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여고 탐정단 : 방과 후의 미스터리 블랙 로맨스 클럽
박하익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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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고라는 공간을 특별하거나 특이하게 느끼지 않는다. 여중을 나와 여고에 들어갔던 내게 여고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생활공간이었다. 주말을 제외하고 하루종일 살던 그곳. 기억을 더듬어보면 평범했지만 사건은 계속 터졌던 것같다. 물론 그때도 무심함을 체화하고 있던 나는 내 일이 아닌 이상 그 사건들에 별 관심을 주지 않았었지만 말이다. 『선암여고 탐정단』의 주인공 채율의 첫모습은 그런 점이 그 시절의 나와 비슷하다. 채율은 다른 일은 다 신경 끄고 성적을 관리하는 데에만 최선을 다한다. 이상한 남자가 자신을 물든 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양.

 

그러나 이야기는 그 무심함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 시작되는 법이다. 가령 사건마다 얼굴을 들이밀어야하는 미도 같은 아이를 만날 때 말이다.

 

"탐정단에 들어와. 함께 무는 남자를 잡자."_21쪽

 

 

 

 

 

선암여고 탐정단 입단.

 

채율은 자기자신의 명예와 천재 쌍둥이 오빠 채준에게만 관심을 주는 어머니 때문에 상당히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의 세뇌가 제대로 먹혀들어갔던 것일까. 소위 말하는 모범생, 아니 우등생으로 꿈도 없이 그냥 정해진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고입 실패로 도피성 유학만을 기다리며 무채색으로 살던 채율은 무는 남자 사건으로 이제까지의 학교 생활에서 벗어날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선암여고 탐정단'과 접점이 생기고 끌려가서 가입까지 해버린 것이다. 호기심 넘치는 탐정단 대장 미도, 음침한 오컬트 마니아 하재, 행동대장 성윤, 모델같은 외모의 예희. 채율은 이 네 사람과 어울리며 사건의 수사를 하게 된다. 탐정단이 재미있지만 한편 귀찮기도 한 이율배반적 감정 속에서 채율은 무는 남자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다. 오빠와 엄마의 영향으로 스스로 인식을 못하고 있지만 채율은 상당히 영리한 소녀니까.

 

 

 

 

발랄 씁쓸한 이야기.

 

선암여고 탐정단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사회적 문제와 결부된다. 성적과 시험지 유출, 미성년자 임신과 낙태, 학원 폭력. 채율의 문제 또한 따지고 보면 채율 개인의 것이 아니다. 작가는 이런 민감한 문제들을 마냥 무겁지 않게, 하지만 그리 가볍지도 않게 풀어낸다. 분위기는 발랄하지만 마냥 웃고 지나갈 수 없는 이야기들. 읽는 동안 공감하고, 내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특히 세 번째 문제, 왕따 관련 이야기를 읽으면서 깊이 공감했다. 왕따가 발생하는 지점과 꼬여가는 그 과정을 정확하게 포착해서 까발린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직까지도 떨쳐내지 못한 문제를 의외의 곳에서 직시할 수밖에 없게 되어 당황했다. 혼란 후에 찾아온 것은 감탄. '아, 이 작가 정말 제대로구나' 싶었다. 일반적으로 학원물에서는 연애나 취미생활만 하고 다른 건 뒷전인 줄 알았는데, 선암여고 탐정단은 한국의 현실에 단단히 발 붙이고 있는 이야기였다.

 

'유리 미로는 부서진 걸까, 아니면 더 크고 투명하게 확장된 걸까? 그날의 포옹과 화해를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처벌을 면하기 위한 한 편의 연극이었을까.'_196쪽

 

"여자들에게는 그런 문화가 허락되지 않았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여자애들은 친구와 싸워서도 안 되고, 경쟁해서도 안 된다는 식으로 양육되죠. 원래 미움이나 질투는 당연한 감정인데 그걸 억누르다 보니 음지에서 비겁하게 풀 수밖에요."_198쪽

 

 

 

 

약간의 로맨스도.

 

가끔 등장하는 로맨스는 이야기에 뿌려진 향신료. 로맨스가 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만드는 건 확실하다. 채준에 대한 미도의 애정은 일반적인 여고생의 애정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기도 하다. 미도라는 캐릭터가 가진 강한 개성 탓. 그렇지만 그 4차원적인 미도의 연애 감정에도 소녀심이 가득한 면이 있다. 미도와 채준의 연애놀이에 설렘보다는 개그적 요소가 강하다면, 채율과 하라온 라인은 조금 더 로맨스같다. 채율이 좋아서 그런지 이 커플 참 마음에 드는데. 썸으로 끝이라니.

 

 

 

새 책을 안 읽다가 간만에 읽은 게 선암여고 탐정단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발랄한 분위기 덕분에 접근하기 쉬웠고, 채율이라는 캐릭터에 공감하며 몰입했고, 현실적인 사건들에 여러가지 생각들을 해보게 됐다. 독서 의욕에 불을 붙여줬다고나 할까. 다음 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마저 일더라. 드라마나 만화로 있어도 재미있을 거 같고. 다음 권...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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