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 선생은 한국사에 있어서 2010년의 의미에 대한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경술국치가 올 해로부터 딱 100년 전이고, 6.25 전쟁이 60년이다. 4.19 혁명 50주년이오, 5.18 항쟁 30주년, 6.15 선언 10주년이다. 격랑의 한국 현대사에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올 해 기념일을 맞았다. 즉, 우리는 2010년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그 흐름을 대표하는 사건들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보고 어떤 미래를 창조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서중석 선생은 지난 100년의 현대사를 제국과 전쟁의 시대에서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평화의 시대로의 흐름으로 정리하였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는가?’라는 강연 제목의 답인 셈이다. 하지만 실제 강의는 부제인 ‘'21세기 부활을 꿈꾸는 수구냉전세력 : 합리적 보수의 출현을 기대하며‘에 맞춰졌다. 지금까지 민중이 세우고자 했던 나라인 민주주의와 평화의 나라를 가로 막아온 것이 수구냉전세력이었다. 하지만 결국 역사에 역행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민중들의 나아가고자 하는 힘을 막아낼 수 없었다. 민주주의는 진전되었고, 평화는 확고해졌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된 것으로 보였다. 서 선생은 2007년 출간된 『대한민국 선거이야기』에서 이제는 보수세력이 다시 집권한다고 해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고 보았고, 합리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의 경쟁이 시작되기를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집권한지 반년도 안 되어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면서 6.10 항쟁 이후 최대규모의 전 국민적 저항을 초래했다. 방송의 공공성을 훼손할 수도 있는 미디어법을 통과시켰고,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사법적 대응을 일삼았다. 심지어 천안함 사태에서는 ‘전쟁불사’를 운운하며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거기에 뉴라이트는 근, 현대사 교과서를 만들어 민주주의와 평화가 꽃 피운 역사를 지우고, 수구냉전세력의 복귀를 선진화로 미화했다.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억압했던 수구냉전세력은 죽지도 않고 또 돌아온 것이다. 서 선생은 자신이 참 멍텅구리 같았다고 자조하며 수구냉전세력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것에 대해 반성하며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우리의 주의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킬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강의가 수구냉전세력의 역사와 그들이 한국사에 미친 (악)영향에 대한 이야기가 된 것이다. 서 선생은 민중은 전문적이거나, 추상적인 사유를 가지고 나라를 생각하지 않았다며 쉬운 얘기, 사례 중심으로 강의를 했다. 


2010년 지방선거 정국에서 극우-수구냉전세력들은 ‘전쟁불사론’을 외치며 전쟁 위기를 고조시켰다. 현대사 연구자인 서 선생의 입장에서 이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역대 선거에서 집권당이 남북갈등을 부추기면 무조건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남북갈등을 부추기는 것뿐만 아니라 각종의 조작사건들도 만들어 냈다. 선거 전에는 남북갈등을 부추기고, 선거 후에는 위협적인 정치적 경쟁자들을 조작 사건으로 엮어 탄압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했던 3대 선거 중 56년 정부통령 선거, 71년 대통령 선거 2번 모두에서 조작 사건이 있었다. 


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의 3자 구도로 치러졌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치는 신익희 앞에서 이승만은 상당히 고전했다. 그러던 중 신익희가 병사했고, 결국 조봉암은 진보정당 후보로는 이례적으로 26%의 득표율을 올렸다. 조봉암은 당시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와 평화통일론을 내세웠다. 전자는 당시 아무도 얘기하지 못하였던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민중들을 위한 정치를 내세웠고, 후자는 평화만이 살 길이라며 지금까지의 북진통일론에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수구냉전 세력들은 평화와 민주주의가 있으면 살 수 없는 세력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자신들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조봉암을 국가보안법 혐의로 체포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봉암의 법살은 김구, 여운형 암살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예정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이승만의 반공규율 사회에 도전하려 했던 조봉암은 진정 위대한 정치가였다. 


48년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지 두 달만에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정권 수립 초기 불안정한 국면에서 마땅히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되려 사건을 과장하여 불안감을 조성했다. 윤치영 국무장관은 8만 여명의 사형 명단을 제시하고, 2차 숙청 대상은 국회의원 등이라며 공포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정권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다. 강원도에는 무장공비들이 430여명이나 침투했다고 과장하기도 했다. 또한 아직 미국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사건 2일 만에 사건의 배후에는 김구가 있다며 확정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김구는 여순 사건 8개월 후 암살당하게 된다. 

경찰 요직에 친일파를 임명하는 등 전적으로 친일파들의 도움으로 정권을 건설한 이승만 정권은 정권의 정당성이 없었다. 따라서 무조건 반공과 북진통일만을 내세우며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반대자들을 탄압했던 것이다. 좌우합작을 주도했던 여운형, 남북협상을 주장했던 김구, 평화통일을 주장한 조봉암은 정권의 존립에 위협을 가져오는 이들로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구냉전세력의 역사는 박정희 군사독재 시대에도 계속된다.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김영삼과의 경선에서 승리하여 71년 대선 후보로 확정된 김대중은 평화통일, 대중경제론을 들고 나온다. 집권계획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는 4월 26일 울먹이며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라며 마지막으로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한다. 그리고 71년 대통령 선거는 정말 마지막 선거가 되었다. 간신히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72년 비상조치를 발동하고 73년 유신을 선포하였다. 김대중은 납치되어서 물귀신이 될 뻔 했으며, 살아 돌아와서도 가택연금 되었다. 수구냉전세력은 이렇게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며 납치, 조작사건을 일삼았다. 


수구냉전세력의 반공규율 사회의 야만성을 잘 드러내주는 에피소드가 1983년 KBS에서 138일 453시간이라는 역대 최장 생방송 기록을 새운 KBS의 남남 이산가족 찾아주기 프로그램이다. 이산가족은 크게 월남 이산가족과 남남 이산가족이 있다. 월남 이산가족은 전전에 지주 부르주아들이 토지 개혁으로 남쪽으로 쫓겨났거나, 전쟁 중 50년 10~12월 사이에 중공군이 내려오자 잠시의 이별이 될 줄 알고 남쪽으로 피신한 사람들이다. 남남 이산가족은 전쟁 중 피난 중에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춘천이 5번이나 남, 북이 뒤바뀌는 듯 극심하게 위, 아래로 밀어붙이고, 밀리는 ‘톱질전쟁’이었기 때문에, 피난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부모의 손을 놓친 아이는 다시는 부모를 만날 수 없었고, 결국 전쟁 고아가 수만~십 수만이나 되었다. 이들 남남 이산가족들은 5~60년 대에 이미 찾아줬어야 했지만, 남남 이산가족들의 상봉은 남북 이산가족들의 상봉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었고, 한반도의 긴장이 약화되는 걸 두려워했던 정부는 1980년대 까지 이산가족을 찾아주지 않았다. 64년 동경 올림픽에서 북쪽 대표로 참가한 신금단과 전쟁 중 월남한 신금단의 아버지가 일본에서 최초로 이산가족 상봉을 하고, 야당들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주장했으나 이 역시 묵살당했다. 이 얼마나 잔인한 정권인가! 1983년에야 남남 이산가족들이 만났지만 이미 30년 동안 떨어져 살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성일이 주연한 ‘길소뜸’이 다시 만났지만, 행복해질 자신이 없어서 돌아서는 가족들의 아픔을 잘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수구냉전세력 - 친일파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정리해보자. 일제 시절에 친일 행위를 했다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건준을 이끌었던 여운형도 친일파를 새 나라 건설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친일파들이 나쁜 건 해방 이후 그들의 행위 떄문이다. 그들은 권력과 손잡고 수구냉전질서를 만들어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질서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결국 그들은 정권과 결탁해 수구냉전세력이 되었고, 한국 현대사에 안 좋은 영향을 남겼는데, 그건 이하 5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① 민주주의 억압 - 그들은 자유와 평화를 억압하고 민중억압적 파쇼 정책을 썼다.
② 반통일 - 그들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며 반통일적 정책을 추구했다.
③ 사대주의 - 그들에게 강자에게 붙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일제에서 미국으로 숭배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④ 부정부패 - 정치와 경제는 결탁해 투기를 일삼는 등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⑤ 기회주의적 가치관 - 50년대 한 언론인은 8.15 광복절 행사에 친일파들이 죄다 간부석에 앉아 있는 걸 보고 비통해했다. 환경에 따라 친구를 배신하고, 강자에게 굴종하지 못하는 놈은 바보가 되었다. 


하지만 서중석 선생은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수구냉전세력이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6.2 선거를 보고 희망을 되찾은 것이다. 5~60년대 감자만 먹고 자라서 멍청하게 여당만 찍는다고 비난 받았던 강원도지사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당당히 당선되는 등, 6.2 지방선거는 천안함 사건을 과장해 전쟁위협을 하며 국민들을 협박한 수구냉전세력의 낡은 수작이 통하지 않음을 입증한 선거였다. 예전부터 선거는 민주주의와 평화의 진전에 큰 기여를 하였는데, 56년 정부통령 선거는, 3.15 부정선거에 민중들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계기가 되었고, 신민당과 통일당이 공화당 보다 8.1% 더 많은 득표를 한 78총선은 이듬해 부마항쟁을 낳았고, 부마항쟁은 박정희 시대의 심장을 겨눈 김재규의 결단을 낳았다. 저들이 아무리 조작과 억압, 철권통치를 일삼아도, 민중들은 선거라는 민중의 무기를 통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일궈낼 수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 -> 1950년 6.25 전쟁 -> 1960년 4.19 혁명 -> 1980년 5.18 광주항쟁 ->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의 흐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시대는 더디긴 해도 자유, 평등, 평화, 민주주의, 남북통일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수구냉정세력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계속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는 아직 불분명 하다. 올 해 기념일을 맞은 역사적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재평가하면서 미래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할 때라는 요지의 말로 1시간 30분가량 진행되었던 강연은 끝맺음 하였다. 


한나라당도 민주화 세력이 한 분파를 이루고 있는 등 형식적으로 수구냉전세력은 현실에서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남북갈등은 더이상 용인될 수 없고, 민중을 억압하는 정권은 저항을 받게 돼있다. 하지만 수구냉전세력이 사라졌어도, 그들이 현대사에 남긴 흔적은 우리 몸에도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힘의 우열은 바뀌었지만 여전한 재벌과 국가기관들의 결탁, 기회주의적 가치관, 경제성장이 모든 다른 비도덕들을 덮을 수 있다는 가치관, 옳은 걸 옳다고 말하지 못하고 상명하복하는 것 등등은 우리 안에 살아있는 수구냉전세력이다. 수구냉전헤게모니를 청산하는 건 단순히 한나라당을 정치의 영역에서 심판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우리 몸에 각인 된 나머지 정치적 반대자들끼리도 공유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게임의 룰을 바꾸는 데에 까지 나아가야 한다. 서중석 교수의 강연과 저서들은 우리 안의 수구냉전세력을 비춰볼 수 있는 소중한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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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2010-07-27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석을 했기에 한 번 써 보려고 했는데. 이 글 읽고 포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