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등사
다와다 요코 지음, 남상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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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등사, 다와다 요코 지음, 남상욱 옮김, 자음과 모음, 초판 1쇄 발행: 2018년 3월 9일, 303페이지

 

 

 

*참고: 헌등사는 <헌등사>/<끝도 없이 달리는>/<불사의 섬>/<피안>/<동물들의 바벨>, 총 다섯 가지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책의 제목이자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헌등사>를 중심으로 하여 서평을 작성할 것입니다.

 

 

 

 

"증조할아버지, 토스트는 피 맛이 나네요."

 

이렇게 말하니 증조할아버지가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을 지어서 그런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눈썹이 짙고 턱이 나와 있어 강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상처받기 쉽고 금방 눈물을 글썽인다. 왠지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 134p

 

 

 

 

무메이. 無名. '이름이 없다'는 뜻으로 증조할아버지가 지어준 증손자의 이름. 아버지는 어딘가에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며칠 후 숨을 거둔 상황이어서 부모를 대신하여 증조할아버지가 지은 이름이었다. 아이 이름의 뜻이 '이름이 없다' 라니. 어쩐지 무미건조하고 아이에 대한 사랑이 단 한 톨의 쌀만큼도 없어서 이렇게 지은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은 증조할아버지 '요시로'에게 증손자 '무메이'는 사랑스럽고 대견하고 안타깝고 귀여운 대상이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아이에게 쏟는 이유는 부모의 부재 때문도 있지만,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연약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나고 자연재해가 휩쓸고 간 시기. 방사능이 여기저기에 닿고 퍼진지도 오래된 일이다. 도시는 황폐해졌고 더 이상 외국과의 교류도 없다. 오히려 그들의 언어를 쓰다가는 잡혀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새로 태어난 세대(요시로의 자녀 세대이자 무메이의 부모 세대)부터는 on/off 의 구분도 잘 모른다. 요시로의 딸과 사위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맡긴 채 오키나와로 가 과수원에서 일한다. 오키나와로 갈 때 아이를 데려가지 못한 이유도 인구 이동량을 조절하려는 정부의 조처 때문이었다. 딸이 가끔씩 보내오는 편지는 검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불에 한참 달구면 글이 올라오는 투명한 레몬즙으로 쓰여 있다. 별 이야기는 없다. 아버지 보고 싶어요, 아들은 잘 있나요? 와 같은 내용이 아닌, 여기에서 과일 재배를 하는데... 와 같은 일상 이야기뿐이다.

 

 

 

 

폐허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번화한 간판들, 자동차 따위는 한 대도 달리고 있지 않은데 규칙적으로 빨갛게 되거나 파랗게 되곤 하는 신호기, 사원이 없는 회사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거나 닫히거나 하는 것은 바람으로 가로수의 커다란 가지들이 휘어졌기 때문일까.

연회장에서는 식어버린 담배 냄새가 수은색으로 적막하게 얼어붙었고, 테이블이 꽉 차 있었던 잡거빌딩의 어느 층도 부재라는 이름의 손님이 술을 무한 리필로 마시며 떠들어댔으며, 빌릴 사람이 없는 대부금 이자가 녹슬고, 아무도 사지 않는, 할인 판매 중인 속옷 더미가 눅눅해졌으며, 빗물이 고인 쇼윈도에 장식된 핸드백에는 곰팡이가 피고, 하이힐 속에 쥐 한 마리가 유유자적하게 낮잠을 자고 있다.

도로 아스팔트는 금이 갔고, 그 금에서 똑바로 하늘을 향해 뻗고 있는 냉이는 높이가 2미터나 된다. 옛날에는 인도 옆에 빗자루처럼 가늘고 조심스럽게 서 있었던 벚나무도 도심에서 인간들이 모습을 감춘 후에는 둘레가 두꺼워졌고, 가지는 사방으로 기세 넘치게 손을 뻗쳤으며, 울창하게 우거진 녹색의 아프리칸 스타일의 헤어가 상공에서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 39p

 

 

 

목요일은 나무의 날이니까 교정의 벚나무가 쓰러져 깔릴지도 몰라. 최근 나무들은 겉으로 보면 건강한 듯 보여도 실은 병에 걸려 있고 줄기 속이 뻥 뚫려 있는 경우도 있어서, 누군가가 가까이서 한숨을 쉬는 것만으로 쓰러진 적도 있었어. 그러니까 '나무 가까이에서는 한숨을 쉬지 말 것'이라는 푯말까지 있지.

아, 벚나무들이 멀리부터 순서대로 차례차례 쓰러져. 나는 달려서 도망쳐. 다리가 빠르니까 가지 하나 닿지 않지. 기분 좋네. / 133~134p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상이 이들에게는 사치다. 따뜻한 햇살, 시원하게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푸르게 깔린 초원을 침대 삼아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낮잠 자는 모습을 어린 아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무메이 역시 증조할아버지는 무척 건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증조할아버지도 100세를 넘긴 고령(高齡)이다. 그럼에도 아이인 무메이보다 더 건강하다.

<헌등사> 속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먹는 것도, 옷 입는 것도, 걷는 것도...... 모두가 힘겨운 일이다. 어린 무메이는 여름에는 더위를 먹을까 염려하고 햇빛 아래에 있으면 건조해서 살갗이 갈라진다. 이렇게 덥다가도 그늘 아래에 있다 땀이 식으면 오한으로 뼈가 시리고, 겨울에는 혹여 감기에 걸릴까 애를 먹는다. 요시로는 손자를 잘 챙기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 시대의 노인들은 100세를 넘어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방사능의 영향이다. 지금의 우리에겐 60대가 정년이자 은퇴 시기이지만, 이 이야기 속의 60대는 그야말로 '한창'이다.

 

 

 

 

요시로는 그림엽서를 사러 가는 김에 계산대 옆 기둥에 기대어 이 사람과 딸의 풍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낙이었다.
"아마나는 잘 지내고 있나요?"
"병에 걸리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
.
"고등학교 시절에 미코시부에서 몸을 단련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육상부였잖아요?"
"단거리 주자 따위는 오늘날 실생활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아요. 동물이 없는 들판에 사냥을 나서는 것도 허무하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연필을 창처럼 들고, 무릎이 가슴에 닿을 정도로 높게 한 팔을 올리는 오시바나 아티스트는 아직 70대의 젊은 노인으로, 젓가락이 굴러가는 것만으로도 웃어대는 한창 때의 연령이었다. / 79p

 

 

 

 

점점 나이들어가지만 죽지 않는 신체를 물려 받은, 돌아오지 않는 딸과 손자를 대신해 증손자를 키워내는 요시로. 휘청거리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무메이. 그들의 모습을 그려낸 다와다 요코의 세계관이 두렵기까지 하지만, 이것이 그저 상상 속의 모습일 것이라며 낙관할 수도 없다.

독일과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는 저자 '다와다 요코'의 소설 <헌등사>.

이 소설은 현재라는 시간이 붕괴될 것 같은 불안감에도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요시로의 모습을 보며 독자들이 본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불안감을 계속해서 지각하도록 만든다. 일본 작가가 쓴 일본 상황에 대한 고찰 같기도 한 이 책은 압도적 재난 앞에서 인력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이와 더불어 무기력함이 둘러 싸고 있는 이 '평범한' 삶들에 대해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읽으면 읽을 수록 전달되는 묘한 현실감에 소름이 돋아오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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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비의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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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비의,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 옮김, 위즈덤하우스, 초판1쇄 발행: 2018.03.20, 183p

 

'생각해보면 당연하지만 우리는 단 한순간도 똑같은 존재일 수가 없다. 지금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르다. 나는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 와카마쓰 에이스케가 이 글의 끝머리에 남긴 말이다. 실은 초·중·고교를 거쳐 대학에서 공부하고, 취업을 해 일하고, 2주 간의 시간 동안 재충전(?)하고, 또 다시 일하기까지의 내 과정들을 보면 나는 한 사람으로 수렴되었다가 또 다시 여러 면의 나로 분할되어 왔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지금의 나로 완성되어왔고, 또 오늘까지의 나를 수렴한 다른 모습으로 점점 바뀌어갈 것이다. 미래의 내가 계속해서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안다.

작가 와카마쓰 에이스케는 글을 쓰기까지 한 사람으로의 몫을 잘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치밀어오르는 두려움, 그리고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슬픔을 차례로 겪어 왔다. 물론 이 말고도 그가 겪어온 다양한 일들과 감정, 읽었던 책과 다녀보았던 여행지들이 그를 더 풍성하고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내가 아주 특별한 일을 겪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일상적이고 편안한 감정들을 풀어놓고 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이나 읽었던 책들의 인용, 누군가의 말들을 우리에게 하나의 주제 하에서 짧은 산문으로 풀어 들려주고 있다.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필요한 것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 세상은 의미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새로운 인생의 기회가 될지도 모를 만남을 가로막는 것은 알고 보면 우리가 만들어낸 의도와 계획일지도 모른다. / '낮고 농밀한 장소', 24p

 

 

 

그는 한 권의 책 안에서 총 스물 다섯 가지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전부는 아니지만 그 책에 담겨 있는 메시지 중 하나는 '작품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독자는 작가가 쓴 글을 읽고 자신만의 해석을 보탬으로 작품을 완벽하게 만들어 내는 존재이며, 작가와 다른 눈높이를 가지고 자신의 삶에 그 내용을 적용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말을 다시 해석하면... 책을 쓰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은 모두 의미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A라는 내용을 썼지만 그 내용이 여러 독자를 거치면서 A, G, H, Z 등 다양한 모양으로 바뀌는 일. 천편일률적인 삶은 없고 백이면 백 저마다의 향기를 뿜어내면서 살아나가는 사람들. 그들의 면면을 대할 때-가령 책을 읽을 때, 이야기를 나눌 때, 구글링 할 때-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말'이 주는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한 마디의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말. 더없이 의좋았던 사이를 갈라놓기도 하지만, 실의에 빠져 있던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는 말. 한편으로 건강했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 없던 병도 만들게 하고, 반대로 나을 수 없을 것 같던 병을 치료하게도 하는(플라세보 효과처럼) 말. 이러한 비슷한 이야기는 책 속 인용구에서도 나온다. 철학자 이케다 아키코의 '말의 비의에 대한' 인용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 절망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의료가 아니라 말이다. 종교도 아니며 그저 말이다. - 이케다 아키코(池田晶子), 『전부 당연한 것이다』

/ 각오에 대한 자각, 69p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이 역시 <슬픔의 비의> 안에 언급된 작품이다.

 

영감님에게는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영감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일은 가벼워지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하지요. 즐거움이 될 수도 있는가 하면 고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감님의 그 힘은 말이나 얼굴 표정처럼 하나하나가 사소한 거라서 숫자로 합계를 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얻은 행복은 재산 한 몫을 떼어준다고 해도 살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죠. -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912~1870), 『크리스마스 캐럴』

/ 신뢰의 눈길, 99~100p

 

 

 

이런 말에 대한 인용들은 우리가 순간순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고 상처 입히기도 하는지 떠올리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더 무섭고 그를 곱씹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용기의 원천이 되기도, 폭력이 되기도 하는 말.

더불어 우리는 손을 베거나 감기에 걸리거나 체하거나 하는 몸의 고통에는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푹 쉬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유난스럽기까지 한 사람도 많다. 그런데 마음의 문제에는 무감한 사람들이 많다. 바쁘게 살아가기 때문일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다시 내일을 위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어서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일이 힘들고 사람에 북받치고 한계에 한계를 쥐어짜내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실은 상처입은 근원부터 돌아보지 않았기에 우리는 매일매일 힘들다. 성찰은 힘든 일이지만, 더 이상 상처를 곪게 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한 번 더 느낀다. 아프기 때문에 상처를 곱씹고 헤집는 일은 괴롭고 또 외롭지만 그 과정을 통해 다시 용기를 내 타인에게 손 내밀기도 하고 나 자신을 독려하며 내일을 살아나갈 수 있다. 절실히 혼자 같은 순간이 있지만 실은 그 고독도 꽤 달콤한 순간이라는 걸 겪고 나면 안다. 작가가 말하는 나와의 조우는 바로 이러한 통찰에서 온다.

 

 

 

"내가 고독을 느끼지 못한다면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나의 생존과 의지에 권위와 축복을 부여하는 것이다. 인간은 고독을 붙잡지 않고서는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 기시다 류세이( 岸田劉生, 1891~1929)

우리의 인생은 고독을 느끼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고독을 느낄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생의 비밀과 조우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우리가 진심으로 타인과 만나는 것도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 중의 하나이다. 고독의 경험은 우리를 고립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과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를 인류라고 하는 영역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 고독을 붙잡는다, 118~119p

 

 

 

육체적인 아픔은 고통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치유가 필요하다고 알려주는 몸의 신호이기도 하다. 마음도 마찬가지여서 '비통함'이란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가끔은 치유를 받아야 하지 않겠냐는 인생의 가르침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의 괴로움을 바라볼 줄만 알고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쉽게 간과한다. 눈물은 심신이 휴식과 위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눈물을 흘렸을 때 비로소 자신이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지금 느끼고 있는 슬픔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눈물은 가르쳐준다. 고바야시 히데오는 '말'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슬픔과 눈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슬픔을 가라앉혀 보려고 육체가 눈물을 필요로 하듯이 / 슬픔에 대해서 정신은 슬픔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말' (『생각하는 힌트』에 수록)

/ 저편 세상에 닿을 수 있는 노래, 41~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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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 -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종활 일기
하시다 스가코 지음, 김정환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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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종활 일기, 하시다 스가코 지음, 김정환 옮김,
21세기북스, 1판 1쇄 발행: 2018.03.06, 261p

 

 

 

 

잘 사는 것만큼 죽음을 예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실은 살아가는 데 급급하고...

잘 사는 것 자체에 너무 많은 집중력을 쏟기 때문에,

혹은 마지막 순간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 두렵기에 잘 생각하게 되지 않는 죽음.

그러나 삶을 잘 정리하는 것 역시 품위 있는 태도라고, 일본의 드라마 작가 ‘하시다 스가코’는 말한다.

하시다 스가코는 현재 아흔둘의 나이로,

<오싱>이라는 일본 내에서 가장 히트한 일본 드라마의 각본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불어 2016년 12월에「분게이 슌주」는 일본의 한 월간지에 '나는 안락사로 죽고 싶다'라는 글을 실어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주목 받기도 했다.


아직 일본 내에서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헌법이 제정되어 있지 않은 데다,

본인이 직접 안락사로 죽음에 이르고 싶다고 당당하게 밝힌 경우였기에 더욱 주목받았을 것이다.


일본 오사카에 직접 방문했을 때를 떠올리면, 일본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예의바른 느낌이었다.

자기 의견을 표현할 때도 무척 나긋해서 일본 개그나 영화에서 보았던 유난스러운 반응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지만!) 

 

그런데 유명인이 갑자기 '안락사로 죽고 싶다'니.

이 적극적 의사 표현에 대해 그들의 국민성(?)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놀랍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하시다 스가코의 어린 시절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언제 죽을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끼니는 어떻게 때워야 할지, 언제 집으로 포탄이 날아와 불타고 부서질지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녀는 죽음과 항상 손을 잡고 다녔다.

그랬기에 그녀가, 아니 그 시대의 일본인 모두가 죽음을 '한없이 가벼운' 것으로 보아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대학에 다닐 시절, 어머니와 잠시 떨어져 있던 중 집이 있던 도시에 포탄이 마구 떨어져

사상자가 엄청나게 발생했을 때, 그녀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슬픔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며 안심했다.

왜일까?

.

.

그 당시에는 어떻게 죽을지 예상할 수 없었고, 여자의 몸으로 자칫 몹쓸 짓을 당할까 늘 두려움에 떨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다행이라고 느꼈던 딸의 비정상적인 모습이

전쟁이 도려낸 인간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느껴졌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며 안심하는 딸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다고 한다.


 하기야 광복 직전 시기의 일본이었으니 더욱 심했을 것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제 자신에게 들이닥칠지 모를 죽음에 대해 매일매일 곱씹으며 살았다고,

하시다 스가코는 회상한다.


 

 

 

 

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내 생명은 내가 마음대로 좌우해도 괜찮은 것일까?

살고 싶으면 살고, 죽고 싶으면 마음대로 생명을 포기하면 되는 걸까?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일까?

어떤 태도가 나의 존엄을 지키는 것일까?


현재 안락사를 합법으로 하고 있는 나라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으로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환자들에게만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왜 이들은 제한을 둘까?

자신의 생명을 언제든 좌우할 수 있다고 여기게끔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런 문제에는 기준이 필요할까?

법으로 꼼꼼히 적시하여 시행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또 뭘까?

생각해 볼 일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생과 사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해왔지만 ‘미 비포 유’라는 영화를 보며

존엄사, 죽음을 결정하는 태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주인공 커플의 마음에 동화되어 슬픔을 느끼기도 했지만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더 신중하게 행복해지려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만약 내가,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제 몸 하나 움직이는 데에도 자기 결정권이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흐르는 눈물 한 번 닦아주지 못해 더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삶을 살아간다면......

존엄사를 선택한다고 해도 마냥 반대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한 명의 삶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도 말고, 책임감도 말고,

그저 오롯이 자신의 행복과 가치를 생각했을 때 내려진 결정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싶었다.

왜 너는 네 생명을 함부로 하느냐고, 차마 입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가 내게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지 생각했다.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을 것도 같았지만

그냥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내버려둘 수 없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

.


"나는 매년 종합 건강검진을 받는다. ... 내일 죽어도 좋다고 말해놓고는 모순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분명 검사를 받거나 약을 먹는 것은 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살고 싶다.

죽기 전까지는 건강하게 살고 싶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존엄성이다." / 135~136p



하지만 하시다 스가코의 태도는 결코 비관주의적이지 않다.

건강하게 살아갈 동안은 최선을 다해 '웰-리빙'하겠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여러 사람을 고용해 식사와 청소를 부탁하고 운동을 게을리 하지도 않고,

끼니와 약을 제 때 챙겨먹으며 건강하게 살기 위한 스케줄을 성실히 이행하는 그녀.


그렇다. 그녀의 말대로 이건 선택의 문제이다.

 내 마음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할 것인지 그걸 선택하는 것이 우선이다.

 

 

.

.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 하시다 스가코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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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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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창비 출판사, 초판 1쇄 발행: 2018년 3월 15일, 326페이지

 

'이 세상에는 악인보다 선인이 훨씬 많다. 몇 안되는 악인으로 인한 상처를 되새기며 살 이유가 뭐가 있겠나. 악인들은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모든 과거지사를 깨끗이 잊어버리자.'
정찬우는 자기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유인이 되어 그들을 용서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했고 후련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상상에 빠져 잠 못 이루는 사이, 9월 30일 밤을 하얗게 새고 말았다.
.
.
(감옥에서 출소하지 못하는 줄 알았던 주인공이 떠올리는 시 한 구절)
타고르의 시 한구절이 초점 잃은 그의 눈에 어른거렸다.

나에게 자유를 다오
머리 풀어 산발하고
알지 못하는 목적지를 향하여
맹진하는 태풍과도 같이

316-317p.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열심히 공부해왔던 수재. 2등을 하고 기쁜 마음에 아버지께 달려갔으나 "왜 1등을 하지 못했느냐!" 라는 호통에 큰 충격을 받고난 이후 모든 시험에서 1등만을 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남자. 교육자라는 꿈을 품으며 열심히 공부했고 그 노력을 인정받아 꿈을 이루는 듯 하였으나, 영문 모를 군사복을 입으라는 지시에 허망하게 따라야만 했던 불행했던 남자. '이북에서는 근로자가 살 만하다지요?' 이북에는 아예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듯, 진실을 알지도 못한 채 이북을 지상천국이라고 동경하는 사람들의 편견에 둘러싸인 채 가족과 떨어져 감방생활을 해야만 했던 남자. 어머니, 그 세 글자를 부르며 엉엉 울었던 남자. 이 남자는 바로 실제 존재했던 한 시대의 인물, '정찬우'다.

그의 이야기는 어떻게 책으로 풀려나오게 되었을까? 역사책 한 귀퉁이를 맡고 있는 인물도 아니거니와, 어떠한 큰 공훈을 세운 바도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그건 바로 근현대사의 가려진 진실을 복원하는 소설을 써온 작가 안재성이 발견한 한 인물의 실명 수기 속 인물인 '정찬우'를 발견하게 된 데서 시작된다. 작가는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장롱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던 한 낡은 원고지 뭉치 속에서 이 인물을 발견했는데, 한국전쟁이라는 뼈아픈 역사와 함께 이 인물을 버무려내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상태의 한반도를 우리네 기억 속에 끄집어낸다.

작가는 어떠한 첨언(添言)도 하지 않는다. 남과 북의 밤낮없는 전쟁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할뿐이나 책을 읽으며 그 호흡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소설이기에 그렇다. 왜 정찬우라는 인물은, 아니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토록 어린 나이에 꿈을 좇지 못하고 전쟁터로 나아가야만 했을까. 왜 전시 중 이리저리 튀어 몸을 찢고 할퀴는 포탄 파편에 휩싸여야만 했을까. 묻어주는 이 없이 왜 한 곳에 쌓여 어두컴컴한 땅 속에 묻히지도 못한 채 썩어가야 했을까.

이 와중 책을 읽을 수록 정찬우라는 이 스물 두 살의 젊은이는 자애로우며 인정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전시 상황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군의관과 그를 보필하는 간호사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들을 군령에 어긋나지 않도록 담당 군관을 설득해 살려내기도 하고, 만주에서 같은 동네에 살았던 사람을 구해주기도 한다. 덕분에 삶의 문턱을 넘을뻔한 상황에서도 생명의 은인이라며 평생 보은하겠다는 그들에 의해 다시 목숨을 빚지기도 한다. 서로 죽고죽이는 전시 상황에서 이러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모습은 크게 빛을 발한다. 인간의 정,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고 통하는 끈끈한 무언가가 흐를 때 총과 검은 날카롭게 벼려진 기운을 잃어버린다.

 

 

 

 

 

           인민군이나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이 써붙인 것이 틀림없었다. 아치를 지나자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평양 거리에서 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아래위 흰옷을 입은 이들이 솥단지며 이불 보따리를 나눠 이거나

           지게에 진 채 힘없는 걸음으로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치마폭으로 눈물을 닦느라고

           자꾸만 뒤처지는 여인도 보이고 부모를 잃었는지 혼자 울며 걷는 아이도 보였다.


          '앞에도 전선, 뒤에도 전선이니 갈 곳도 없는데 어디로들 가는 걸까? 이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25p.

 

 

법무관은 정찬우가 피고석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방금 이 법정에 들어서면서 느낀 감상을 말해보우."
예상 밖의 질문에 정찬우는 잠깐 생각했다가 공손히 말했다.
"약소민족의 비애를 느꼈습니다."

다른 법무관이 뜨악한 표정으로 캐물었다.
"약소민족의 비애라면?"
"우리 민족이 강대하였더라면 일본의 식민지 노예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남북으로 양단되는 서러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국토가 두 동강이로 나누어진 이 약소민족의 처지가 저로 하여금 법정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214-215p.

 

 

감방에 갇혀 있으며 온갖 심한 매질로 살점이 으깨어지고 실신하다 다시 억지로 깨어나 비명을 지르며 매를 맞는 옆방, 옆의 옆방, 그 옆의 옆방...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고 손이 벌벌 떨리던 사람들. 온갖 고문을 겪고 몸은 피와 멍과 주룩주룩 흐르는 진땀으로 가득한데도, "지나칩니다!" 라고 그들에게 항거하던 정찬우. 결국 폭력으로 얼룩진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진술서와 엉터리 고백서를 쓰면서도 모두가 본인이 담보한 '독단적 조치'였으니 모두 용서하고 본인을 추궁하라고 말했던 468번 정찬우. 어떤 판단이 내려질지 모르는 상황에서조차 '약소민족의 비애'를 운운하는 사람. 독방에 갇히면서까지도 동생이 땡볕 아래에서 흘리는 땀 한 방울을 더 안타까이 여겼던 사람.

 

 

햇볕에 따가우면 바람이나 시원하면 좋을 것을 태양은 태양대로 땅김은 땅김대로 숨 막히는 더위만 자아내고 있구나. 귀여운 아우 훈성아, 몸 성히 잘 있느냐? 힘에 겨운 농사일에 지쳐 아래 위로 마구 쏟아지는 땀방울을 씻을 기운마저 없을 너의 처지를 이슬 머금은 눈망울로 분명히 본다. 그러나 훈성아, 폭양, 지열, 피로, 권태, 질식할 이 괴로움을 과감히 박차고 나아가거라. 옛날에는 피서라는 말을 즐겨 썼지만 지금은 단련이란 새로운 용어를 추앙하는 모양이더라...... 세상이 바뀌어 나도 곧 은사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은사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313p.

 

 

책을 덮으며, 나는 이 사람이 어떤 전쟁 영웅도, 역사적 공훈을 세운 인물이 아니라도 그의 이야기가 책으로 쓰여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젊고 유망한 북한의 엘리트에서 감옥에 갇혀 괴롭고 괴롭게 벌을 받다 26년 만에 고향 땅을 밟으며 오열했던 중년의 사내가 되기까지, 그의 일대기가 적힌 이 책이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안재성 작가에게 읽혔던 그 과정이 너무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전쟁과 온갖 사람의 죽음과 배신과 밀고와 다툼과 폭력과 생살을 파고드는 그 아픔 속에서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용서하며 나라를 안타까워 할 줄 알았던 '정찬우'라는 인물의 인간다움을 아름답게 그려낸 작가의 필력에도 감사했다. 잔인하고 참담한 그 장면들을 덤덤하게 그려냈으나 실은 써내려가며 몇 번이고 그 생생한 느낌에 괴로워했을 작가의 고생이 눈에 선하다. 더불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국가의 상황을 다시 떠올리며 또 한 번 몸서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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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테보리 쌍쌍바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5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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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예테보리 쌍쌍바, 작가정신 출판사, 초판1쇄 발행: 2014년 6월 10일, 235페이지

 

 

 

주인공의 이름은 신광택. 이름부터 반짝반짝한 그가 첫 직업으로 삼은 것은 바로 '세차장 선수'. 이렇게 설명하면 책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는 어색할 수 있으므로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보도록 한다. 그는 남들과 똑같은 건 싫다는 이유로 수능장으로 가는 발걸음을 돌린다. 차 한 대를 5분 안에 닦아내는 세차장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그 스스로 '선수'라고 생각하며 좀 더 빠르고 깨끗하게 차를 닦아내는 자신의 모습이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팔을 다친 후 더 이상 세차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세차장에서 나와 두 번째 직업을 찾았으니, 바로 중화요리집.

그는 중화요리집 배달부 일을 하면서 곧 '말죽거리 날벼락'이라 불리며 배달계의 '선수'가 되기로 결심하지만 2인자로 떨어지며 중화요리집에서도 잘리게 된다. 세 번째 직장인 주류도매상과 네 번째 직장인 도서총판에서도 '선수'의 길을 찾으며 열심히 일하지만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나오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정착한 예테보리 상상 식당에서 결국 설거지 '선수'로 거듭난다는 스토리를 담은 책이 바로 박상 작가의 <예테보리 쌍쌍바>이다.

 

 

 

141p
인생이 재미가 없으면 아저씨가 되고 마는 거구나. 멋진 걸 귀찮아하게 되는 거구나. 아름다움을 멸시하게 되는 거구나. 재미를 찾지 못해 힘 빠지고 귀찮아지면 한 방에 훅 가서 추한 곳에 갇히는 거구나.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강한 경계심을 곧추세웠다.

 

 

 

 

광택이라는 인물이 살아가며, 그리고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즐겁게 미친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직업의 귀천이 그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행적을 살펴 보자. 광택은 수능 시험장으로 가는 발길을 돌려 세차장 아르바이트를 선택했다.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를 관람하기 위해 와글와글 모여들었던 군중 사이를 파고들지 못했던 어린 날의 기억과, 수능 시험 당일 똑같은 시험을 보기 위해 와글와글 모여들었던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남들 하는대로 움직이는 인생에 신물이 난 것 같기도 하다. 작가 박상은 이런 모습을 '진입장벽'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 단어 하나로 그 면면이 잘 표현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며 평이하게 반복되는 하루하루는 어쩌면 정말 '진입장벽'이지 않을까. 나 자신을 어느 한계에 가둬버린 채 무심하게 새는 시간, 시간.

 

 

 

173p
한마디로 즐겁게 미치는 거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에 역동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역동성, 사랑에 빠진 자의 심장처럼 쿵쿵 뛰는.

 

 

 

그렇다. 바로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즐겁게 미치는 거'다. 광택이 말하는 '스뽀오츠 정신'이라는 것도 이와 연결되는 지점인데, 그러한 정신에 대해 주인공이 지각하면 그의 머리와 가슴속에서는 '쁭쁭쁭쁭' 하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주인공이 그 일에 미칠 때 나는 소리이기도 하고, 분야를 가리지 않고 누군가의 열정을 접했을 때 자극을 받은 소리이기도 하며, 사랑하는 사람(현희)을 생각할 때 나는 소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주인공의 마음에 긍정적 동요가 있을 때 나는 소리를 이렇게 표현한 것인데, (개인적 소견으로는) 이 책 전체가 주인공이 '선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에 빠질 수 없는 효과음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방향을 포기하지 말라'는 작가의 고민과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싶어 눈에 띄는 이 효과음(쁭쁭쁭쁭)을 반복해 드러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140페이지에서는 반복이 주는 능숙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좋게 말하면 관록이고, 바꿔 말하면 인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142페이지에서는 월급과 맞바꾼 모멸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주된 화자는 광택의 아버지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참아내는데 왜 너는 참지 못하냐?"

그런데 그 누구든 어딘가에 정착해 일할 때 이 문제에 맞닥뜨리지 않을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적응해야 하고, 적응하면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고, 부당한 상황에 맞닥뜨려 내적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할 때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그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했던 나. 요즘의 고민과 어우러져 답은 한 방향으로 간추려졌다. 바로 '내가 진정으로 바라왔던,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

 

 

 

204p
한계를 극복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태엽을 감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절망과 부조리와 천박함과 추접함에 반대하는 행위였다. 또한 그 모습은 인간만이 지속할 수 있는, 인간에게만 부여된 의미였고, 인생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태엽을 감으며 앞으로 나가기 위해,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자문해 봤다. 나는 아름답게 살고 싶다. 겉으로 치장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가 행복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움.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것을 찾고, 한계를 극복하고, 조금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즐겁게 노력하고 싶다. 그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겪어 나가는 요즘, 나의 마음을 두드려준 그 톡톡 튀는 필력에 즐거웠다고, 이렇게 소극적으로나마 작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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