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등사, 다와다 요코 지음, 남상욱 옮김, 자음과 모음, 초판 1쇄 발행: 2018년 3월 9일, 303페이지
*참고: 헌등사는 <헌등사>/<끝도 없이 달리는>/<불사의 섬>/<피안>/<동물들의 바벨>, 총 다섯 가지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책의 제목이자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헌등사>를 중심으로 하여 서평을 작성할 것입니다.
"증조할아버지, 토스트는 피 맛이 나네요."
이렇게 말하니 증조할아버지가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을 지어서 그런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눈썹이 짙고 턱이 나와 있어 강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상처받기 쉽고 금방 눈물을 글썽인다. 왠지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 134p
무메이. 無名. '이름이 없다'는 뜻으로 증조할아버지가 지어준 증손자의 이름. 아버지는 어딘가에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며칠 후 숨을 거둔 상황이어서 부모를 대신하여 증조할아버지가 지은 이름이었다. 아이 이름의 뜻이 '이름이 없다' 라니. 어쩐지 무미건조하고 아이에 대한 사랑이 단 한 톨의 쌀만큼도 없어서 이렇게 지은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은 증조할아버지 '요시로'에게 증손자 '무메이'는 사랑스럽고 대견하고 안타깝고 귀여운 대상이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아이에게 쏟는 이유는 부모의 부재 때문도 있지만,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연약했기 때문이다.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나고 자연재해가 휩쓸고 간 시기. 방사능이 여기저기에 닿고 퍼진지도 오래된 일이다. 도시는 황폐해졌고 더 이상 외국과의 교류도 없다. 오히려 그들의 언어를 쓰다가는 잡혀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새로 태어난 세대(요시로의 자녀 세대이자 무메이의 부모 세대)부터는 on/off 의 구분도 잘 모른다. 요시로의 딸과 사위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맡긴 채 오키나와로 가 과수원에서 일한다. 오키나와로 갈 때 아이를 데려가지 못한 이유도 인구 이동량을 조절하려는 정부의 조처 때문이었다. 딸이 가끔씩 보내오는 편지는 검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불에 한참 달구면 글이 올라오는 투명한 레몬즙으로 쓰여 있다. 별 이야기는 없다. 아버지 보고 싶어요, 아들은 잘 있나요? 와 같은 내용이 아닌, 여기에서 과일 재배를 하는데... 와 같은 일상 이야기뿐이다.
폐허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번화한 간판들, 자동차 따위는 한 대도 달리고 있지 않은데 규칙적으로 빨갛게 되거나 파랗게 되곤 하는 신호기, 사원이 없는 회사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거나 닫히거나 하는 것은 바람으로 가로수의 커다란 가지들이 휘어졌기 때문일까.연회장에서는 식어버린 담배 냄새가 수은색으로 적막하게 얼어붙었고, 테이블이 꽉 차 있었던 잡거빌딩의 어느 층도 부재라는 이름의 손님이 술을 무한 리필로 마시며 떠들어댔으며, 빌릴 사람이 없는 대부금 이자가 녹슬고, 아무도 사지 않는, 할인 판매 중인 속옷 더미가 눅눅해졌으며, 빗물이 고인 쇼윈도에 장식된 핸드백에는 곰팡이가 피고, 하이힐 속에 쥐 한 마리가 유유자적하게 낮잠을 자고 있다. 도로 아스팔트는 금이 갔고, 그 금에서 똑바로 하늘을 향해 뻗고 있는 냉이는 높이가 2미터나 된다. 옛날에는 인도 옆에 빗자루처럼 가늘고 조심스럽게 서 있었던 벚나무도 도심에서 인간들이 모습을 감춘 후에는 둘레가 두꺼워졌고, 가지는 사방으로 기세 넘치게 손을 뻗쳤으며, 울창하게 우거진 녹색의 아프리칸 스타일의 헤어가 상공에서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 39p
목요일은 나무의 날이니까 교정의 벚나무가 쓰러져 깔릴지도 몰라. 최근 나무들은 겉으로 보면 건강한 듯 보여도 실은 병에 걸려 있고 줄기 속이 뻥 뚫려 있는 경우도 있어서, 누군가가 가까이서 한숨을 쉬는 것만으로 쓰러진 적도 있었어. 그러니까 '나무 가까이에서는 한숨을 쉬지 말 것'이라는 푯말까지 있지. 아, 벚나무들이 멀리부터 순서대로 차례차례 쓰러져. 나는 달려서 도망쳐. 다리가 빠르니까 가지 하나 닿지 않지. 기분 좋네. / 133~134p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상이 이들에게는 사치다. 따뜻한 햇살, 시원하게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푸르게 깔린 초원을 침대 삼아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낮잠 자는 모습을 어린 아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무메이 역시 증조할아버지는 무척 건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증조할아버지도 100세를 넘긴 고령(高齡)이다. 그럼에도 아이인 무메이보다 더 건강하다. <헌등사> 속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먹는 것도, 옷 입는 것도, 걷는 것도...... 모두가 힘겨운 일이다. 어린 무메이는 여름에는 더위를 먹을까 염려하고 햇빛 아래에 있으면 건조해서 살갗이 갈라진다. 이렇게 덥다가도 그늘 아래에 있다 땀이 식으면 오한으로 뼈가 시리고, 겨울에는 혹여 감기에 걸릴까 애를 먹는다. 요시로는 손자를 잘 챙기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 시대의 노인들은 100세를 넘어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방사능의 영향이다. 지금의 우리에겐 60대가 정년이자 은퇴 시기이지만, 이 이야기 속의 60대는 그야말로 '한창'이다.
요시로는 그림엽서를 사러 가는 김에 계산대 옆 기둥에 기대어 이 사람과 딸의 풍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낙이었다."아마나는 잘 지내고 있나요?""병에 걸리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고등학교 시절에 미코시부에서 몸을 단련했으니까요.""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육상부였잖아요?""단거리 주자 따위는 오늘날 실생활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아요. 동물이 없는 들판에 사냥을 나서는 것도 허무하잖아요."그렇게 말하고 연필을 창처럼 들고, 무릎이 가슴에 닿을 정도로 높게 한 팔을 올리는 오시바나 아티스트는 아직 70대의 젊은 노인으로, 젓가락이 굴러가는 것만으로도 웃어대는 한창 때의 연령이었다. / 79p
점점 나이들어가지만 죽지 않는 신체를 물려 받은, 돌아오지 않는 딸과 손자를 대신해 증손자를 키워내는 요시로. 휘청거리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무메이. 그들의 모습을 그려낸 다와다 요코의 세계관이 두렵기까지 하지만, 이것이 그저 상상 속의 모습일 것이라며 낙관할 수도 없다. 독일과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는 저자 '다와다 요코'의 소설 <헌등사>. 이 소설은 현재라는 시간이 붕괴될 것 같은 불안감에도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요시로의 모습을 보며 독자들이 본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불안감을 계속해서 지각하도록 만든다. 일본 작가가 쓴 일본 상황에 대한 고찰 같기도 한 이 책은 압도적 재난 앞에서 인력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이와 더불어 무기력함이 둘러 싸고 있는 이 '평범한' 삶들에 대해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읽으면 읽을 수록 전달되는 묘한 현실감에 소름이 돋아오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