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연예인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여행다니고 시시덕거리는 것으로 주말 오후가 다 가는 요즘 TV 프로그램 편성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에는 무한애정을!) 단연 눈에 띄는 프로그램이다. 어떤 한 분야에 자신의 삶과 열정을 바쳐서 '달인'이 된 사람들을 소개하는 이 프로그램은 시장에서 만두를 포장하는 아주머니부터 하루에 파를 수백 개씩 까는 주방장까지, 비닐포장지의 오타를 찾아내는 공장직원부터 설탕을 배달하는 배달원까지, 그야말로 현대를 성실과 노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시대의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건 그 '달인'들이 정신적으로 숙련된 이들일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놀랍도록 단련되고 숙련된 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삶을 대하는 진정성마저 느껴지는 달인들의 생활태도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생활의 달인>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회의 후기를 시작하는 것은 '임꺽정으로 쿵푸'하는 고미숙 선생의 강연의 골짜를 이루고 있었던 두 가지 때문이었다. 고미숙 선생은 첫째는 몸의 단련, 두번째는 그것에 반드시 수반되어 할 정신적 수양(정신적 수양에 몸의 단련이 수반되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미숙 선생은 무엇이 우선이라기 보다는 두 개가 함께 가야 한다고 강변한다)이 지금 신자유주의 시대, 육체적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되는 현대인을 구원하는 해답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적 수련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는 임꺽정과 칠두령, 그리고 끊임없는 공부와 정신적 수련으로 결국은 생불이 된 갖바치의 조화는 고미숙 선생이 고전에서 찾은 현대인의 구원책인 셈이다. 상당히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다.
그러나 고미숙 선생이 이야기하는 몸의 단련과 정신적 수양은 내가 <생활의 달인>에서 찾은 몸의 단련과 정신적 수양과는 상당부분 동떨어져 있는 것이기는 하다. 고미숙 선생에게 임꺽정과 칠두령의 수련은 '댓가 없는 단련'이기에 그 의미가 컸다고 한다. 칠두령 중 1인인 유복이는 앉은뱅이로 가지 던지기 수련에 매진해 결국은 가지를 던져 파리도 맞추는 대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지 던지기를 열심히 해서 가지 던지기의 달인이 되어 세계를 평정하겠다'는 식의 어떤 개인의 명예나 부를 위한 세속적 목표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수련'이라고 고미숙 선생은 말한다. 따라서 대부분 '열심히 일해 돈을 벌겠다' 내지는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소박한 욕망을 가진 '서민 달인'들의 단련의 과정과 칠두령의 단련의 과정은 사뭇 다르다. 고미숙 선생이 높이 사는 '공부하는 삶' 그래서 '깨달음을 얻고 삶을 바꾸고 혹은 세상을 바꾸는 삶'의 전형인 갖바치의 정신적 수양 역시 내가 생활의 달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숭고한 수양'과는 다소 다르다. 갖바치는 유학에서 시작한 도교와 명리학을 거쳐 결국은 생불에 이르는 시대의 지성이다. 그러나 생활의 달인들은 '지성'이라기 보다는 '진심'으로 승부(?)하는 이들인 셈이다.
고미숙 선생의 가르침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학삘'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입장에서는 귀담아 들어야 하는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제도권에 진입하기보다는 쓸모없는 소비를 줄이는 즉 잉여를 만들어내지 않는 삶과 실험적인 공동체 생활을 통해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에서 많은 공동체 실험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말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현대인이 지금의 제도 안에서 살아내야만 할 때, 그 삶을 바꾸는 몸의 단련과 정신 수양이 어떤 종류의 것이어야 할 지에 대해서는 강연 내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댓가를 바랄 수밖에 없는 서민들, '생활의 달인'들의 삶은 과연 '더 열심히 일해서 성공해야 가치있는 삶이다'라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의 훈육에 불과한 것일까라는 평소에도 가지고 있었던 물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과 인내르 통해 달인의 경지에까지 오른 그분들의 충실한 삶과 그 삶을 채우고 있는 그 분들의 삶의 철학에서 배움을 얻는 것이 맞는가라는 물음이 경합하는 시간이었다. 댓가없는 수련, 내 삶을 바꾸는 공부.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가.
이런 질문이 아주 맥락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했던 것은 강연의 끝에 감상을 말씀하신 한 여성분 덕분이었다. 그 분의 따님 세 분이 모두 전문직을 갖고 있어서 육아에 어려움이 많고, 결국 다음 세대 여성의 사회활동의 자유는 이전 세대 여성의 또다른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돌봄 노동이 결국은 여성으로 귀속되는 현실을 지적하신 분이셨다. 그 분 스스로 따님들의 아이들을 봐주느라 고민이 되셨던 모양. 그런데 그 분의 좋은 말씀들 중 다소 걸렸던 것은 의사이고, 대기업에 다니고, 학교 선생인 딸들의 삶의 대안을 고미숙 선생의 삶에서 찾았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공부하는 비정규직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고미숙 선생이 강연 내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강조하셨던 내용임을 보면, 나는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이 결국 육아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것은 비정규직이란 말씀인가. 그때, 고미숙 선생과 같은 비정규직은 얼마나 '우아한' 비정규직인가. 실제로 '비정규직 여성들' 대부분의 삶이 얼마나 처절한지 그 분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의 따님들이 영위할 수도 있는 비정규직의 삶과 다른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끌어야만 하는 비정규직의 삶 사이의 갭은, 칠두령의 댓가를 원치 않는 단련과 댓가가 따라와야만 하는 생활의 달인들의 단련 사이의 갭과 얼추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고미숙 선생의 삶에 대한 통찰의 단면을 보고 또 배울 수 있어 좋은 자리였고, 무엇보다 스스로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해 다시 하번 생각해 볼 수 있어서 흥미있는 자리였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고전으로부터 지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고, 아직 읽지못한 선생님의 저서들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간과 신'의 힘을 키우고 몸을 움직이라는 선생님의 조언대로, 오늘은 좀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