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인이 된 이후로 가장 선호하는 연극 연출가는 단연 임영웅 선생님이다. 김석훈이 에드먼드의 역을 맡는다는 사실도 끌렸었다. 손숙 아주머니를 수 차례 무대에서 접하면서 사람들이 그녀의 식상한 연기에 열광하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거부감이 많았었는데, 이번 공연을 통해 나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 손숙은 식상한게 아니라 꾸준한 것이로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만큼 '메어리'역에 잘 어울릴 여자가 그 누구일까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었다. 최고의 배역과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기대했던 에드먼드 김석훈은 빛났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이 미남 배우는 단지 외모가 아닌 연기력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배우다웠다. 메어리의 남편이자 에드먼드의 아버지 역을 맡은 노랭이 영감 제임스의 김명수는 또 어떠했겠는가? 김명수는 유진 오닐의 원작이 묘사한 제임스 보다 훨씬 호리호리하고 고뇌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화와 TV를 오가며 입증된 그의 명확한 발음과 결코 과장되지 않은 섬세함... 스물두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선배 손숙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남편 역을 어느 누가 그보다 더 잘 소화해 낼 수 있겠는가?
이미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명배우 최민식의 동생 최광일은 에드먼드의 타락한 형 제이미의 역할을 익살스럽고 명쾌하며 애처럽게 잘 연기해 냈다. 아마도 이제는 최민식의 동생이라는 표현에 좋지만은 않은 시선을 보낼 것만 같다. 형보다 더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그의 연기는 불혹을 앞두고 절정에 무르익은 듯 싶다.

넓은 창과 책장이 있는 가족용 거실, 오른쪽 계단 위로는 셰익스피어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안정감 있는 무대에서 타이런 부부의 행복한 대화가 무르익을 때만 해도 객석의 대다수는 이 작품의 우울함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소소한 부분에서 원작과는 미세한 차이를 보였지만 기품이 있는 분위기는 여느 평범한 연극무대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제이미와 에드먼드 중간에 태어나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은 문제의 형제에 작가 유진 오닐이 자신의 이름을 활용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자전적인 슬픔이 있다. 불행한 원작자의 감정이 그대로 숨어 있는 우울한 작품...

성공한 배우에 별장 주인인 제임스 타이런과 그의 가족 이야기...
서재의 손떼 묻은 책들이 탐스러운 그곳 거실의 아침은 마냥 행복한 한 가정을 보는 듯한 착각으로 관객을 이끈다. 극 중간에 메어리와 말벗이 되어주기도 하는 교양 없는 하녀 캐서린(서은경)만이 가족 외에 유일하게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우리는 서서히 드러나는 이 가족의 아픈 이야기들을 경험하게 된다. 마약과 알콜중독...... 소녀 시절의 꿈, 애증의 추억들을 오가는 동안 깊은 우울함이 내 가슴을 지배했다. 셰익스피어와 보들레르, 스윈번, 오스카 와일드 등을 적절하게 인용하는 브로드웨이 풍의 멋진 대사들...

중간에 15분 간의 휴식을 포함하여 180분 동안 펼쳐지는 다섯 배우들의 매력적인 에너지에 빨려들다 보니 어느덧 깊은 밤... 품위 있는 연극의 진수를 보여준 가을밤이었다.

명동예술극장은 내가 접한 최고의 연극 무대였다.
1층에는 테라스까지 점령한 채 서울에 뿌리 내린 '왈츠와 닥터만' 매장이 인상적이었고, 연극을 위한 극장들에 대한 편견을 확실하게 깨줄 만큼 아주 고급스러운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극장을 나설 때, 1층 로비에서 혼자 서성거리시던 임영웅 선생님의 희긋희긋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아내와 함께한 명동의 밤길도 좋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와의만남 2009-09-2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저희도 임영웅 선생님이 연출하신 작품이어서, 이번 이벤트 진행하면서 고객 분들께 더 기쁘게 드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無근님의 글을 보니 공연이 정말 더 궁금한데요. ^-^
게다가 아내와 명동의 밤길에서 데이트까지 하시다니, 뽑아드린 제가 다 부럽습니다. 하하하. 앞으로도 초대석에서 자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