껄껄 선생의 열하일기 새 완역본이 나왔다. 서점 갈 시간이 없어 책을 보진 못했다. 우선 반갑다마는, 지상 보도된 역자의 인터뷰마다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나는 군대에서 리상호 역본 열하일기를 정독한 바 있는데(일병에서 상병에 걸쳐 띄엄띄엄, 번번이 통제에 의해 맥이 끊겨가며 읽었다), 반 세기 전에 북한 학자가 번역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게 읽혔다. 고전국역총서로 나온 국역 열하일기에 비해 문장도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훌륭했다(특히, <도강록>에서 연암이 요동벌을 맞닥뜨리며 한바탕 퍼붓는 울음론에서, 두 판본의 문장에 대한 나의 기호가 엇갈렸다).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책이라 편집도 깔끔했다. 종이 재질이 너무 두꺼워서 책의 부피가 큰 것이 유일한 단점이랄까(휴대하기엔 애로하더라).  

군대에서 별의별 잡스러운 다량의 책들을 읽었지만 쓸 만한 책들은 정성껏 노트에 메모했는데, 그 200여권의 노트할 만한 책들 중 굳이 한 권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열하일기다. 감동 먹어 울기도 했고, 그 장쾌한 기개에 군바리다운 패기로 침상 바닥을 두드리기도 했으며, 밤 새워 글벗들과 필담을 나누다가 양고기가 타는 줄도 모르는 장면(망양록)에 이르러서는 부러워서, 몇몇 책 좋아하는 전우들을 모아 냉동짬뽕이 전자렌지에서 타는 줄도 모르고 노가리를 풀었다. 열하일기는 만물지였고 백과사전인데다 내밀한 일기이기도 했으며, 적나라한 르포였고, 팩션 소설이었다.  

리상호 역본 열하일기는 내 젊은 날의 위대한 스승이다.    

이번에 나온 김혈조 선생 번역 열하일기가 훌륭할 것이란 데는 의심이 없지만, 각각의 기사마다 기존 번역물 특히 리상호 본에 대한 오역 사례를 한 문장씩 비교 지적하고 있다. 한겨레 기사에서 예를 든 문장은 '오불선타팔룡 모거일간(吾不羨他八龍 慕渠一姦)이라 말하여 온 방안이 한바탕 웃었다'라는 문장인데, 리상호 본은 '나는 저 사람의 아들 팔형제가 부러운 것보다 작은마누라나 하룻밤 빌렸으면 그만이겠소'로 번역했다.

김혈조 선생은 "원문을 상식적으로 번역해야 하고, 파자 식으로 쓴 것이 연암 문체의 한 특징이니 간(姦)은 한자의 본뜻보다는 여자 셋이라는 파자로 보아야" 한다며, '나는 여덟 아들이 부러운 게 아니라 한 남자가 세 여자를 거느렸다는 게 더 탐납니다라고 하여 온 방안이 한바탕 웃었다'로 번역했단다.  

나도 속재필담의 저 부분을 읽을 당시에 한바탕 웃었는데, (한문을 몰라서 답답하다만) 리상호 번역이 더 재밌고 좋다(저잣거리에선 심심찮게 들을 법한 농지거리겠지만, 글 만지는 샌님들 끼리라면, '파격'적이니까). 게다가 김혈조 선생의 저 말은, 의역했다는 말이 아닌가? 말 그대로라면 '파자' 식으로 쓰는 것이 연암 문체의 '한' 특징이지 늘 그런 건 아니잖은가. 원문의 내용을 상식적인 선에서 순화 의역했다는 말이 아닌가. 누구의 상식인지. 조선시대인지 연암의 박학다식한 상식(?)인지 번역자의 상식인지, 기사의 문맥만으로는 감이 안 온다. 연암이 상식적인 사람이었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아니었던 거 같다.  

새로 나온 열하일기 번역본 관련 기사들을 주욱 읽고는 장바구니에 담았던 새판본 열하일기를, 뺐다. 사람이든 일이든 상품이든, 남을 흠잡으면서 등장하는 경우는 공통적으로, 별볼일 없더라. 지적할 거면 진작하든가.  

예전에도 먼저 출간된 판본의 오역 지적하면서 출간하는 인문서들이 제법 있었다. 오역 지적 문제는 아닌데, 문지에서 나온 서유기와 솔출판사에서 나온 서유기를 두고 어떤 것으로 살까 고민했었다. 지금 검색하니 두 판본의 출간년도가 햇수로 1년 다르게 나오는데(한쪽에서 바꿨구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청 고민하다가 도서관에 가서 읽으려 했지만 두 판본 다 신간이라 그러지 못했다. 카프카의 작품은 여러 출판사들에서 나올 때마다 오역 어쩌구이고, 세계문학전집도 각 출판사의 시리즈 별로 제각각 오역 지적하면서 등장한다. 인문서의 출판마케팅이란 게 그런 식인 모양이다. 원문을 해독할 능력이 없는 독자로서는 답답한 노릇. 한 가지 깨우친 게 있다면, 얇은 귀로 이것저것 건드리면 시간만 뺏기는 수가 허다하다는 것.  

얼마 전에, 헌책방에서 사놓고 오래동안 모셔두기만 했던 학원사판 안나 카레리나를 읽었다. 어제 알라딘에서 클릭질을 하다가 민음사 세계명작선집으로 새로 나온 사실을 알았다. 학원사판의 난삽한 문장과 지저분한 편집 때문에 짜증이 나서 몇 번이나 읽기를 그만두려했었는데! 내가 다 읽기 전에 진작 출간될 것이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난데없는 분노감이 끓어올랐었다. 한 작품의 다른 판본이라면, 게다가 내가 읽은 작품이라면, 그리고 내가 읽은 판본을 지적하고 나온다면, 이젠 어디까지나 개인적 체험에 의해서, 분노부터 일어난다… …  

해서…… 김혈조 선생의 열하일기 판본에 대한 나의 소감은 그저 푸념일 뿐이다.  

열하일기는 무조건 훌륭한 책이니 어떤 판본이든 많이들 읽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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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9-30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나온 열하일기 보았는데, 사진도 많고 편집도 시원시원해서 저도 사읽을까 싶었는데.. 인터뷰서 그런말을 했다니 생각해보아야겠네요.. 흠.

쎈연필 2009-09-30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휴에 서점 가서 훓어보긴 하려구요~^-^

구입하지는 않을 겁니다만 ㅋㅋㅋ

김창영 2009-10-01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원한 필체의 연암 관련 리뷰가 인상적입니다. 시원시원 호방호방 하신 게 이미 연암에 닿으신 듯 하군요 ㅎㅎㅎ
우선 저도 보리판 열하일기 그러니까 리상호의 열하일기 완역을 통해 열하일기와 연암을 다시 한 번 접했습니다. 이후 돌베개에서 신호열과 김명호 공역의 연암집도 읽었구요. 복학 후엔 연암원전을 강독하기도 했습니다. 리뷰 쓰신 분과 같이 제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김혈조의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라는 연암산문선집을 읽으면서 맛있는 글이구나 생각했고, 리상호를 통해서는 연암은 멋있구나 느꼈고, 신호열(돌아가셨습니다) 선생의 글을 통해서는 연암은 깊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정민과 박희병의 글들에서는 태양인(?)박지원의 풍모를 느꼈고요. 강독을 통해서 보니 연암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 거렸습니다. 고미숙의 글은 너무 귀엽고 아기자기한 수준이어서 뭐라 단언키 어렵군요.
고전의 번역에 있어서 오역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것이기에 김혈조의 책에도 분명 오역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다만 출판사측의 마케팅전략인가 아니면 진짜 오역이 많기 때문에 지적을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구해볼 문제이지요. 독자나 역자가 오역을 피해갈 수 없다면 차라리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강단이 양자에게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연암을 포함한 수 없이 많은 고전 번역서에 대한 연구자 혹은 번역자의 지적과 질정이라는 것은 이미 누차례 공식 & 비공식석상에서 현재도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연암관련 논문과 서적들의 오역은 정평있는 번역자라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김혈조에게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연구자로서 또 강단에서 제 또래의(저 아직 학생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또 번역하면서 講磨한 노하우를 이번 완역집을 통해 토해낸 것이겠지요.
그러나 인터뷰에서 말 꼬리 잡듯이 리상호의 번역에 대해서 曰可曰否 하신 것은 분명 인터뷰를 준비한 기자들이나 신문의 편집자들이 오해하신 것일겁니다. 분명 번역자는 리상호의 책 "이 부분은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역자의 심정이 편집을 통해 삭제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말씀 올려보았습니다.
평소 김혈조의 내공이 그런 말을 쉽게 할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변호하고 싶습니다.

쎈연필 2009-10-02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 전공하시나봐요. 해박하시네요~^^
말씀은 김혈조 선생이 했는데, 신문기자들의 곡해나 편집으로 나온 말이라고 해석한다면 안 될 말이죠.
비판이나 지적을, 할 때는 쉽게 하고, 받을 때는 쉽게 못 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럼 정말~ 얘기가 안 되죠. 물론 역자 본인이 아니라 김창영님께서 변호라며 말씀하셨지만요. ^^
저도 새책을 구경도 않은 채로 개인적인 감상찌끼만 늘어놓은 거니까, 긴 논의는 무리인 것 같네요.
창영님의 전공분야에 대한 애정이 아름답습니다.

추석 잘 보내시구요, 간간이 님의 블로그에 놀러가서 공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