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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진화심리학 - 조선 후기의 가족 살해와 배우자 살해 ㅣ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모노그래프 3
최재천 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사건 번호 : #087
사건 개요 : 조소사는 광주 정안리의 금치삼과 혼인하였다가 상배(喪配)하여 광주 김량리의 정천준에게 개가하여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정천준이 조소사와 장락현이 대낮에 간통하는 것을 보고 조소사를 구타하여 숨지게 한 사건이었다. - 92쪽
사건 번호 : #154
사건 개요 : 이재길의 부인 성소사는 20여 년을 같이 살면서도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였다. 이재길이 이웃집 여인에게 눈을 돌리자 심하게 투기를 하였다. 이해 12월에도 읍내에 이재길이 다녀왔는데 성소사가 게으르게 누워 있다가 어떤 여자랑 또 놀아나다 오느냐 하며 대들자 이재길은 가뜩이나 부인 성소사가 게으른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투기까지 부리므로 격분하여 부인을 구타, 살해한 사건이었다. - 93쪽
위의 두 사건은 모두 1902년 조선에서 일어난 것이다. 두 사건 다 간통으로 인한 살인을 기록한 것인데 재미있는 건 간통 당사자의 성별과 상관없이 살해당한 사람은 모두 여성이라는 것이다.
뭔가 불합리하다고? 아니다, 조선 시대였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후자라면 꼭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슬슬 돌기 시작하는 스팀을 어떻게 꺼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그 열기를 조금 식혀줄지도. 적어도 이런 일들이 유발되는 원인은 나름대로(즉, 진화 심리학의 관점에서) 밝혀주니까 말이다. 장발장도 사건 일지만 보면 일개 좀도둑일 뿐이지만 막상 도둑질을 한 이유를 알고 보면 그를 동정하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이들 사건의 가해자를 불쌍히 여기게 될 지도….(물론 농담이다^^;)
어쨌거나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조금 작은 글씨의 부제는 ‘조선 후기의 가족살해와 배우자 살해’라며 한층 더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기대에 찬 손길로 책장을 넘길 수 밖에.
그러나 진화 심리학의 기본 개념도 모르고 조선시대 가족 살해를 이해할 수는 없는 법, 책은 친절하게도 첫 장에서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개념을 설명해준다.
진화 생물학에서는 인간은 오랜 시간 진화를 거듭하면서 여러가지 특정한 문제에 직면했었고 그 문제에 적절하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체가 진화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고 하는데, 진화 심리학에서도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단지 이런 문제에 적응하는 것은 비단 육체 뿐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도 문제 해결에 유리한 설계도를 가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조금 다른 점이랄까. 그래서 진화 심리학자들이 마음을 ‘정신 기관’이라고 부른다고.
자, 그렇다면 인간이 도대체 어떤 문제에 직면했길래 가족 살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진화 심리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배경으로 다윈이 주창한 성선택론과 양육 투자 이론을 들고 있다. 번식 초기에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많은 자원을 자손에게 투자해야 하는 여성의 입장에선 자신의 배우자를 찾는 것에 신중을 기하게 되고, 남성은 투자를 많이 하는 성, 즉 여성에게 접근권한을 갖기 위해 더 경쟁적이 되었는데, 이런 번식 경쟁에서 성적 독점욕이 발생하고, 여기에서 파생된 적응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각종 사회 제도를 만들거나 폭력이나 살인 같은 극단적인 수단이 나왔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앞에서도 언급했듯 조선 후기의 가족 살해 사건을 통해 진화 심리학의 이론들을 증명해 나간다는 것인데 우리나라 근대의 자료에서 언뜻언뜻 볼 수 있는 당시의 생활상은 책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해준다.
비교적 최근에 연구되기 시작해서 생소하게 느껴지는 진화 심리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입문서가 될 듯하다.
보너스, 유사이래 남성과 여성이 평생 낳은 자녀의 수 최대 기록은 각각 얼마일까?
답은 여성은 69명. 남성은, 놀라지 마시라, 무려 888명인 것으로 추정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