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만남이 있는 장소에 갈 때 까지 내 마음은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고한 정신을 지닌 작가를 만난다는 것에,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볼 기회를 갖는 것보다 훨씬 더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은 온몸의 떨림으로 퍼져나갔다.
길치였던 내가 광화문 주변을 30분을 빙빙 돌아서 도착한 그곳에는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곳을 찾느라 너무 힘들었다는 하소연에 웃으며 따뜻한 차를 건네주신 연구원분들 :) 그분들 덕분에 떨리던 심장이 조금은 평온하게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테이블 앞쪽에 자리하고 앉아 떡과 달콤한 차(후이차였던가요;)로 몸을 녹이며 박노해 시인의 시를 읽다가, 어느덧 시간이 다 되어 시인께서 들어오시고, 곧 참석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인사를 하셨다. 그렇게 그 분을 마주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 있던 '박노해'라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튕겨져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분의 약력, 그분의 시 속에서의 그 형형한 열정, 그리고 혁명을 외치던 그분의 모습은 강하고, 조금은 완고하며, 그리고 불타오르는 열기가 주변엘 에워싸고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직접 가서 뵌 그분의 첫 인상은 평온하며, 조금은 수줍은 모습의' 따스한 공기'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한대 텅-하고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홀로 무엇을 상상했던가-
박시인님과의 대화 전, 박시인님이 추천하는 음악과 함께하는 명상(?)시간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저항시인, 다르위시의 시와, 그리고 그 다르위시의 시를 음악으로 만든[!] 작곡가(이름이 기억이 안나요ㅠㅠ)의 음악을 들으며, 펄떡이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의 시를 그저 눈으로 좇다가 마지막, '우리는 희망이라는 불치의 병이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호흡이 멈춰버리는 기분이었다. 희망을 불치병으로 표현한 그의 한마디에서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 모든 팔레스타인들의 저항과, 모든 불합리하게 억압받는 소수자의 저항과, 모든 고통받는 자들의 저항이 느껴지는 한마디에 잠시 할 말을 잃었었다.
곧 대화는 시작되었다. 어떻게 보면 참 우스을 수 있는 가벼운 질문부터, 정말 깊이있는 질문이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튀어나왔고, 박시인께서는 하나하나 깊은 정성을 담아 대답해주셨다. 감옥이 시인께 어떤 의미를 주었느냐는 질문에,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그 물리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자라는 생각을 했던 곳이라는 말씀을 하셨고,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실패 해야 헛된것을 버릴 수있다, 완벽하면 오히려 당신이 할 것이 없지 않느냐라고 대답하셨으며, 대학을 들어와 각종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학생에게 트랙을 벗어나 초원으로 향할 것을,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세계의 연대화를 말씀하셨으며,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예술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노동의 붓질, 이것이 예술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슈퍼스타K2의 우승자 허각을 언급하시며, 허각의 예술이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환풍기 청소 후 술한잔 하며 애환을 달래던 노래, 사랑하던 애인만을 위해 불러준 노래가 바로 예술이다,라고 하셨으며, 또 그 예로 가장 전성기 시절 축구의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은퇴를 감행했던 나카타 선수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깊은 울림이었고, 또 한편의 시였다. 때로는 우리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시고, 또 가끔은 전류가 심장을 관통하는 것처럼 찌릿하게 하시며 우리들을 감동에 전율케했다.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끝난 후, 시인께서는 마지막으로 이 10년만에 펴낸 시들 중에서 시 한편을 직접 읽어주셨다. '그대 그러니 사라지지 말아라' 안데스의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께로족 청년이 든 희미한 불빛 하나를 발견하듯, 희망이 아주 어렴풋하게라도, 존재한다면, 포기하지 말라고. 그분은 그렇게 마지막 말을 마치셨다.
너무나 아쉬운 시간이었다, 너무 물어볼 것도 많았고, 듣고 싶은것도 많았지만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엷게 타들어가고 있던 불빛 하나가 조금 더 단단하게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다시 만나도 시간이 아쉬울 분. 어두운 하늘 속 구름을 열고 희미한 불빛 하나를 비춰주신 분. 그분을 또 뵙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