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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성 ㅣ 환상문학전집 2
호레이스 월폴 지음, 하태환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옛부터 전해오는 불길한 예언 때문에 혈통을 잇는 문제에 예민한 영주 만프레드는 아들이 결혼하는 날 거대한 투구에 깔려 죽은 것을 보고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의 약혼녀 이사벨라와 결혼하려 한다. 당연히 이사벨라는 이 황당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 성 밖으로의 탈출을 꾀하고, 그 와중에 자신의 탈출을 도와주는 한 젊은이를 만나게 되는데…
자, 그야말로 중세 기사도 문학에 나올 법한 고전적인 전개이지 않은가! 18세기 소설로선 충분히 중세스럽기 그지없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의 영국인들에겐 이 소설이 옛 시절에 대한 향수를 제공해서 한 때의 휴식을 주는 역할을 하거나, 이야기 속에 간간이 등장하는 정체 모를 현상에서 신비함과 괴기스러움을 느껴 무척 흥미진진한 작품으로 대접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21세기의 한국인인 것을. 이 소설을 통해 중세 유럽의 문화를 즐기기엔 작품에 표현된 중세의 향취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감탄하기엔 지금껏 그보다 강도가 센 얘기를 너무 많이 보고 들어왔으니…
작가가 곳곳에 배치한 만프레드 가의 파국을 예고하는 일련의 현상들이 전혀 공포스럽지 않으니 주된 이야기와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고, 이런 엇박자가 프레데릭을 제외한 단순하고 분명한 성격의 등장인물들(이런 류의 소설에선 당연하겠지만)과 섞이니 좀 심하게 말하면 재미없는 납량특집용 코미디물을 보는 듯 했다.
고딕소설의 맛을 보고 싶은 사람은 한번쯤 봐도 괜찮겠지만(다행히 분량도 적고 술술 읽히기는 하니까)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속 편할 것 같다. ‘나중에 뭔가 대단한 대목이 나오겠지’ 하는 기대로 읽었다간 실망하기 십상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