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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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이런 글쓰기, 그러니까 서평에 나와있는 표현을 빌리자면 골계미가 풍부한 작품을 쓰는 작가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아멜리 노통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마르셀 에메도 골계미에 대해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인 것 같다.

첫 번째로 수록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읽은 후엔 그냥 생각보다 괜찮다고 느낀 정도였는데, 그 다음 '생존 시간 카드'를 접하고선 순식간에 마르셀 에메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 책에는 네 편의 단편들이 담겨있다.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마구 발휘하다 파멸하는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와 각자의 생산능력에 따라 차별된 생존시간을 부여받아 살아간다는 내용의 ‘생존 시간 카드’, 전제적인 가장이 제 멋에 겨워 아들의 숙제를 도와주다 도리어 아들이 감싸준다는 ‘속담’, 마지막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모자의 아름다운 이야기 ‘칠십 리 장화’.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건 ‘생존 시간 카드’였는데 모두들 알고 있지만 흔히 망각하는 절대적 시간이란 허상이라는, 그리고 그 허상으로 인해 벌어지는 가치관의 혼란을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다.

또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칠십리 장화’였는데 여기에선 엄지왕자의 이미지가 겹쳐서인지 어릴 적 읽던 동화의 느낌 그대로 따뜻함이 촉촉하게 배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가 있다면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인데도 공감할 수 있었던 건 마르셀 에메의 필력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두 소시민이 등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어쩌면 작가가 소시민들의 팍팍한 삶에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해 마련한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작가의 재치있는 문장이 네 작품 모두에 담겨있지만, 단편 하나하나가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을만큼 각각의 분위기가 다르다. 그래서 더 읽을 맛이 나겠지만.

단편들 만으로도 훌륭한 이 책은 작품 속 여러 어휘들의 속 뜻을 알려주는 친절한 역자 후기(후기를 보고 마르셀 에메 작품 해설집을 구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와 독특한 분위기 연출에 한 몫을 더하는 삽화가 더해져 정성스럽게 만든 책 한 권 만났다는 기쁨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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