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구연동화를 본 일이 있다. 구연동화의 핵심은 역시 맛깔나게 목소리를 내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과 환희를 맛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구연동화의 내용은 전래동화부터 시작해서 서구에서 들어온 여러 이야기들이다. 내용은 누구든지 한 번 쯤은 들어보아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 누구든지 아는 이야기, 뻔한 이야기를 재밌게 살리는 것이 이야기 꾼의 진면목이다. '계몽영화'는 훌륭한 이야기 꾼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철처하게 친일을 했으며, 개발독재시대에는 군부와 독재 정권에 의지하다, 이제는 미국에 의지하는 대한민국의 유산계급층에 대한 이야기. 계몽영화에 무엇이 나오느냐하고 묻는다고 앞 문장을 이야기 해줄 것이다. 그러면 분명 아무도 안 볼 것이다. 뻔한 이야기니까.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 무엇이 나오냐고 다시 묻는다면, '보고 이야기 하자'고 말할 것이다.  

시사회를 보고 와서일까 결말이나 소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삼가겠다. 그러나 강렬하게 느낀 점은 말하겠다. 이 영화는 좀 사는 집안 출신의 사람들이 보면 집중을 하면서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의 현재 이야기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딱 집어 이야기한다면, 작은 구멍가게 수준의(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기업을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사위가 하고 있는 집안 사람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일본어에 능숙했으면서, 빨갱이 잡자는 말에 능숙했으면, 영어에 능숙한 사람들. 사실 이 영화는 대한민국의 유산계급들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의 교집합을 묘사하고 있다. 유산계급 집안 출신 사람이라면 공감하는 내용이 많다.  

몇가지 인상깊었던 장면들.  

1. 태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선 장면: 그들의 행동과 대사가 유희적으로 표현되었을 지 모르겠지만, 대화의 내용과 양태가 실제 당시를 묘사한 것이라면 문화의 변화, 생활양식의 변화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깨달을 수 있다. 

2. 태선이가 기러기 남편과 떨어져 바람 핌을 암시하는 장면(참고로 이 영화는 19세는 아니다): 태선은 아이 교육 문제로 외국에 떨어져서 지낸다. 남편도 아내의 외도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남편은 자살기도하고(이 장면을 아이가 보고) 결국 남편은 죽지 못하고. 불편한 관계의 지속. 영화는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3. 태선의 어릴 적 장면과 현재의 장면을 겹쳐보여주는 장면: 서교동 집이 기억 속에서 결코 잊혀질 수 없다는 사실. 100년밖에 안 되는 시간 내에 3번의 큰 변혁기에 3대가 살아온 역경을 가장 잘 보여준다. 친일했던 할아버지를 부정하고, 독재권력에 뇌물과 아첨으로 부를 축적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만, 그도 역시 4대가 되는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또한 밖으로 돌아다니고 아버지가 맺어준 듯 보이는 남편을 제끼고 정말 자기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하지만 태어나고 자란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뿌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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