불안의 감정들까지 꺼내 펼쳐보여서 그런지 장면 장면에 이입하면서도 왠지 모를 공감이 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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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굉장히 당연한 일이지만 그 상처를 감내하고 성장할 때 얼마나 많은 것이 보이는지를 이 책을 통해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그 객관성은 내게는 무척 부족한 것이었다는 걸, 그리고 생각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존하는 인간이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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