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처음 만난 건 여행의 기록을 담은 <끌림>에서였다. 여행자가 되어, 정보를 구하기에는 무용하지만 ‘떠나게 만드는’ 책을 쓰고 싶었던 나는, 책을 읽고 시인이 몹시 부러웠다.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두었다가 어느 날 쭉 찢어 접어 넣고 마침내 떠나게 하는 책. 가보았기에 알겠거나 가보지 않았는데 알 것 같은 시인의 공간들이 그리웠다. 떠나고 싶었다. 거기가 그리웠다. 어쩐지 빼앗긴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할 수 없었다는 애초의 체념까지 밀려와서 마음이 지글거렸다.
작년 2월, 대학 때 따르던 후배가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부쳐줬다. 서점에서 서너 번은, 시집의 반 정도는 이미 읽었지만 그뿐이었고. 후배의 고운 편지와 함께 마침내 읽게 된 시집. 읽고 나서 나는 또다시 마음이 지글거렸다. 가보았기에 알겠거나 가보지 않았는데 알 것 같은 그 공간들이 거기에도 있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 형제 친구 없는 오후마다 걷고 걸으며, 시와도 같았던 생각들을 뭉쳤다 풀었다, 버렸다 남겼다 했던 시장 거리. 때마침 얻게 된 50년대 산 목측식 카메라를 들고 '거기' 시장에 갔다. 걷고 걸어도 그때처럼 막연하지 않았고, 애가 탔다. 이제는 한 가닥 입증이 필요한 나는, 사진을 찍었다.
시장 거리 _이병률
그는 눈을 가늘게 살살 뜨고 여기 시장 거리에 사는 일년 동안은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정말 많았어요, 하고 누긋하게 말하지만 내겐 그런 곳이 없다는 것
괜히 그 말에 눈가에 핑그르르 핏물이 돌았으나 나를 휘감은 건 그 도저한 감정 둘이 한자리에 고이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
나도 사년을 시장 거리에 몸 기대고 산 적 있으나 기쁘지 않았으며 단지 조금 휘청였을 뿐
순댓국 한 그릇씩을 비우는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각자 잊었는지 소주병은 따지도 않은 채 물리고 떡집 지나 닭집 지나 반찬가게를 지나 시장 거리를 빠져나오는 길
트럭에서 막 부러져 번거로이 아우성을 떠는 가물치떼 미꾸라지떼
그래도 더 번거로운 일은 박하게도 흐벅지게도 살아야하는 일, 쓸쓸한 일
이런 이야기를 갖고 나는 시인의 새 시집 <찬란> 출간 기념 낭독회에 갔다.
시도 시 낭독도 새로운 스물한 살 앳된 후배와 함께. 새 시집과 같은 이름의 시 찬란, 하나만 주워 읽고 갔다. 김근 시인과 김민정 시인이 함께 하는 시낭독회는 경건하되 굳어있지 않았다. 경이가 있었고 친밀함이 있었다. 시는 애초에 노래였으므로 읊는 것이 좋았다. 오랜만에 그것을 누릴 수 있어서 좋았다. 시는 애초에 이야기였으므로 떠드는 편이 맞았다. 오랜만에 그렇게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누가 어떻게 읊느냐에 따라, 거기에 무슨 이야기가 있느냐에 따라 시는 달라지게 되어있었다. 시는 죽어 박제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 옮겨다녔다.
Q&A가 진행되자 동생은 귀엣말로 나의 질문은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혹시 우리 동네에서 살았었냐고, 그렇게 속닥이고 함께 웃었을 때. 시인은 선뜻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그것이 반가웠다. 역시 그곳에 함께 있었구나. 아니라도 괜찮겠지만 그렇다고 하니 ‘거기’에 대한 나의 그리움에 정처가 생겼다.
다 찬란이다, 라고 시인은 썼다. 여행지에서 시장 거리에서 삶의 곳곳에서 찬란을 볼 때마다 자기를 ‘둘 데 없었던’ 시인은 ‘다’ ‘무시무시한’ ‘찬란’이라고 썼다. 한 사진작가의 멕시코에 있는 정신병원 남자병동을 찍은 사진이 생각난다. 흥건하게 오줌이 고인 바닥 위에 맨발로 서있거나 앉아있는 사람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오줌 웅덩이를 비춘다. 고통스런 것인데 어쩐지 그것은... '찬란'하다.
조금 일찍 쓰련다. 찬란했다고. 시인은 시집 <찬란>의 자서에 이렇게 썼다. ‘미리’ 그것을 써버린 시인이 다음에 무엇을 쓰게 될까. 미리 그리워지는 낭독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