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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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동경해 마지않던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가 읽었다는 <멋진 신세계>. ‘주디는 제목만 봐도 참 재미있을 것 같은 책만 읽는구나’ 하며 그 책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목에서 맨 처음 풍기는 인상은 탐스러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들 사이로 사람들이 붕붕 날아다니며 노니는 유치뽕짝의 환상세계였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의 내부를 들여다보거나 누가 멋진 신세계의 진실을 폭로함으로써 그 순진한 환상을 깰만한 일은 꽤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멋진 신세계든 추악한 신세계든 내 감성선에 별 영향을 주지않을 시기에 책장을 펼쳐보게 되었고, 멋진 신세계는 이 세계의 시작을 이루는 인공 수정실에서 시작된다.

이 새로운 세계에선 공유, 균등, 안정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알파, 베타, 델타, 감마, 엡실론의 계층을 기계적으로 생산하며 수면교육과 전류쇼크 등의 조건반사 훈련을 통해 각 계급의 구성원들이 다른 계급보다 자신의 계급에 속한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게끔 조작된 상태로 살아간다. 아, 물론 이들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동물인지라 가끔 우울할 때가 있지만 그럴 땐 1그램의 소마(<메타피지카 공주>에 등장하는 행복주 정도라 생각하면 된다)가 그 울적함을 한 방에 날려보내니 이들의 행복한 기분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이처럼 안정된 사회에 어느날 이물질이 끼게 되는데, 그 이물질은 존이라는 자연인. 시험관에서 배양되지 않고 구식으로 태어난 ‘야만인’ 존은 이들의 ‘문명세계’와 충돌하게 되고 어떠한 문제의 발생도 용납하지 않는 문명세계의 총통과 불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존과의 타협으로 존은 문명세계의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입되는 행복감으로부터 떠난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뭔지 알지 못하는 문명인들은 스스로 고통을 선택한 존의 행동을 일개 구경거리로 취급하며 그것마저 자신들의 쾌락을 채울 촉감영화의 소재로 사용하는 얍샵함을 보여준다.

그들은 몇 그램의 소마로 얻는 행복의 대가로 가능성, 기회, 선택권, 자유를 저당잡힌 셈이다. 만약 그것들을 되찾으려면 존의 경우처럼 끝없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야 한다. 제 3의 절충안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니 못 견디는 사람은 스스로 세상을 뜰 수밖에…

저자 헉슬리는 이 점이 안타까웠던지 훗날 이 작품을 다시 쓴다면 문명국으로부터의 망명자나 도망자들이 건설하는 제 3사회의 존재를 설정하겠다고 했다는데 어떤 이상적인 사회를 구상했는지 무척 궁금하다. 과연 탈출구가 있을까…

그건 그렇고, 난데없이 TV에서 아름다운 배경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간드러진 목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매일 반복되는 이 광고 문구가 ‘나는 베타 계급이어서 행복합니다’란 수면교육의 또다른 버전으로 느껴진다고 고백한다면… 그렇담 우리 현실도 멋진 신세계와 다를 바 없단 얘기? 이것 봐, 정신차리라고, 넌 채널 선택권이 있잖아. 여기, 리모콘으로 자유의지를 시험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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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이야기 - 양장본
이형식 엮음 / 궁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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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이야기>를 읽게 된 건 <중세에 살기>에 나오는 우화에 관한 언급 때문이었다. 어릴 적 몇 개의 에피소드로 봤던 르나르 이야기를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펼쳐들었는데 초반 몇 개의 에피소드는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것들이라 슬렁슬렁 넘어갔다. 그리곤 처음 접하는 에피소드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짜증의 수위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르나르의 간계가 당시 프랑스 사회상을 빗대어 조롱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에겐 웃음을 주었을는지 모르나, 내게는 별로 유머러스하거나 통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칠 줄 모르고 악행을 일삼는 르나르도 르나르지만 그렇게 당하고서도 정신 차리는 법이 없이 또 속아넘어가는 -한 술 더 떠 절친한 친구가 되기까지 하는- 멍청한 사자왕 외 그의 부하들은 뭐라 말할 수 없이 한심하다. 그래그래, 물론 알고 있다. 이 작품이 중세와 별다를 것 없는 이 사회에서도 유효한 풍자문학이라는 것을.

일명 백의의 수도사들이라 일컫는 시또파 수도사들의 행태는 지금의 기업형 종교 단체들과 상응할테고, 서로 가죽을 벗기지 못해 안달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둘도 없이 절친한 사이로 뿅~하고 나타나는 건 복잡한 이해관계에 따라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는(혹은 그 반대로 되는) 금배지를 단 양반들의 행각과 뭐 그리 다르겠는가. 모략과 술수가 횡행하기로는 21세기가 아무렴 12~13세기보다 덜하진 않을테고.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인간들의 권모술수에 넌더리가 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의도했던 통쾌함은 온데간데 없고 ‘우리 사는 세상은 이러니 계속 이러하리라’라는 넋두리만 남아있는 것이다. 계속 읽다보니 ‘이렇게 더러운 세상에서 살다 그냥 죽는거지 뭐…’라는 자괴감마저(약간 과장하긴 했지만) 들 뻔 했다. 결국 이 책의 문제라기 보단 깨끗하지 않은 현실이 문제인 셈이다.

간간히 그 당시 유행했던(아마도) 문체 -이를테면 ‘아담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류의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름들의 향연- 를 엿볼 수 있어서 약간의 재미를 준 것외에는 나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은 책이었다. 그저 와이드 판 르나르 이야기를 봤다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Tip! <여우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동물들이 르나르에게 희생당한다고 슬퍼하지 말 것. 이들은 불사조로 르나르가 잡아먹거나, 심지어 죽은 시체의 살점을 조각내어 소금절이를 해놓아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나 르나르와 절친한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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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모르는 양념공식 요리법
신미혜 지음 / 세종(세종서적)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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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내가 중학생 때, 나는 좋아하는 요리인 잡채를 만드려는 엄청난 시도를 하려한다. 그러나 만드는 법을 모르는 관계로 우리집 요리의 대가에게 물어본다.
“ 엄마, 잡채 어떻게 만들어?”
“ 삶은 당면이랑 야채랑 고기 볶은 걸 간장하고 설탕넣고 버무려. 후추도 약간 뿌리고.”

잡채의 기막힌 맛에 비하면 이 얼마나 간단한 요리법인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요리를 시작한다. 자, 왕초보 요리사는 당면을 삶은 후 야채들을 썰고 볶아 커다란 볼에 쏟아붙는다.

그러나 왕초보란 단어를 괜히 쓴 것이 아니듯, 그 단어에 걸맞는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당면은 불어터지고 야채들은 당면의 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며, 그들 또한 풀죽은 모습으로 축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가여워 입에 댈 수 조차 없다.

불쌍한 당면과 고락을 같이 하고픈 마음에 축 쳐진 나를 보고 현장을 목격한 엄마, 뒤에 이어지는 가족들의 잔소리. 넌 왜그리 눈썰미가 없냐, 엄마 만들 때 눈여겨 보지 그랬냐는 둥 혀를 차는 소리가 한 바가지다. 재료들의 양과 적절한 조리시간을 알려줬어야 하지 않냐는 나의 항변은 식사 시간이 늦어져 성난 가족들의 아우성에 흔적도 없이 스러진다.

이상은 나의 요리 실패기 중 하나이다. 가족들은 요리 실패 요인이 나의 눈썰미 부족, 요리감각의 부재라고 매번 각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믿고 체념하며 살던 중 한줄기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엄마도 모르는 양념공식>이라는, 당시로선 특이한 제목의 책을 발견하곤 곧 탐독에 들어갔다. 일단 ‘공식’이라는 말에서 대부분의 요리 고수들이 경시하는 계량을 부각시킨다는 느낌이 들어 반가웠다. 이 바쁜 세상에 언제 눈썰미로 요리를 배우냔 말이다.

이 책에는 제목대로 양념 공식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요리의 기본 조리법과 흔히 해먹는 요리들의 설명도 되어있어 초보자들이 겁내지 않고 요리할 수 있는 자신감을 만들어준다.

또 보통 요리책을 보고 뭘 만들어 먹으려하면 항상 집에 없는 몇 가지 재료들을 구입하러 나가야 하는데 이 책의 천연 양념들이나 요리들은 대부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집에서 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생소한 재료 때문에 기죽거나 귀찮게 시장걸음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큰 메리트라고 할 수 있다.

색다르고 특별한 요리를 찾는다면 다른 좋은 요리책들이 많다. 이 책은 그런 귀족적인 맛은 없지만 요리의 기본적인 맛이 들어있어 누구보다도 초보자들에게 도움을 준다.
사실 요즘은 이 책 말고도 친절하게 요리 잘 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많다. 어쩌면 그런 책들에 비해 이 책은 먹음직스런 사진도 없고 특별한 요리가 별로 없어 눈길을 끌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량해서 요리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풍토에서 정확한 계량을 주장하는 책을 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하고 친절한(특히 초보자들에게) 요리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참, 나에게 이제 잡채 잘 만드냐고 묻는다면, 이젠 눈감고도 만들 수 있는 요리 중 하나라고 대답해 드리겠다. 계랑은 하면서 요리하냐고? 에이~ 눈감고도 만든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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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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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이런 글쓰기, 그러니까 서평에 나와있는 표현을 빌리자면 골계미가 풍부한 작품을 쓰는 작가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아멜리 노통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마르셀 에메도 골계미에 대해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인 것 같다.

첫 번째로 수록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읽은 후엔 그냥 생각보다 괜찮다고 느낀 정도였는데, 그 다음 '생존 시간 카드'를 접하고선 순식간에 마르셀 에메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 책에는 네 편의 단편들이 담겨있다.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마구 발휘하다 파멸하는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와 각자의 생산능력에 따라 차별된 생존시간을 부여받아 살아간다는 내용의 ‘생존 시간 카드’, 전제적인 가장이 제 멋에 겨워 아들의 숙제를 도와주다 도리어 아들이 감싸준다는 ‘속담’, 마지막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모자의 아름다운 이야기 ‘칠십 리 장화’.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건 ‘생존 시간 카드’였는데 모두들 알고 있지만 흔히 망각하는 절대적 시간이란 허상이라는, 그리고 그 허상으로 인해 벌어지는 가치관의 혼란을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다.

또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칠십리 장화’였는데 여기에선 엄지왕자의 이미지가 겹쳐서인지 어릴 적 읽던 동화의 느낌 그대로 따뜻함이 촉촉하게 배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가 있다면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인데도 공감할 수 있었던 건 마르셀 에메의 필력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두 소시민이 등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어쩌면 작가가 소시민들의 팍팍한 삶에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해 마련한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작가의 재치있는 문장이 네 작품 모두에 담겨있지만, 단편 하나하나가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을만큼 각각의 분위기가 다르다. 그래서 더 읽을 맛이 나겠지만.

단편들 만으로도 훌륭한 이 책은 작품 속 여러 어휘들의 속 뜻을 알려주는 친절한 역자 후기(후기를 보고 마르셀 에메 작품 해설집을 구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와 독특한 분위기 연출에 한 몫을 더하는 삽화가 더해져 정성스럽게 만든 책 한 권 만났다는 기쁨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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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엠마뉘엘 베르네임 소설
엠마뉴엘 베른하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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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까지만 해도 우연히 만나게 되는 모르는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주로 서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데, 대체적으로 그 사람이 보고있는 책이나 풍기는 분위기가 나와 비슷할 때였던 것 같다.

그럴 땐 '같이 식사나 차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상대방에게 의향을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곤 했다. 아,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그저 책 제목처럼 '속 깊은 이성친구' 하나 만들어 서로의 감수성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니까.

어쨌거나 결론을 말하자면 그런 생각을 실행에 옮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거다.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대충 둘러대자면 내가 다가갔을 때 상대방이 보일 반응- 나를 맛이 살짝 간 사람으로 치부하거나 나의 제의를 성적인 것에 관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에 솜씨있게 대처할 능력이 모자랐고, 결정적으로 이 계획의 수행에 있어서 치명적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 첫인상이 그 제의를 상대방이 흔쾌히 수락할 만큼은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그 사람이 나의 이런 마음을 감지하고 먼저 다가와준다면 더 이상 좋을 순 없을텐데…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얘기를 늘어놓은 것은 바로 <금요일 저녁>이라는 소설에서 나의 희망이 현실로 펼쳐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단지 이들의 만남이 서점이 아니라 도로에서 이루어지며 육체적인 교감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좀 다르지만.

어느 금요일 저녁, 주인공 로르는 교통체증으로 자가용과 함께 기어가던 중 프레드릭이라는 남자를 옆 자리에 태우게 된다. 로르는 프레드릭의 향수와 담배, 그리고 가죽 점퍼의 혼합된 냄새와 독특한 분위기에 이끌려 그날 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작가는 로르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로르와 프레드릭의 행동에 어떤 해석도 내비치지 않는데, 그런 점이 읽는 사람에게 여러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들의 만남부터 헤어짐까지가 모두 프레드릭의 계획된 수순에 따른 것이었는지, 아님 순수하게 그저 우연에 의한 만남과 감정의 이끌림에 따른 것인지에서부터 여러가지 등등…

이 소설은 무척 술술 읽히는데, 짧은 분량도 분량이지만 작가가 주인공의 심리묘사나 정황을 매끄럽게 풀어나가기 때문에 마치 새우깡을 먹을 때 처럼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된다.

개인적으론 <금요일 저녁>의 다른 버전, 그러니까 프레드릭의 관점에서 보는 금요일 저녁의 이야기가 나와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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