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206, 고미숙, 그린비 출판사, 2~4pm



이 강연후기는 고미숙 선생의 직접적인 ‘강연’과 그린비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영상’을 보고 고미숙 선생이 자신의 글을 읽고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울 지도 모른다는 날에 홍대입구 역 부근에 있는 그린비 출판사로 들어갔다. 이중의 책장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공간에는 귀여운 탁자가 있었고 초록의 식물이 햇빛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강연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도착했는지, 출판사에 낯선 사람이 등장해서인지 그린비 출판사 사람들은 낯선 웃음과 분주한 움직임으로 간식과 음료수를 그 귀여운 탁자에 올려 놓고 간단히 강연 준비를 마쳤다.

2시. 고미숙 선생 등장. 고미숙 선생은 “대학에서 독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지식인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고,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나비와 전사》,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이 영화를 보라》 등의 책을 썼다. 이번 강연은 얼마 전 출간한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이하 《호모 에로스》)의 출간 기념 “에로스 특강”이었는데, 강연 형식으로 고미숙 선생이 많은 발언권을 가졌고, 주고받는 대화가 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점심 시간에 밥 한끼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강연이 시작되었다.

출간 기념 강연이든 아니든 책을 쓴 모든 저자는 자신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강연의 핵심 주제로 삼고 그 핵심 주제로 나아가는 저자 자신을 설명하기 마련이다. 고미숙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호모 에로스》를 쓰게 된 계기와 문제의식이 강연의 핵심 주제였다.

인간의 신체는 본능적으로 사랑과 성을 갈구하는데 왜 인간은 그 본능을 억압하는지, 어떻게 억압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의 문제의식으로 시작해 연애와 성적인 욕망을 공부를 통해 발전시키고 분출하는 것에 대한 강연이 시작되었다.

강연을 들어보니 고미숙 선생이 《호모 에로스》를 쓰게 된 계기는 ‘사랑’, ‘성’이라는 대상이 그 “인과의 사슬”에 따라 인간의 삶에 변하지 않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미숙 선생은 《호모 쿵푸스》를 출간한 후 대중 강연에서 청중들이 ‘사랑’, ‘성’과 같은 주제에서 보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관심을 보일 때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20세기 이후 민주주의 시대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정치경제적으로 구성된 사회에 살면서 현대인들은 외형적으로 자유롭게 사랑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분출하며 삶을 향유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현대인의 삶과 사랑은 사회의 도덕과 윤리라는 억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고미숙 선생이 말한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규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성의 체험에 굉장히 빈곤하다



한국 남성 중 대다수 혹은 일부가 첫경험을 사창가에서 돈을 주고 경험하는 것과 성적인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 이런 삶의 현상이 아닐까. 여성에게 의무처럼 강제로 주어진 ‘순결’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회의 강제로 인해 원하고 본능적으로 섹스를 비롯한 성적 행위를 원할 때에도 원치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 그로 인해 ‘여자는 튕기니까 몇 번 더 시도하라’는 남성들의 술자리 여담이 일반적인 남성들의 생각처럼 굳어진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를 상징하고 규정짓는 도덕과 윤리가 존재했었다. 이 도덕과 윤리는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기계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한다. 먹고 사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20세기에 산업 사회가 대두하면서 남성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여성은 집에서 소위 집안 일을 해야 했다. 여성의 출산 기능과 남성에 비해 연약한 신체가 이에 한 몫을 했다. 산업 사회는 그 사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는 도덕과 윤리가 필요했다. 노동을 통한 성취감이나 삶의 희로애락 따위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어쩌면 21세기를 사는 사람들도 아직까지 20세기 산업 사회가 규정한 도덕과 윤리의 잔재와 본능의 솟구침 사이에서 허덕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과 성이 제도로 인해 ‘소유’와 ‘재산권의 확장’으로 왜곡되어 사랑의 힘이 소진되고 부부끼리 칼부림이 나서 죽거나, 죽이거나 한다. 가장 깔끔한 경우는 법정에서 해결하는 것이 되어버린 상황이 현실이다.

고미숙 선생은 이런 강연의 핵심 주제를 문학 작품과 텔레비전 드라마, 고전을 예로 들며 강연을 이어갔다. 그리고 ‘공부’를 통해 “외부 세계와 나의 리듬”에 대해 고민하고 진리와 삶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사회의 도덕과 윤리(Moral)가 소리 없이 행하는 에로스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공부는 사회적으로 주입된 망상과 표상을 내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고미숙 선생이 ‘공부’라는 개념어를 고전 공부 이외에 어디까지 규정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사회가 주입한 기존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것들을 수용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사는 삶의 방식이 꼭 공부만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일까. “편지 한 장을 쓰더라도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일까. 텍스트를 다루며 사는 고미숙 선생의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는 아닐까. 연애 편지를 쓸 때는 공부가 아니라 진심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연애 편지의 진심처럼 삶은 공부만을 통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맥락 속에서 잡아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각자가 잡아야 할 것들이 있고 고미숙 선생은 공부를 잡은 것이다. 공부가 삶의 억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참여했던 독서 모임에서 만난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친구가 술을 한 잔 들이켜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살고 있는 내가 싫어요

 

친구의 그 말은 자본과 권력이 그들의 지속된 팽창을 위해 주입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이었을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그 때 나는 그 동생이 책을 읽고 현실을 받아들일 때(볼 때), 공부할 때 그리고 그 주입된 삶의 욕망(일류 대학을 나와 일류 기업에서 일하고 나이든 후에는 유능한 일류 CEO가 되어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에서 벗어날 때 그런 의식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친구를 지금은 만나지 않는다. 친구가 잡은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각설하고 《호모 에로스》와 고미숙 선생의 강연의 핵심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사랑하는 방식, 사랑하는 상대를 대하는 방식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내 본능과 맞대어 보고 차이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공부요, 사랑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입된 사랑 방식으로 너무 본능에 치우친 방식으로 “인연을 갉아 먹는” 짓은 하지 말자. 내 사랑을 하자.

 

<작가와의 만남 1기 강우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