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그리고 70명의 또 다른 김연수들
1. 거짓말처럼 문이 열리고
김치볶음밥을 하려고 김치를 송송 썰어 프라이팬에 볶는데 숨이 잘 죽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달궈지지도 않은 프라이팬 위에 기름을 들이붓고 찬 김치를 볶으려했으니, 김치 숨이 잘 죽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17개월 된 딸래미는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허둥지둥대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맘마 줘! 맘마 줘!" 외치는 아이 손에 숟가락과 포크를 쥐어주며 말했다.
"아가야, 엄마는 오늘 저녁에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꼭 나가봐야 한단다."
아이가 혼자 밥을 먹게끔 상을 차려주고, 남편 저녁으로 만든 김치볶음밥을 보기좋게 접시에 담아 랩을 씌워두고 안방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봤다. 질끈묶은 머리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휴, 저 아줌마는 정말 누구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 위로 분을 찍어바르는데, '삑삑삑삑'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왔다. 남편이 왔다. 오늘 밤 나를 외출하게 해 줄 남편이 왔다!
거짓말처럼 문이 열리고, 나는 17개월만에 처음으로, 아이없이 홀로 밤거리로 나왔다.
2. 밤거리는 아름다웠다
얼마만에 맡아보는 밤공기인가. 게다가 겨울비가 추적추적, 언제 눈송이로 바뀔지 모르겠다는 듯 사뿐히 내리고 있는 밤 거리. 나는 오늘 '엄마'가 아닌 '소설가지망생'이 돼 홍대 밤거리로 간다. 동행한 여동생은 뭐가 그렇게 신나냐며 들뜬 내 모습을 신기해했다. 나로선 17개월만에 첫 저녁외출이고, 그 외출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의 북토크이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어떤 목소리, 어떤 눈빛으로 사람들을, 또 나를 바라볼까. 김연수 작가라는 사람이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줄치며 읽고 눈물 흘리던 그 글을 쓴 작가와 한 공간에 앉아 이야기나누고 바라볼 수 있다니, 정말 꿈만같았다.
3. 따듯한 시선
나는 10분쯤 늦었다. 북토크는 이미 시작돼있었다. 헐레벌떡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 앉으니, 새로 들어온 이의 얼굴을 보고싶었던지 김연수 작가가 내쪽을 바라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검은 뿔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조그만 눈에서 따듯한 빛이 나는 것을 봤다. 나의 독자인 당신은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하듯이, 아주 짧은 시선이었지만 부드럽고 따듯했다. 북토크에 늦어 급한 마음으로 달려오고, 이미 행사가 시작된 공연장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느라 조금 위축됐던 마음이 일순간 편안해졌다.
4. 열 개의 구름, 그 중 아홉번 째
행사는 매일경제 김슬기 기자의 사회로 진행됐다. 이번에 재출간된 '스무 살', '사랑이라니, 선영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소설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을 댓글로 질문받았는데, 그 중 주최측에서 추린 10개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 형식으로 공연은 진행됐다. 사람들은 김연수 작가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스무 살 시절이 그리운지, 특별히 기억나는 해가 있는지, 또 제목은 어떻게 정하는지, 글을 쓸 때 구상을 먼저 하고 쓰는지, 어떻게하면 그렇게 다양한 주인공들을 내세울 수 있는지, 늙는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좋은지 등등.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작가의 고향 김천에 관해 묻는 아홉번째 질문이었다. 작가에게 고향이란 어떤 존재인지, 나고 자란 곳의 환경이 글을 쓰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런 것들이 너무 궁금하다는 질문, 자신 또한 김천이 고향이라며 김연수 작가가 동네오빠같다는 애교까지 덧붙인 그 질문.
왜냐하면 그 질문은 바로 내가 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동네오빠란 말에 김연수 작가가 웃었다. 대형스크린에 커다랗게 비친 내 질문을 보며. 그 웃음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김연수 작가는 10년마다 한번씩 정리하는 김천문학사(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한국전쟁 시대 이후 맥이 끊기다시피 했던 ㅋㅋ)에 "드디어, 김천인에 의한, 김천을 배경으로 한 '본격 김천소설'이 나왔다"는 내용이 실렸다는 얘기로 말문을 열며,(김연수 작가의 이런 식의 유머코드가 너무 좋다. 정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사실그대로 말하는 것일 뿐인데, 타이밍이라던가 문장의 배치를 통해 세상에 둘도없는 유머를 만들어내는 그런 천재적인 재미있는 사람) 이렇게 말했다.
"역전 앞 조그만 가게들이 모여있던 그 골목의 풍경들이 글을 쓰는 데에 도움이 됐다. 매일 열심히 일하는 자영업자들의 삶을 보면서, '과장된 꿈을 꾸지 않아야 한다'거나 '절대 빚을 지면 안된다'거나 매일매일 일을 해야한다는 철칙을 배우게 됐는데, 글을 쓰는 태도에 있어서도 그러한 부지런한 자영업자의 삶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라고.
나도 역전 앞 조그만 가게들이 모여있던 그 거리를 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가는데 채 몇분이 걸리지 않던 조그만 거리. 그 거리에서 나온 저 작가가 지금 내 눈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왼쪽으로 기대고 두 발을 (세상에서 둘도 없이 겸손한듯)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무 벅차 행복했다.
5. 서른 살
작가는 늙어감에 대해 관심받고자 하는 욕망으로 부터 자유로워 진다는 점이 좋다고했다. 그리고 20대에는 뭔가 일이 잘 안풀리고 안되는 사람들이 많은 나이라며, 그 20대를 넘어오느라 수고했다고도 말했다. 서른 살이 되면 세상 쓴맛을 조금 더 알게 만큼 강해져있을 거라는 뜻으로, '서른 살'이라는 소설을 쓰게 된다면 칠테면 더 쳐봐라 식의 용감무쌍한 주인공이 나올 것 같다고도 말했다.
질문 하나 하나 경청하고, 관객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던 김연수 작가는 "글 쓰느라 바쁘실텐데 이 자리에 나오는 것이 귀찮으신 것은 아닌지, 이렇게 독자들을 만나고 돌아갈 때에는 어떤 마음으로 돌아가는지"를 묻는 내 동생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뭔가 연결돼 있는 느낌이 든다. 제대로 설명을 못하겠지만,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든다"라고.
몇번이나 '연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이 좋았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9시가 됐다. 나는 엄마가 없으면 잠못들며 투정을 심하게 부리는 딸을 재우기 위해 9시가 되면 집으로 떠나야만 하는 신세였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신데렐라처럼 공연장을 허겁지겁 빠져나왔다. 김연수 작가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사람들은 모두 한 곳, 김연수 작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가는 문을 열려다 말고 나는 공연장을 다시한번 뒤돌아보았다. 그 곳에 김연수 작가가, 그리고 그 작가와 연결된 70명의 또다른 김연수 작가들이 앉아있었다.
지하공연장 검은색 문을 열고 나와 지상으로 올라가기전, 나는 나의 유리구두 한 짝을 거기에 두고 나왔다. 왕자님이 발견해주지 않을지라도, 나의 유리구두는 그 공연장 안에 나 대신 앉아 오래도록 북토크의 여운을 느낄 것이다. 나는 웃으며 지상으로 올라왔다. 차가운 겨울비가 조그만 진눈깨비가 돼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내 딸을 생각하며 지하철 입구를 향해 뛰었다. 마치, 김연수 작가가 아직 쓰지 않은 '서른 살'의 세상풍파에 익숙해진 씩씩하고 용감무쌍한 주인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