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김깜모의 잘못된 만남이라는 노래가 한창 티브이에서 흘러나왔다. 한 상 위에서 저녁을 잡수시던 아부지는 채널을 돌렸다. 나는 큰 맘 먹고 김깜모의 노래를 들으려 채널을 돌렸다. 불현듯 아부지는 숟가락을 던졌다. 일어섰고, 곧 아부지의 체중 실린 발바닥이 내 뺨을 짓이겼다. 나는 카멜레온처럼 태도를 바꾸어서 울고 빌었다. 엎디어서 바닥에 파편으로 알알이 내팽겨진 밥풀들을 바라보며 자꾸만 울고 빌었다. 아부지는 쓰러진 나를 오른 검지손가락으로 찌르듯이 가리키며, "네 놈이 감히 내 권위에 도전해!!" 라고 말했다. 아부지는 허리띠를 뽑으러 과장된 몸짓으로 달려갔고 나는 지랄처럼 떨었다, 울었다. 입 안의 밥풀들, 그 끈질긴 일상의 연속을, 나는 뱉어내지 못했다.

일찍 죽은 박제가 된 천재 李箱은 『오감도 2호』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탄식했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아버지를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이상은 수사적 카오스를 동원했다. 동원?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무규칙하며 단단하고 그래서 기화시켜야 할 그 무엇. 그것을 이상도 나도 지상의 모든 자식들도 말로, 글로, 몸짓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

"저는 소심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분명 저 역시 여느 아이들처럼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였지요."(22) "아버지께서는 아이를 아버지 자신이 겪으신 대로만 다룰 줄 아시지요. 완력을 쓰시고, 고함을 지르시고, 버럭 화를 내시면서 말이에요. 더군다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한테는 또한 매우 합당한 것으로 보이셨겠지요. 왜냐하면 아버지는 저를 강하고 용감한 소년으로 키우려고 하셨으니까요."(23)

소심한 아이는, 강하게 키우려는 아버지의 <권위> 때문에, "벙어리처럼 완전히 입을 다물었고 아버지 앞에선 설설 기었"(47)다. 아이는 너무나 두려운 권위 앞에서 저항감을 침묵으로 감내해야만 했고, 그 고통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변이된다. 그 변이된 고통은 『변신』이라는 소설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그레고르 잠자가 되어 가정 내에서 고통받고 소외당하던 아이는 『단식 광대』로 변해서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세상의 음식(비이성, 부조리)을 거부한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드린 편지의 한 부분에서 그 직접적인 트라우마를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에 길게 인용한다.  

"아버지는 왕성한 식욕과 특별한 식성을 지니셔서 모든 음식을 걸신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정신없이 드셨기 때문에 아이들도 함께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식탁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고 그 정적은 아버지가 간간이 던지시는 경고와 재촉의 말들, "먼저 먹기나 하고, 이야기는 나중에 해!" "자 빨리빨리, 더 빨리!" 혹은 "자 봐라, 난 벌써 다 먹었다"와 같은 말들로 깨어지곤 해습니다. 뼈다귀는 깨물어 먹어서는 안 되었는데 아버지는 아니셨죠. 식초도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며 먹어서는 안 되었지만 아버지는 역시 예외였습니다. 빵을 똑바로 자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소스가 잔뜩 묻은 칼로 빵을 자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음식 부스러기를 바닥에 흘리지 않도록 다들 주의해야 했지만 결국에 가장 지저분한 곳은 바로 아버지의 의자 밑이었지요. 식탁에선 오직 식사에만 열중해야 했으나 아버지는 손톱을 자르시거나 연필을 깎으셨고 이쑤시개로 귀를 청소하셨지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아버지, 제 말을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는 전혀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들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들은 아버지가 제게 내리신 계율을 아버지 스스로가 지키시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저를 짓누르는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그토록 엄청난 권위로 여겨지던 분이셨으니까요. 그로 인해 세계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지요. 그 하나는 제가 살고 있는 노예의 세계로 나를 위해서만 제정된, 그러나 왠지 모르게 나로서는 결코 온전히 따를 수가 없는 법칙들이 지배하는 세계였고, 두번째로는 내 세계와는 무한히 멀리 떨어진 세계로 아버지가 살고 계신 세계였는데 그곳에서 아버지는 통치하는 일에 열중하여 수시로 명령을 내리셨고 그 명령이 지켜지지 않을 때면 크게 역정을 내셨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세계는 나머지 사람들이 사는 세계였는데 그들은 명령과 복종의 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저는 줄곧 치욕 속에서만 살았지요. 아버지의 명령에 따랐으나 그건 치욕이었습니다. (……) 제가 감히 아버지한테 거역할 수는 없었으니까요."(38-40) 

그래서 아이는 굶는 광대가 되어 치욕적인 굴종을 거부했다. 가족들에게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던 카프카의 부친은 가정 밖에서는 수완가였고 아첨꾼이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강한 것을, 정의로운 것을 가르치려 했지만 아이가 아버지를 보면서 알게 된 것은 이중성이다. 가르침 보다 강요를 받았고, 정의로움 이면의 간교함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침묵으로 삼켜야만 했던 아이는, 가정 속의 자신을 벌레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름도 특징도 없이 단지 이니셜 K로 전락하게 되고, 성이 뻔히 보이는데도 헤매게 되고, 결국 성에 닿지 못한다. 카프카가 죽기 오 년 전에 쓴 이 편지는 결국 아버지에게 닿지 않는다. 카프카의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 그의 문학 그 미궁, 그 비밀은 카프카의 편지에 있는 게 확실하다. 카프카의 아류임을 자처하는 수많은 작가들 중 한 사람인 정영문은 연작 소설 『검은 이야기 사슬』에서 「카프카와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썼다. 

   내게는 조국 · 고향 · 가족과 같은, 나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만큼 기이한 사랑의 형태는 없어, 나로 하여금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끝없는, 근본적인 배반을 꿈꾸게 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의 강요에 실린 중압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에 전제된 당위에 대한 혐오감이지, 그것들에 대해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다름아닌 나의 진정한 사랑이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4-05-1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의 글들은 독자를 카프카化(변신)시켜 글 속에서 퐁당 젖게 하거나 혹은 먼 말인지 전혀 이해 할 수 없어 헤매게 하지요. 다시 읽을 수록 새롭게 눈 뜨게 하는 작가가 카프카이군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