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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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창비 출판사, 초판 1쇄 발행: 2018년 3월 15일, 326페이지

 

'이 세상에는 악인보다 선인이 훨씬 많다. 몇 안되는 악인으로 인한 상처를 되새기며 살 이유가 뭐가 있겠나. 악인들은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모든 과거지사를 깨끗이 잊어버리자.'
정찬우는 자기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유인이 되어 그들을 용서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했고 후련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상상에 빠져 잠 못 이루는 사이, 9월 30일 밤을 하얗게 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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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출소하지 못하는 줄 알았던 주인공이 떠올리는 시 한 구절)
타고르의 시 한구절이 초점 잃은 그의 눈에 어른거렸다.

나에게 자유를 다오
머리 풀어 산발하고
알지 못하는 목적지를 향하여
맹진하는 태풍과도 같이

316-317p.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열심히 공부해왔던 수재. 2등을 하고 기쁜 마음에 아버지께 달려갔으나 "왜 1등을 하지 못했느냐!" 라는 호통에 큰 충격을 받고난 이후 모든 시험에서 1등만을 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남자. 교육자라는 꿈을 품으며 열심히 공부했고 그 노력을 인정받아 꿈을 이루는 듯 하였으나, 영문 모를 군사복을 입으라는 지시에 허망하게 따라야만 했던 불행했던 남자. '이북에서는 근로자가 살 만하다지요?' 이북에는 아예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듯, 진실을 알지도 못한 채 이북을 지상천국이라고 동경하는 사람들의 편견에 둘러싸인 채 가족과 떨어져 감방생활을 해야만 했던 남자. 어머니, 그 세 글자를 부르며 엉엉 울었던 남자. 이 남자는 바로 실제 존재했던 한 시대의 인물, '정찬우'다.

그의 이야기는 어떻게 책으로 풀려나오게 되었을까? 역사책 한 귀퉁이를 맡고 있는 인물도 아니거니와, 어떠한 큰 공훈을 세운 바도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그건 바로 근현대사의 가려진 진실을 복원하는 소설을 써온 작가 안재성이 발견한 한 인물의 실명 수기 속 인물인 '정찬우'를 발견하게 된 데서 시작된다. 작가는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장롱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던 한 낡은 원고지 뭉치 속에서 이 인물을 발견했는데, 한국전쟁이라는 뼈아픈 역사와 함께 이 인물을 버무려내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상태의 한반도를 우리네 기억 속에 끄집어낸다.

작가는 어떠한 첨언(添言)도 하지 않는다. 남과 북의 밤낮없는 전쟁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할뿐이나 책을 읽으며 그 호흡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소설이기에 그렇다. 왜 정찬우라는 인물은, 아니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토록 어린 나이에 꿈을 좇지 못하고 전쟁터로 나아가야만 했을까. 왜 전시 중 이리저리 튀어 몸을 찢고 할퀴는 포탄 파편에 휩싸여야만 했을까. 묻어주는 이 없이 왜 한 곳에 쌓여 어두컴컴한 땅 속에 묻히지도 못한 채 썩어가야 했을까.

이 와중 책을 읽을 수록 정찬우라는 이 스물 두 살의 젊은이는 자애로우며 인정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전시 상황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군의관과 그를 보필하는 간호사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들을 군령에 어긋나지 않도록 담당 군관을 설득해 살려내기도 하고, 만주에서 같은 동네에 살았던 사람을 구해주기도 한다. 덕분에 삶의 문턱을 넘을뻔한 상황에서도 생명의 은인이라며 평생 보은하겠다는 그들에 의해 다시 목숨을 빚지기도 한다. 서로 죽고죽이는 전시 상황에서 이러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모습은 크게 빛을 발한다. 인간의 정,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고 통하는 끈끈한 무언가가 흐를 때 총과 검은 날카롭게 벼려진 기운을 잃어버린다.

 

 

 

 

 

           인민군이나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이 써붙인 것이 틀림없었다. 아치를 지나자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평양 거리에서 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아래위 흰옷을 입은 이들이 솥단지며 이불 보따리를 나눠 이거나

           지게에 진 채 힘없는 걸음으로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치마폭으로 눈물을 닦느라고

           자꾸만 뒤처지는 여인도 보이고 부모를 잃었는지 혼자 울며 걷는 아이도 보였다.


          '앞에도 전선, 뒤에도 전선이니 갈 곳도 없는데 어디로들 가는 걸까? 이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25p.

 

 

법무관은 정찬우가 피고석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방금 이 법정에 들어서면서 느낀 감상을 말해보우."
예상 밖의 질문에 정찬우는 잠깐 생각했다가 공손히 말했다.
"약소민족의 비애를 느꼈습니다."

다른 법무관이 뜨악한 표정으로 캐물었다.
"약소민족의 비애라면?"
"우리 민족이 강대하였더라면 일본의 식민지 노예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남북으로 양단되는 서러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국토가 두 동강이로 나누어진 이 약소민족의 처지가 저로 하여금 법정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214-215p.

 

 

감방에 갇혀 있으며 온갖 심한 매질로 살점이 으깨어지고 실신하다 다시 억지로 깨어나 비명을 지르며 매를 맞는 옆방, 옆의 옆방, 그 옆의 옆방...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고 손이 벌벌 떨리던 사람들. 온갖 고문을 겪고 몸은 피와 멍과 주룩주룩 흐르는 진땀으로 가득한데도, "지나칩니다!" 라고 그들에게 항거하던 정찬우. 결국 폭력으로 얼룩진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진술서와 엉터리 고백서를 쓰면서도 모두가 본인이 담보한 '독단적 조치'였으니 모두 용서하고 본인을 추궁하라고 말했던 468번 정찬우. 어떤 판단이 내려질지 모르는 상황에서조차 '약소민족의 비애'를 운운하는 사람. 독방에 갇히면서까지도 동생이 땡볕 아래에서 흘리는 땀 한 방울을 더 안타까이 여겼던 사람.

 

 

햇볕에 따가우면 바람이나 시원하면 좋을 것을 태양은 태양대로 땅김은 땅김대로 숨 막히는 더위만 자아내고 있구나. 귀여운 아우 훈성아, 몸 성히 잘 있느냐? 힘에 겨운 농사일에 지쳐 아래 위로 마구 쏟아지는 땀방울을 씻을 기운마저 없을 너의 처지를 이슬 머금은 눈망울로 분명히 본다. 그러나 훈성아, 폭양, 지열, 피로, 권태, 질식할 이 괴로움을 과감히 박차고 나아가거라. 옛날에는 피서라는 말을 즐겨 썼지만 지금은 단련이란 새로운 용어를 추앙하는 모양이더라...... 세상이 바뀌어 나도 곧 은사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은사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313p.

 

 

책을 덮으며, 나는 이 사람이 어떤 전쟁 영웅도, 역사적 공훈을 세운 인물이 아니라도 그의 이야기가 책으로 쓰여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젊고 유망한 북한의 엘리트에서 감옥에 갇혀 괴롭고 괴롭게 벌을 받다 26년 만에 고향 땅을 밟으며 오열했던 중년의 사내가 되기까지, 그의 일대기가 적힌 이 책이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안재성 작가에게 읽혔던 그 과정이 너무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전쟁과 온갖 사람의 죽음과 배신과 밀고와 다툼과 폭력과 생살을 파고드는 그 아픔 속에서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용서하며 나라를 안타까워 할 줄 알았던 '정찬우'라는 인물의 인간다움을 아름답게 그려낸 작가의 필력에도 감사했다. 잔인하고 참담한 그 장면들을 덤덤하게 그려냈으나 실은 써내려가며 몇 번이고 그 생생한 느낌에 괴로워했을 작가의 고생이 눈에 선하다. 더불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국가의 상황을 다시 떠올리며 또 한 번 몸서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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