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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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서른의 반격>, 은행나무 출판사, 1판 1쇄 발행: 2017.10.25(발행 전 가제본 형태로 책이 배송), 235페이지

주인공은 흔하디 흔한 1988년생, 여성, 모기업(책에서는 DM그룹이라고 명명) 인턴, 김지혜. 큰 카테고리로 묶으면 주인공은 나 같기도 하고, 내 친구 같기도 하고, 나와 친한 언니 혹은 선배 같기도 하다. 그만큼 작가가 '흔한 인물'로 주인공을 설정한 이유는 이 소설의 전반적인 스토리와도 관련이 있으면서도 그 누구에게 대입해도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이를 원했음과 동시에, 손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들을 이야기 안에 차용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80년대 정권과 그에 들고 일어났던 청년들의 이야기, 88올림픽과 굴렁쇠 소년,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모아보았을 핑클빵과 국찌니빵, 포켓몬스터빵 속 스티커와 같은 소재는 단순히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 시대의 상징인 동시에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79~80페이지
…규옥이 새삼 묻는다.
"근데 계속 지혜씨라고 불러도 되죠? 기분 나쁘면 이제라도 선배라고 부를까요?"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같은 인턴인데요, 뭐. 동갑이기도 하고."
"그러네요. 동갑."
(…)
"…초등학교 3학년 때 IMF 터진 건 기억나요. 유학 갔던 삼촌 돌아오고 금모으기 운동 한다고 울 엄마 금반지도 팔았대요. 집에 있던 금을 판다고 나라가 구해지나……."
"그러다 중학교 올라갈 무렵 되니 세기말이었잖아요.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그런 노래가 유행할 때 나는 예비중학생 선행학습으로 근의 공식 외우면서 진짜 지구가 망하길 바랐죠."
"핑클빵 먹으면서 포켓몬 딱지 모으던 그 시절이로군요."
"맞아 맞아. 근데 지구는 참 망한다는 소문만 무성하네요. 우리 어렸을 땐 휴거라고 하늘로 다 같이 올라간다고 난리 났었나봐요. 2012년에 한 번 더 멸망한다고 요란 떨더니, 역시 멸망 따윈 안 하더군요. 끈질긴 지구 같으니라고."
우리는 큭큭거리며 김연아 선수의 첫 등장, 슈주의 팬이었던 이력, 매일같이 싸이월드 프로필을 바꾸며 남긴 이불킥 중2병의 흔적 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반올림>의 유아인과 옥림이와 서태지의 부인이 된 정민이, 그리고 88년생 중 가장 성공한 권지용에 대해서도.
"파란만장하네요. 우리 너무 오래 산 것 같아요."


그리고 젊은이들(대체로 20~30대로 상정되는, 좀 더 빠르게는 10대 후반 정도), 특히 직장 생활을 해 본 이들이 겪었을 법한 속내를 살짝 꼬집어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 내용이 '웃프기' 그지 없다. '회사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적절한 성실함과 약간의 능청스러움, 약삭빠르지만 너무 밉지는 않아야 하는 싹싹함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어야 해.' 책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이 책에서 꼬집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고.
더불어 경력이 단절되었던, 이제는 자녀를 낳아 '잘' 키워내야만 하는 능력 있는 여성이 이전과는 달리 회사에 얼마나 약한 존재(소위 '을'로 불리우는)가 되는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회사 안에서 일정 수준의 경험과 시간을 보낸 이가 새 직원을 뽑을 때 느끼는 약간의 으쓱함과 오만함, 그리고 그에 함께 버무려진 씁쓸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지혜씨 본인이 <그 자리가 본인의 실제 자격으로 앉아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것은 단지 '없어보일 것'을 걱정한 팀장의 지시로 머릿수를 채워 앉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텁텁한 맛은 배가 된다.

16페이지
"근데 정말 이런 것까지 직접 갖다 줘야 돼요?"
나가기 직전 최대한 사심 없이, 심지어 황당한 것처럼 질문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핀잔이 이어진다.
"사회생활 안 해본 티가 이런 데서 난다니까.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고, 그냥 이 기회에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
간단한 전략은 성공. 이런 사소한 일에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게 귀찮긴 하지만 이로써 적어도 농땡이를 부린다는 둥, 의자 정리를 해야하는데 나가서 좋겠다는 둥의 잔소리는 안 하겠지.

…유 팀장이 그런 화려한 커리어를 가지고 왜 이곳에 온 건지 용기 내 물은 적이 있다. 한숨과 함께 유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더 살아봐. 결혼해서 애도 둘쯤 낳아보고."

31~32페이지
"앉아 있기만 하면 돼. 진행은 내가 할 테니까. 적당히 도도한 표정이나 짓고 있어."
유 팀장은 팔짱을 낀 채 의자 뒤로 한껏 몸을 기댔다. 간간히 하품을 했지만 손으로 입을 가리지도 않았고 그때마다 내 자리까지 그녀가 뿜어낸 군내가 풍겨왔다. 나는 살짝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봤다. 그러곤 한쪽 다리를 무릎 위로 올려 꼬았다.


그래, 다들 이런 기분이구나.

그 자리는 팔짱을 낄 수 있는 자리였다.다리를 꼴 수도 있고 갑자기 울린 핸드폰에도 여유 있게, 잠시만요, 라며 전화를 받아도 되는 자리.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권력자라고 생각할 거다. 설사 그게 별 볼 일 없는 작은 아카데미의 인턴자리 면접일지라도,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건 결정권을 가졌다는 걸 의미한다. 일정 수준의 경험과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앉을 수 있는 자리. 그런데 나는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소품처럼 앉아 있다. 내가 아니라 낡은 곰 인형이었어도 상관없었을 거다.

우리는 끊임 없이 나이와 수준 등에 따라 나뉜 등급에 따라 교육 받았고, 또 잘 짜여진 커리큘럼에 맞춰 성실하게 제 앞에 닥친 일들을 해왔다. 학생 시절엔 공부를, 조금 더 지나면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혹은 어학 연수를, 시간이 더 지나면 직장인이 되어 스스로의 업무를 처리해 왔다. 모든 흐름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했다. 이상한 것은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기에 오히려 그 흐름에서 벗어날수록 이상한 불안감이 엄습한다는 사실과, 아이러니하게도 그 흐름이 나에게 적합한지 혹은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현실이다. '왜 내가 이 분야를 전공하겠다고 했지?' '왜 내가 이 일에 지원하게 되었지?' '난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그런 물음은 아주 뒤늦게 찾아온다. 바쁘게 걸어가다 정신차려보니 이미 턱끝까지 물에 잠겨있는 사람처럼.

43페이지
나는 그(규옥)의 미련함이 반갑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은 적당히 일을 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분수에 맞게. 주어진 시간과 급여에 맞게. 그러므로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인 우리에게 일이라는 건 꼼수, 눈치, 요령의 삼 요소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최소한의 노동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헤프게 이용당하지 않고, 당연한 듯 착취당하지 않고, 적당히 치고 빠질 수 있다. 계속 못하다가 갑자기 잘하면 칭찬을 받지만 계속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본전도 못 뽑고 신랄히 욕만 먹는다. 아슬아슬 선을 지키는 수준에서 일하고, 할 수 있는 일도 가끔은 못 하는 척 피해가고, 귀찮더라도 가끔 핀잔을 듣는 상황을 만들어 상사를 우쭐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지키며 일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지혜씨. 이런 생각은 비단 책 속에만 갇혀 있지 않다. 현장에서, 일선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 모두의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마음이다. '일'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나. 그래서 일하고 싶은 분야와 전공한 분야를 고집스럽게 통일시키려고 했던 나지만, 그런 나조차도 이 생각에 조금이나마 공감했던 적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여담이지만 내가 처음 일했던 회사는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월급과 함께, 야근에 이은 새벽까지의 술자리 참여를 유도했던 회사였다. 새벽 한두시쯤 되어서야 택시를 타고 겨우 집에 들어가 토막잠을 자고 다음 아침에 무거운 몸으로 출근하던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만두기 직전에 이르러 두 달 정도는 월급이 미뤄질 정도로 직원들과의 약속에 태만했다. 열심히 일하고자 했던 초심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헤프게 이용당한다는 슬픔에 일에 대한 열정도 점점 사그라드는 날들이었다. 지금 그 당시의 나를 평가한다면, '적당히를 모르고 어설프게 열심이었던 사회 초년생' 정도 되는 것 같다. 이처럼 다시 떠올리면 씁쓸함만 남는 과거의 경험들은 '꼼수, 눈치, 요령의 삼요소가 곁들여진 최소한의 노동'을 낳는 밑거름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일부로 전체를 판단하려 해서도, 보편화해서도 안 되는 것이겠지만) 왜 사회는 건강한 일꾼들을 배출하려 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지금 제 모습의 밑거름이 된 젊은 날의 자신을 떠올리지 못하는가. 왜 젊은이들은 '적당히'에 쉽게 타협하는가. 왜 어른들의 세대와 지금 우리 세대는 공감이나 이해 없이 평행선만 달리고 있는가.

128페이지
"누나가 돈 맛을 못 봐서 그래. 철 좀 들어라."
이번엔 지환이 베개를 던졌고 나는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아버지를 닮아 녀석은 워커홀릭 기를 보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특별히 일이 좋아 일만 한 건 아니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택시 운전석에서 보낸 아빠는 남편은 밖에 나가 일을 하고 가정은 아내에게 맡겼던 시대의 평범한 가장이었을 뿐이다. 빠듯한 형편에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은 따박따박 월급을 가져다주는 거라고 생각한 아빠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떤 건지 모르는 상태로 젊음을 흘려 보냈다.
그래도 아빠는 운이 좋은 편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빠는 입이 닳도록 말한 작은 딸기농장을 정말로 사들여 엄마에게 짜잔, 하고 선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택시를 몰아 번 돈으로 딸기농장을 샀다는 사실이 동화 속 꿈 얘기처럼 느껴진다.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얘기니까.
언젠가 그런 얘기를 아빠한테 했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겪어보지 않고 쉽게 말하지 말라는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아빠 세대와 우리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은 그런 건지도 모른다. 각자의 새대가 더 힘들다고 주장하고 그에 비해 상대의 세대를 쉽게 얘기하며 평행선을 달린다.

141~142페이지
"아무튼 고마웠어. 지혜씨가 순수하고 성실하게 일한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거야. 그래서 내가 추천했어. 새로 뽑는 것보단 있는 사람을 쓰라고. 지혜씨는 아직 열정이 있잖아."
열정, 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콱 막혔다.
"나가면서 착한 일 하나쯤 하고 싶더라. 내가 만든 업보를 청산하고 싶은 걸 수도 있고. 그래서 나가는 마당이지만 직접 얘기해주고 싶어서 불렀어. 축하해, 지혜씨. 이제 정직원 될 거야."
얼떨떨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뻐하기엔 너무 찜찜했기 때문이다. 김 부장은 내 눈빛을 읽은 것 같았다.
"그런 표정으로 볼 거 없어. 나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거든. 난 말야, 지혜씨 태어날 때쯤 거리에 나갔던 사람 중 하나였어. 세상은 잘못 돌아가고 있으니까 바꾸라고, 직접 대통령 뽑을 수 있게 투표권 내놓으라고. 탁 하고 쳤더니 억 하고 죽더라는 같잖은 말 하지 말라고……. 그렇게 외치려고 거리에 나가 맨바닥에 드러눕고 목이 터져라 노래했어. 나같은 것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어, 그땐. 세상이 바뀌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서른의 반격>이란 제목을 보며 '서른'이란 나이가 이십대를 종결하고 새로이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고 생각했다. 덧붙여 '반격'이라는 말은 지금의 상태로부터 뭔가 다른 상태의 나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 혹은 나를 골탕먹이고 루즈하게 만들어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는 일상에 변화를 꾀해 보겠다는 다짐으로 보이기도 한다고 적었다. 책을 읽기 전 제목을 분석하고, 읽고 난 후 그 생각을 비교해보는 작업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은 꽤 책의 내용을 관통하는 부분이 있어 그 재미가 쏠쏠했다. 주인공과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만난 인물들이 함께 모여 세상에 반기, 까지는 아니지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줄거리와도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지금의 나는 서른의 나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것일까... 하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앞으로도 이런 생각에 덧붙여 다른 생각들이 차곡 차곡 쌓여갈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어느 부분에서 일치하고 또 불일치하면서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갈 것이다. 주인공 지혜씨가 과거의 자신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고 미래의 자신을 향해 걸어나가듯 나 역시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나갈 것이다.

추가 생각)
 '정진씨'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주인공의 생각이 재미있고 참신했다. 정말+진짜의 첫 자를 딴 정진씨라는 가공의 인물은 혼자 있고 싶을 때 만날 사람이 있다는 핑계가 되어주는, 주인공의 숨을 트이게 하는 장치가 된다. 그렇게까지 핑계를 대야 하나 서글픈 마음이 들게 하면서도 한편으로 지혜씨의 마음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음에도 깊이 이해되는 것 같은 부분이었다.

221~222페이지
…유 팀장이 내게 작은 선물을 주었다. 푸른색 바탕에 볼이 발간 여자아이가 웃고 있었다. 행운을 비는 마트료시카였다. 결혼하기 전 갔던 러시아 여행에서 산 기념품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저한테 이런 걸 주세요?"
"나름의 애정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행운을 빌어. 살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누구나 마음속 깊은 데엔 겹도 모양도 다른 사람이 끝없이 들어 있다는 걸."
유 팀장이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유 팀장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팀장님한테 보여드릴 게 있어요. 고백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나는 구석에 놓인 텅 빈 벤치를 가리켰다.
"소개할게요. 정진씨에요. … 착한 사람 눈에만 보여요."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한 표정이던 유 팀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보인다고 뻥이라도 칠 것 같아?!"
우리는 웃었고 나는 정진씨의 탄생에 대해서 솔직히 들려주었다. 유팀장은 머쓱해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함께할 이유가 없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조금쯤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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