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의 심장
김하서 지음 / 자음과모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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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서, <줄리의 심장>, 자음과 모음, 274page, 초판1쇄 발행일: 2017년 8월 25일, 정가: 13,000원

 

  인간은 저마다의 행복과 불행에 잠식당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마다 행복의 맛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시 풀어 말하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어느 '존재'로 인해 행복을 느꼈다면, 그것이 부재했을 때의 공포 혹은 상실감을 느낄 자신의 모습을 먼저 상상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가진 것을 잃기 싫어하며 두려워하는가. 평화롭고 안온한 일상에 금이 가는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전율한다. 나의 행복을 앗아가지 마세요. 나를 내버려두세요. 그냥 이렇게 살도록 말이에요.

 

  작가 김하서의 <줄리의 심장>은 사람의 자그마한 불안을 계속해서 건드려 그 불안에 결국에는 잠식당하고야 마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각 단편은 짧은 스토리 안에 저마다 다른 성별과 연령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혼란의 감정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어떤 스토리 하나 아! 끝이 났구나, 하고 명확하게 맺음하는 스토리가 없다. 열린 결말 같지만 그 끝맛은 달달하지도 않고, 쓰거나 짜지조차 않은, 텁텁하고 더는 맛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 어떤 것이다. 체념하게 하는 맛이라고 해야할까. 더 가보았자 뭔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미래라도 결국엔 가고 말아야 하는 걸까. 끝을 아는데도.

 

 

앨리스의 도시 (12p)
순간 여자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깨달았고 심장은 얼어붙은 듯 잠시 박동을 멈추었다. 여자의 눈동자가 이상했다. 보통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무언가 중요한 하나가 사라진 섬뜩한 눈동자였다. 분명히 여자의 눈은 그를 향해 있었지만 여자는 동시에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열려 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혹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한 여자의 동공은 탁하고 소름끼쳤다. /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등 뒤로 엄습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당황스러웠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주문을 걸듯 태연하게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배어 나왔다.

 

 

버드 (39p)
딸아이는 RS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의 약자인지 어떤 종류의 바이러스 균인지 아무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이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중년의 여의사는 의사들 특유의 차갑고 거만한 얼굴로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좀 두고 보자. 이제 균이 아래로 퍼지면서 폐가 나빠질 것이다. 앞으로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신생아 패혈증과 감염 파트의 전문의인 그녀는 마스크를 쓴 채 대충 그런 말들을 늘어놓고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두고 보자. 제길, 의사라는 작자들은 언제나 똑같이 할 말이 그것뿐이지. 언제까지 두고 보자는 건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는 알 수 없는 적대감에 휩싸여 자기도 모르게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그는 무기력하게 몸을 떠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그리는 각 단편 속 감정들은 너무나도 생생하다.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 당황스러움, 초조함, 안타까움, 그리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의 무력감과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 크게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아는데도 미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음에 나오는 상대에 대한 미움까지 세세한 감정들을 책 속에 그려넣었다. 그리고 장면 장면 하나가 눈 앞에 그려진 듯 생생해서 읽다보면 손에 축축이 땀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 아, 저 상황을 끊고 단호하게 갔으면 좋겠다. 아, 저 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미워하는구나. 안타깝다. 그에게로 가서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 위로는 되지 않겠지만.. 하는 감정의 편린들이 얽히고 설킨다. 그 다음 단편, 다음 단편으로 갈 수록 불안은 더 쉽고 빠르게 엄습하고 감정은 요동친다.

 

 

유령 버니 (101p)
그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와 혼자라는 외로움에 몸을 떨며 그 새벽 전화를 걸 누군가를 떠올렸지만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유령도 곁에 없는 드넓은 우주에 영원히 혼자 버려졌다는 것을. 그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아내의 휴대폰 번호를 찾아 눌렀다. 귓속을 파고든 것은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 건너편의 콘크리트 건물에서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뿐이었고 그도 어둠 속에 갇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 완벽히 고립되었다. 그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어둠 자체가 되는 것, 그것은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일이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줄리의 심장 (106-109p, 부분 인용)
라연이 침입자처럼 고요한 풍경을 찢고 훌쩍이며 걸어나왔다. 나는 딸아이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라 멍하니 있었다. 다음 순간 짜증이 났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울음소리에 라희마저 깨어나 평화로운 아침이 유리창처럼 깨져 버릴까봐 신경이 곤두섰다. ... 그날 아침 햇살은 여전히 찬란했지만 평온한 일상은 박살이 났다. 서재의 문이 활짝 열린 채 첫째 라연이 어깨를 떨며 비명을 지르듯 울다가 딸꾹질을 했다. ... 라연은 연극이라도 하듯 인형처럼 힘없이 주저앉더니 눈동자가 완전히 돌아간 채 하얀 거품을 게워냈다. 연극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멍청한 관객처럼 물끄러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경기를 일으키는 다섯 살짜리에게서 그 이상의 무얼 기대한 걸까. ...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라연을 버려 둔 채 라희를 안은 것도 잊고 나쁜 유혹에 이끌리듯 털 뭉치에게 다가갔다. 하얀 털과 대비되는 붉은 가슴이 적나라하게 활짝 열려 있었다. 참았던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내 눈은 화려하고 잔혹한 풍경을 뇌리에 각인 시켰다.

 

 

  뼛속을 파고드는 외로움을 어떻게 저렇게 생생히 표현했을까. 간절히 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혼한 전처의 핸드폰을 누르고, 그 이후 들려온 안내 음성에서 더 지독하게 외로워지는 남자의 뒷 모습과 그를 삼킨 어둠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살아난다. 찐득한 슬픔과 소름끼치는 적막이 생경하다. 단편 <줄리의 심장> 역시 한 순간 사진처럼 찍혀 눈으로 박혀 드는 그 장면 장면들을 캐치해내는데, 자신의 몸을 제어하지 못하고 어딘가로 떨어질 때, 가령 깊은 물 속에 빠져 잠겨들 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주마등처럼 기억 하나하나가 눈을 통해 머릿속으로 박히는 장면은 가히 인상적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연달아 반복될 때 인간이 느끼는 당혹감에 대한 차분한 표현 표현들이 가만히 읽혀 들어올 때 읽고 있는 나 역시 당황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디스코의 나날 (249p)
제발, 나를 내려줘! 율은 악을 쓰듯 소리친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이를 꽉 깨문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잡고 있는 두 손을 놓아버리면 그만이다.

 

 

  단편 <파인애플 도둑> 마지막에서 반짝, 빛나듯 했던 주인공의 감정 외엔 책의 끝머리까지 아무도 행복하지 못한 채 어둠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던 이 책, <줄리의 심장>을 통해 주인공 각자의 복잡다단한 심사 속에서 유영하는 '불안'의 여러 얼굴들을 직면할 수 있었다. 각 개인이 느끼는 행복의 실마리는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느껴왔지만 불안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왔었는데...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혹은 치졸해서 입으로 꺼내기조차 그러한 아주 작은 불안의 감정들까지 꺼내 펼쳐보여서 그런지 장면 장면에 이입하면서도 왠지 모를 공감이 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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