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연극. 진지한 생각과 신화, 그리고 인간의 본성, 갈등, 화해가 어울어진 멋진 연극.
적극 추천작. (피터 쉐퍼의 작품, 구태환 연출)

cast: 정동환 (에드워드 담슨), 서이숙 (헬렌 담슨), 박윤희 (필립 담슨)
 

<고곤의 선물>을 보고 나서 너무나 많은 감정과 많은 생각들이 마음 속에 가득차 정리가 안된다. 수많은 말들이 연결되면서도 흩어져 그 희곡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 답이 없는 궁금증을 그저 써 볼 뿐. 연극을 보지 않은 사람은 읽기 힘든 단상들.

하나. 예습없어도 그 자체로 충분한 연극.
어려운 연극이란 말을 들었다. 예습이 필요하다고. 연극이 담은 모든 내용을 다 파악하려고 한다면 어려울 수 있지만 그런 사전 지식없더라도 담슨 부부의 대화를 통해, 연극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100 퍼센트는 아니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서 놀람, 슬픔, 고민이란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마음의 감동. 배우의 열연이 주는 감동과 연극의 치밀한 짜임새에 대한 감탄, 신화의 무대위의 구현이 주는 경이로움.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닐까.

둘. 무대위로 끌어올린 현실과 신화.
<고곤의 선물>에서 연출은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데나와 함께 등장하는, 온 몸에 하얀 분칠을 한 존재들. 그 흰색이 주는 신비로움과 더불어 여러사람들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신의 목소리. 경건함이 객석에 퍼져나가는데 같은 공간이되 시공을 초월하는 공간이 창조되는 순간은 정말 멋졌다. 커튼콜 때 이들의 절도있는 인사 역시 가장 적절한 방식의 답례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공간의 활용, 조명의 활용도 너무 훌륭했다.

셋. 배우의 열연.
TV에서 보던, 중견배우 중 가장 좋아하는 정동환씨. 무대에는 정동환씨가 아닌 광기어린 천재가 내면의 분노, 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날뛰고 있었다. 아내에게, 아데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거절하는,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느끼며 정의롭지 못한 것은 피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믿는 천재 극작가. 또 한 편에는, 광기어린 천재를 사랑하며 그를 어둠에서 구해주고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똑똑한 아가씨, 서이숙씨가 있었다. 극을 주도하는 화자이자, 에드워드의 아내로, 신화 속의 아데나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그녀는 하나의 공간을 여러 공간으로 나누며 다양한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시키고 있었다.

넷. 고곤의 선물은 무엇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 진실?
아데나는 메두사를 죽이려는 페르세우스에게 방패 등 (비루한 기억력이여 --;;;) 선물을 준다. (페르세우스는 에드워드이며, 아데나는 헬렌) 그 댓가로 메두사를 죽여 방패위에 올려놓으라고 한다. 방패는 정의를 비추는 거울이요, 그 방패만을 통해서 메두사를 봐야 돌로 변하지 않고 죽일 수 있지만, 다시 들리는 아데나는 그 방패가 아닌 직접 두 눈으로 메두사를 보라 명하지만 페르세우스는 거부한다. 고곤의 선물을 간직한 자는 돌이되리니...라고 울려퍼지는데...ㅠㅠ 일단 고곤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 이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당한 이유없이 사람을 돌로 만드는 고곤, 신의 창조물인 고곤, 파멸과 치유란 두 가지 피를 가진 고곤, 고곤을 내놓지 않고 지닌 자는 돌로 만드는 고곤, 상상력을 메마르게 만드는 고곤.

다섯. 용서받지 못할 죄.
테러리스트에 대한 적개심이 있고 (당연히 메두사는 사람들을 아무 이유없이 돌로 만들어 죽게하니, 페르세우스에게 있어서 메두사는 죄없는 사람을 마구 죽이는 테러리스트와 다를 바 없을 듯 하다) 이들을  피. 죽음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믿는 에드워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는 헬렌.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은 극의 마지막에 헬렌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에드워드, 발구르기 춤을 추며 기뻐하는 에드워드를 동시에 등장시킴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오픈 엔딩 같기도 하다. 용서받지 못할 죄. 신의 창조물을 그 창조물이 심판하여 처형하는 일이 과연 옳은 것일까? 메두사는 사람을 돌로 만들지만 메두사를 뒤덮는 아름다운 비늘, 정결한 모습. 신은 에드워드에게 네가 과연 신의 창조물을 죽일 수 있느냐? 네가 두 눈으로 메두사를 보고서도 죽일 수 있느냐?고 묻는데, 물론 대답은 알 수 없다. 에드워드는 아예 자신의 두 눈으로 뭔가를 보기를 거부했으니.

여섯. 동상이몽.
같은 연극을 봐도 관객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같이 간 친구는 헤어진 남자친구. 며칠 전 미워하는 마음으로 견딜 수 없었다며 자신에게 헬렌의 용서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듣는 순간, 사형제도가 생각났다. 찬반 토론 및 글을 쓸 때면 사형제도에 대해 찬성의사를 표명하곤 했는데..뭔가 나의 마음이 에드워드와 겹쳐졌다. 나도 이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믿고,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내 생각에 헬렌은 뭐라고 했을까?

일곱. 연극은 살아있다. (연극을 보고 감동 받는 이가 이토록 많다)
극작가 에드워드는 말한다. 사람들은 연극이 필요 없다고 하지.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관객들이 그렇게 돌아 선거야. 이 세상에 영원한건 없어. 그들 모두 지금 스크린 속에 홀딱 빠져 있어. 자신의 영혼이 강간당하고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말야. 상상력도 없는 일차원적인 어둠의 날개가 온 지상을 뒤 덮고 있어. 

오늘날의 관객은 그저 줄지어 앉아 팔짱인 끼고 보고 있다는 에드워드의 말에, 슬그머니 팔짱끼고 있던 나의 손이 펴지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 

여덟. 영국, 아일랜드, 크롬웰에 대한 지식이 약간 있다면,
테러, 폭력, 복수 등이 에드워드에겐 왜 주요 관심의 대상인지 설명이 됐을 것 같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으니 극 자체에만 집중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 싶다.


보고 온 연극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정리를 못하더라도 마음으로 뭔가 좋은 연극을 보고 왔다는 느낌이 가득해,
그 자체로 행복하다.
당분간 연극이나 뮤지컬 관람은 쉬어야 겠다. <고곤의 선물>이 주는 여운을 조금 더 간직하고 싶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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