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옹알이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더 단단한 말들을 배워오겠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손으로 쓰는 글로는 표현치 못 할 것이 너무 많다. 시詩가 빛나는 자리에 다녀왔으나, 말과 글로 전하기가 어렵다. 차라리 냄새를 움켜 쥐고 있는 게 더 쉽겠다. 그러나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내 손아귀에 냄새가 있어!'라 말하며 손을 펴 보인다면, 냄새는 그자리에 없다. 시詩랑사랑 행사에 다녀온 느낌을 글과 사진으로 정리하는 노릇이 딱 그러하다. 나는 느끼고 맡았고 즐거웠으나, 이제 펼쳐보이는 것은 빈 손 뿐이다. 내가 펼쳐보이는 빈 손 같은 글과 사진이 만약 아름답거나 풍요롭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그저 빈 손에 잠깐 머물렀던 잔향(殘香)만으로도 만족해하는 것이다. 

사랑을 어찌 말로 전할 수 있는가. 추억을 어찌 움켜쥘 수 있겠는가. 내가 느낀 사랑을 당신에게 전한다는 건 애초에 불완전한 그림자로 실체를 미루어 짐작하는 일일 것이다. 시詩랑 사랑. 잔향만이라도 그러모아 전한다.  

 

시랑사랑을 빛낸 사람들 _출연 순서에 따라 소개한다. 

시인 신용목 / 시랑사랑 행사의 사회를 맡아 재치와 짓궂음과 해박한 시 언어로 행사를 매끄럽게 이끌었다.

 

프로젝트 그룹 하와이, 가수 이아립

  

프로젝트 그룹 하와이, 기타리스트 이호석 

 

 

배우 전무송 / 조동범 시인 부친과의 오랜 인연으로 참석해 주셨다.

 

 

배우 정인기 / 드라마 <시크릿 가든> 출연 후 부쩍 알아보는 이가 많아졌다는 배우. 시인 조동범과 막역한 사이

 

시인 이재훈 / '현대시' 편집장인 김안 시인과 '직장 동료'이자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 

 

시인 강성은 / 김안 시인과 '인스턴트' 동인으로 활동을 했었다. 출연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으나 캄캄한 객석의 그녀를 단번에 알아본 사회자 신용목의 청으로 무대에서 김안 시인의 시를 낭독하였다.

 

시인 허수경 / 귀국하여 짧게 머무르는 중 행사장을 깜짝 방문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나는 독일이라는 나라를 질투한다. 독일에는 시인 허수경이 살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훈 / 시인 허수경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허수경의 권유에 행사장에 들렀다. 시인 허수경에 이은 소설가 김훈의 등장에, 옆자리 누군가는 "오늘 행사 대박이야!"라고 외쳤다. 


詩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

 

신용목 시인의 사회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룹 '하와이'가 <어서 와>, <엄마>란 노래를 들려주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었으나, 발로 장단을 맞추고 어깨를 들썩였다. 

 

시집 <카니발>의 조동범 시인. 그의 뒤로 '시랑사랑'이란 글귀가,  

  

사회자 신용목 시인의 등 뒤로 '詩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라는 문구가 보인다. 

 

조동범 시인은 시집 <카니발>에 실린 시 중 <소년소녀합창단>을 낭독했다.  

 

조동범 시인 아버님과의 인연으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큰 배우 전무송 선생님께서 자리에 함께하셨다. 시집 <카니발> 중 직접 골라오신 시 <접경>을 낭독하셨다. 시랑사랑 행사는 산울림 소극장에서 열렸는데, 이곳은 '배우 전무송'에게 무척 뜻깊은 곳이다. 산울림 소극장을 얘기할 때 전무송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 관객과 호흡하던 무대에서 배우 전무송은 독자와 호흡을 나누었다. 낮고 굵으며 관록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시를 낭독할 때, 듣는 이들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배우 전무송은 친구의 아들 '조동범'이 어릴 적부터 지켜봐왔다고 한다. '어린이 조동범'이 아버지를 따라 극단에 자주 놀러왔기에, 조동범이 시인이 아니라 배우가 될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이날 시인 조동범의 어린 아들도 아빠의 시집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산울림 소극장을 찾았다. 객석에서 "아빠, 아빠!"하고 부르는 모습과 음성이 무척 귀여웠다. 공연장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소음이지만, 객석에서 튀어나오는 아이의 "아빠!"라는 외침은 사랑스러운 음악에 가까웠다. 시인 조동범은 멋쩍게 웃으며 "아, 이렇게 해서 제가 유부남인게 탄로나네요!"라 말하며 웃었다.

시인 조동범은 아버지를 따라 '아빠 친구'인 '배우 전무송'을 보러 오곤 했고, 배우 전무송은 '친구 아들'의 시집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무대에 섰으며, 시인 조동범의 어린 아들은 '시인 아빠'와 '할아버지의 배우 친구'를 보기 위해 산울림 소극장을 찾은 것이다. 3대에 걸친 인연이 새삼 아름답다.   

 

시라는 건 자본이라는 단어와 대척점에 서있는 말이다. 시를 쥐어짜도 돈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순결한 말들의 조합이다. 시인들은 말을 붙여나가지 않고 오히려 쳐낸다. 이 빠진 행에 넣어 시라는 집을 건축할 마땅한 단어를 찾기 위해, 한 장의 벽돌과 같은 말을 찾기 위해 시인은 여러 말들을 굴리고 더듬고 만들어낸다. 시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음과 모음이라도 쳐낼 준비가 된 게 시인들이다. 자본을 그리워하고 가까이 다가가고자 할지라도,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게 시와 아이의 웃음이다. '시인 아빠'를 부르는 아이의 웃음과 난데없는 부름이 유달리 듣기 좋았다.

 

배우 전무송은 자신이 골라 낭독한 시 <접경>을 이야기하며, 젊은 시인이 전쟁을 겪은 자신들의 세월을 시로 살려낸 것에 대해 고마움과 놀라움을 표현했다.

 

전쟁이나 과거는 역사 속에서 풍화된다 하더라도, 시인의 시에 담긴 것들은 바스러지지 않고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시인 조동범의 시집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소극장을 찾은 두 번째 손님.

단편과 장편을 합해 무려 78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고, 단편영화계에서는 '그가 출연한 영화는 상을 받는다'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이다. 배우 정인기. 귀에 익은 이름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여주인공 '길라임'의 아버지라고 말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소방관역을 맡은 그의 호소력 있는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시청자들은 그의 '음성'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고아가 된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애끓는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나던 그의 음성. 목소리가 몸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목소리 자체가 마치 살아있고 독립된 인격체로 '연기를 한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행사 전 잠깐 마주쳤었는데, 나는 그를 몰라보았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 속 배우 정인기는 털털한 아저씨이자 딸바보 아빠로, 생사를 가르는 화재 현장을 누비는 소방관으로 등장하였기에 연배가 더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산울림 소극장 객석 사이에서 마주친 그는 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온 터라 양복 차림이었고, 콧대는 우뚝하였으며 선이 굵고 인상이 강했다. 드라마 속 배우 정인기는 죽어서까지도 딸을 걱정하는 지극한 부성애의 상징이었기에 푸근한 아버지, 기댈 수 있는 '어른'을 상상했었다. 실제의 그는 배역의 그와 달리 훤칠한 젊은이로까지 느껴졌다.

 

배우 정인기는 대학 시절부터 시인 조동범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만취하여 쓰러진 시인 조동범을 데리고 조동범의 집에 들어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는데, 하필 시인의 어머니께서 다음 날 아침 김밥을 말아주셨다며 웃음을 지었다. 해장을 위한 따뜻한 국물 하나 없이 마른 목으로 김밥을 삼켰을 생각을 하니 내 목이 다 메어온다. 배우 정인기와 함께 시인 조동범의 아버님도 이날 함께하였는데, 정인기는 '김밥 사건'을 얘기하며 객석의 아버님께 안부를 여쭈었다.

배우 전무송, 정인기. 두 명의 색깔있는 배우가 시인 조동범의 시를 낭독하였는데, 배우 정인기는 이렇듯 극장에서 시를 낭송하는 것도 새롭고 뜻깊은 일이거니와, 서울예전에서 스승으로 모셨던 배우 전무송과 나란히 앉아 한 무대에서 시를 낭송하는 것이 영광이라고 말하였다.

  

배우 정인기는 조동범 시인의 시 <포레스트 검프처럼>을 낭송했다. 낭독을 위해 이 시를 고른 이유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 때문이라 한다. 본인의 추억에 덧해 낭독하는 시는 그의 멋진 음성과 함께 빛이 났다. 연기는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정인기의 목소리는 굳이 몸을 뒤집어 쓰지 않아도 음성 하나로 연기이다.

 

시인 조동범은 배우 정인기가 눈물이 많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라 소개했다. 예전에 극단으로 그를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흔히 '코믹 영화'로 알고 있는 한 영화를 보고 있던 정인기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자꾸 자기 눈치를 보더란다. 결국 그는 밖으로 달려나가 울었다고 한다. 배우 전무송은 정인기를 일컬어 '(연기로)일을 낼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배우 정인기는 대학 시절에 시인 조동범을 처음 봤을 때 벤치에 앉은 그가 꼭 '존 레논'처럼 보였다고 했다. 지금과 달리 동그란 안경을 쓴 채 우수어린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딱 존 레논 같았다고. 시인 조동범은 웃으며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살이 안 쪘을 때."라 말했다.

 

배우 전무송, 정인기가 퇴장하고, 뒤이어 시인 김안이 무대에 올랐다. 김안의 시집 <오빠생각>을 보면 <바다를 건너는 코끼리> -유미에게, 라는 시가 있다. 교제하는 여인을 향한 시가 되겠다. 마침 객석에는 '유미'씨가 와 있었다. 시인 신용목은 짓궂은 표정으로 묻는다. 여자 친구의 이름을 시로 불렀으니, 이제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활자로 박아넣은 여인의 이름과 여인에게 바치는 시는 시인의 청혼과도 같지 않은가. 시인 신용목은 시인이 결혼하기가 쉽지 않은데 김안 시인이 마치 구원을 받은 양 말해서 김안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김안의 첫 시집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직장동료'이자 선배 시인인 이재훈이 김안의 시 <북극의 연인들>을 낭독했다. 둘은 나란히 <현대시>로 등단했으며, 현재 현대시에서 일하고 있다. 김안은 스스로를 가리켜 수줍음이 많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게 낯설다고 했는데, 자신이 초대한 사람 - 시인 이재훈 - 은 자기보다 수줍음을 '조금' 덜 타는 사람이라 소개했다.

사회인 김안과 이재훈은 일 때문에 하루 종일 같은 사무실에 있어도 별로 말을 나눌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저 "형, 책 들어왔어요."라거나 "전화왔어요."정도. 시인 김안과 이재훈은 안경을 쓴 모습이나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했는데, 실제로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을 때 둘의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사회를 맡은 신용목은 이런 대목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고 독촉하는 전화를 걸 때 '아니, 선생님, 도대체 원고는 언제 주실 거예요?'라 독촉한 다음 '저는 이재훈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거 아니냐"며 농을 걸었다. 둘은 함께한 세월이 적잖아서 눈빛만 봐도 통한다고 하는데, 사무실에서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지만 퇴근한 후 술집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다시 또 놓치지 않는 신용목. 객석을 향해 외친다. "유미 씨, 둘이 하루 종일 붙어 있는데 일 끝나고 또 둘이서 술을 마신대요!" 

 

김안 시인의 첫 시집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객석에 앉았다가 깜짝 게스트로 소개된 시인 강성은. 사회자 신용목은 순발력을 발휘해 강성은을 무대로 불러들여 시 낭독을 부탁했다. 예고 없이 불러내어 낭독을 시키면 어떡하느냐고, 미리 알았으면 시를 뽑아올 걸, 김안의 시는 19금 표현이 많아 어떤 시를 낭독해야할 지 고민된다며 난감해했다. 이 때 누군가의 낭독 요청이 있었다. 자리에 함께한 문학평론가 신형철이었다. 신형철은 김안 시인의 시 <거의 모든 아침>의 낭독을 부탁했다. 다행히 낯부끄러운 표현이 없는 시다. 신용목은 밝게 웃으며 '이 자리에 조동범 시인의 어린 아들이 있는 관계로' 낭독 시 선정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성은 시인에 이어, 모두가 깜짝 놀랄 게스트가 출연했다. 시인 신용목은 자신이 시를 공부하던 어릴 적부터 이 사람의 시를 동경해왔다고 말했다. 다른 설명 필요 없이, 신용목은 시 두 편을 연달아 암송했다. 계속 놔두었으면, 시간이 허락되었다면, 아마도 또 다른 시를 계속 읊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인 허수경. 독일에 머무는 그녀는 최근에 잠시 귀국했단다. 그녀가 등장한다는 얘기에 객석이 술렁이며 낮은 탄성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그녀 역시 지난 1월 말, 10여년 만에 잠시 귀국하여 산울림 소극장에서 자신의 시를 낭독했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가 '젊은 시인들을 무조건 응원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사실 난 행사 시작 전 산울림 소극장 1층 카페에서 시인 허수경과 소설가 김훈이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지, 들어가서 인사를 드리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고요를 깨기 싫었고, 대화를 멈추게 하기 싫었고, 괜히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그랬다. 어느 여인이 모처럼 쉬는 주말 아침, 부스스한 머리꼴에 화장 안 한 민낯으로 3일만 다니고 더는 나가지 않은 스포츠센터의 로고가 선명한 가방에 속옷이며 샴푸며 챙겨 들고 동네 목욕탕으로 가다가, 먼 발치에서 2년 전쯤 헤어진 옛 연인을 만난 기분이었달까. 가방 속 속옷이 보일리가 없는데도 대로변에 속옷과 수건 등속을 쏟아버린 것마냥 괜히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이 들었달까.

어떤 때 나는 어떤 사람을 보며 '내 눈으로 보았으니 되었다. 건강한 모습을 보았으니 되었다.'라 생각하며 그저 뒤돌아설 때가 있다. 아름다운 추억에 비해 내 자신이 추하고 더럽다고 느껴질 때 그렇다. 그런 후에는 옛 연인을 피한 후 목욕탕에 들어가 이태리 타월로 몸을 밀며, 샴푸 탓을 하며 괜히 눈물을 흘린다고나 할까. "머리 감는 샴푸라면 먹어도 괜찮아야지, 이놈의 것은 왜 이리 눈이 매워?" 뭐 그딴 소릴 중얼거리며. 드러내지 못하고 가슴에 품은 게 몇 된다. 

 

 

허수경은 김안 시인의 시 말고 '시인의 말'을 읽었다. 전문 옮겨본다.

더디게 말의 관절을 맞춰왔습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차라리 사람이 아닌 것이 되고 싶었던 시절의 흔적들입니다.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담배를 덜 피웠을 것이고 술도 덜 마셨을 것이고 돈은 조금 더 많이 벌었을 겁니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새롭게 느끼게 되는 감정들이 있습니다.

첫 시집을 내며 허허롭다는 감정을 배웠습니다.
읽고 쓰면서 인생을 버려가는 법만 배울까 두려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마저 즐거웠던 적이 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이름을 지어준 나의 연인과 몇 명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좋은 시인이 되는 것은 좋은 아들이 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기에,
늙어가는 부모님께, 죄송한 시집입니다. _2011년 9월 김안
 

참고로 시인 김안의 본명은 '김명인'이다. 김안이 2004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하였을 때, 이미 삼십여 년 전에 앞서 등단한 '시인 김명인'이 있었기에 필명을 쓰기로 하였단다. 앞서 소개한 '유미 씨'가 '안'이란 이름을 주었고,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시인으로서의 이름을 지어준 나의 연인'을 언급했다. 사랑이 시를 주기도 하였겠으나, 그 사랑이 실제 이름을 주기도 한 것이다. 

  

계속되는 깜짝 게스트에 청중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빈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행사 관계자들이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만들기 바빴다.   

 

 

시인 허수경에 이어 소설가 김훈이 무대에 섰다. 그는 허수경과의 저녁 식사 후, "젊은 시인들의 행사가 있는데 같이 가자"는 허수경을 따라 행사장을 찾았다고 밝혔다. 소설 <내 젊은 날의 숲> 집필 관련하여, 수목원 취재와 유해발굴단 작업에 함께했었는데, 피아 구별 없이 흩어져 쌓인 유골들을 발굴했을 때의 기억을 전했다. 그러면서 배우 전무송이 낭독한 시 <접경>을 일컬어 '젊은 시인이 그와 같은 내용을 시로 썼다는 것에 대해 깜짝 놀랐다.'라 말했다.

소설가 김훈은 시인 허수경과 얽힌 이야기를 잠깐 풀었다. 오래 전, 김훈은 지인들과 함께 광화문에서 술을 마시다가 취기에 독일의 허수경에게 국제전화를 걸어서 "야, 어디냐? 우리 광화문에서 술 마시고 있으니까 택시 타고 얼른 와!"라고 말해서 허수경을 눈물 짓게 했단다. 

세월이다. 기억이다. 이런 추억은 이것대로 또 아름답다.

 

 

낭독과 낭독이 이어지는 시간. 두 시간여의 행사가 끝났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모두의 표정에서 포만감이 읽혔다. 조동범과 김안은 책상을 나란히 하고 사인을 했다.

 

 

사인을 받기 위해 늘어선 긴 줄에, 소설가 김훈도 섰다. 어느 독자가 "먼저 (사인)받으시죠."라 말했음에도 김훈은 그저 "아니에요."라 말하며 사양했다.

 

독자들은 메모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건넸다. 시인들은 메모를 보고 책에 독자의 이름을 옮겨 적으며 사인을 했다. 김훈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소설 쓰는 김훈입니다."라고 말했다.

김훈은 조동범의 사인을 받은 후 옆자리의 김안에게 사인을 받았다. 

 

그의 백발이 조명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인다. 눈빛은 형형하다.

* 함께 찍힌 분께 사진 공개에 대한 양해를 구하지 않았기에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

 



무대가 무대이기 위해서는 객석이 있어야 한다. 관객이 있어야 한다.

  

세상엔 詩가 있고, 시인이 있다.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들'이 있다. 나도 그 '들'에다가 머리를 들이밀어,
머릿수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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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 2011-12-07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추천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