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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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우리 학교에만 있는 백 가지 전설이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학교 언니들이 그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줄 때마다 어찌나 무섭고, 또 비장해지던지. (그 전설 가운데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이 등장하는 경우도 많았고, 오랜 전설에 기인한 것도 많았다. 마침 사회 과목에서 역사를 다루기 시작할 무렵인지라, 언니들이 이야기해주는 어설픈 전설도 몇 마디 들어본 말에 기대어 다 믿어버렸었다는. 물론, 그 전설은 우리 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웃 학교에도, 저-멀리 있던 동네의 학교에도 전해 내려오던 전설이었지만;ㅁ;...) 이야기들은 모두 하교하고 난 어둑한 학교라는 공간과, 언니들의 낮은 목소리로 오랫동안 심장을 뛰게 했더랬다. 그때를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소설 <이사>를 읽는 동안 그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소설은 '이사'와 관련한 여섯 가지 도시괴담들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어쩐지 으스스 해지기는 하지만 그다지 무섭지는 않은(이제 나는 어른이니까!) 흥미로운 읽을거리쯤 되겠다. 이사를 앞두고 짐을 싸던 중에 오랫동안 보관만 되어 있던 짐들 사이에서 어떤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거나, 이사 갈 집을 알아보던 중에 전에 살던 사람의 어떤 흔적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은 일어난다. 학교라는 공간이 낮에는 왁자지껄, 한없이 밝은 공간이지만- 밤에는 완전히 새로운 얼굴을 하듯, 회사라는 공간도 모두가 퇴근한 밤이면 왠지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누군가 썼던 책상, 누군가의 짐이 자꾸 내게로 온다고 생각하면 그 역시 으스스 한 일이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게도 익숙한 공간에서 일어난 일. 여기 실린 이야기들은 집이나 회사같이 가장 일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하지만 진짜 하이라이트는 여섯 개의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 평소라면 무심코 넘겨버렸을지도 모를 '작품 해설'을 읽다가 몸이 파르르 떨렸다.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작품 해설'을 위해 쓰여진 것일지도, 우리는 '작품 해설'을 읽기 위해 페이지를 넘겨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작가의 어마어마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마지막 이야기까지 읽으며, 도시괴담은 역시 괴담일 뿐이라지만- 하수구 악어가 크기는 작았으나 실존했다는 이야기처럼 종종 진실이 섞인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앞에 놓인 벽이 두려워진다. 저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나는 전혀 모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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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서 병을 이기는 법 - 몸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적 방법
윌리엄 리 지음, 신동숙 옮김, 김남규 감수 / 흐름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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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 병을 고친다? 현대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요즘 같은 때에 대체의학 같은 것에만 의존해서 되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로 많은 사람들이 음식으로 병을 고쳤다고 증언하고 있다. (가끔 채널을 돌리다가 '나는 자연인이다'같은 프로그램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한참을 보게 된다) 항암제가 완제품이라면, 음식은 내가 조립해야 될 부품 같은 것. 퍼즐을 맞추듯이 음식을 잘 알고 끼워 맞추면 (그 어떤 약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완제품이 될 수도 있다. 이 책 <먹어서 병을 이기는 법>은 '밥이 보약이다'라는 커다란 명제 아래- 음식이 왜 중요하며,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굉장히 '의학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책은 건강을 '태어나는 순간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전력을 다해서 몸을 보호하는 놀라운 방어 체계 속에서 우리 몸의 세포와 기관들이 순조롭게 기능하는 활성 상태(본문 중에서, 24쪽)'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의 건강 방어 체계는 몸에 태생적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그중 일부는 대단히 강력해서 심지어 암 같은 질병까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건강 방어 체계란 무엇인가? 저자는 건강을 지탱하는 5가지 핵심 방어 체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혈관신생(혈관이 형성되는 과정), 재생(줄기세포), 마이크로바이옴(박테리아), DNA 보호, 면역이다. 책은 150여 페이지를 할애해 이 5가지 핵심 방어 체계에 대해서 꼼꼼하게 소개한다. (친절하고 다정한 주치의와 면담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 장들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먹으면 좋은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나간다.

이 책의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을 먹어야 해!'가 아니라 '이런 이런 음식들이 몸에 좋은데, 그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건 뭐야?'하고 묻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양사가 세심하게 짜둔, 하지만 나는 결코 실천할 수 없는 종합 식단이 아니라- 각각의 식재료들을 살피고, 그중 내가 좋아하는 것 몇 가지만 충실하게 먹어도 건강을 지켜낼 수 있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해주어서 좋았다. 그런 점에서, 요리에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나도 5x5x5 플랜은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는 5가지 건강 방어 체계를 뒷받침하기 위해 건강에 도움이 되는 식품 중 각자 좋아하는 것을 식사나 간식으로 최소 5가지씩 매일 최대 5번씩 섭취하는 전략이다. (리스트에서 커피를 만날 때마다 어찌나 신나던지!) 각자 좋아하고 즐기는 음식이 기본이 되기 때문에 개별 맞춤형이다. 이 전략은 엄격한 기준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다이어트 마니아에게도 유용할 테지만, 나처럼 삼시세끼를 제때 챙겨 먹는 것조차 잘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했다. (꼭 식사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기에) 실천하기 위해 힘들게 애쓸 필요가 거의 없이-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라는 것을 아는 것 정도로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치료의 패러다임은 치료 중심이 아니라 예방 중심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개인의 생활 습관, 혹은 생활 양식이 더욱더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먹는 것은 인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단순한 역할에서 질병 예방이나 치료에 적극적으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신적인 부분에까지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바른 먹거리를 제대로 알고, 맛있게 먹는 것. 완성된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식재료를 꼼꼼하게 따져보는 것. 매 순간 의식하기는 어려워도, 문득문득 '건강'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는 순간에 이 책을 펼쳐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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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편의점 : 생각하는 인간 편 - 지적인 현대인을 위한 지식 편의점
이시한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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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취급하지 않는 품목이 없다지만, 지식'도 편의점에서 살 수 있을까? 갸우뚱, 하는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꽤나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 책은 모든 지식으로부터의 출발지나 다름없다'라고 쓰고 있다. 아니, 자기 책을 소개하면서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다니! 그 자신감과 당당한 태도에 눈길이 갔다. (사실 너무 당당해서 의심스러웠다고 해야 맞겠다) 하지만 50페이지쯤 읽었을 때, 그 당당한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 태도를 수긍하게 되었고, 그러자 이 편의점은 마치 마법처럼 내게 '지식 편의점'을 펼쳐 보였다.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책들은 실로 넓고, 깊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던, 하지만 막상 읽으려니 엄두가 안 났던 책들을 거침없이 소개해 나간다. 그중에는 두꺼운 볼륨만으로 독자를 압도시키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도 있고, 언젠가 제대로 읽어봐야지 했던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같은 책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압도적인 서사로 우리에게 질문을 잔뜩 남기는 조지 오웰의 <1984>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18권의 책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 반쯤은 읽었고 반쯤은 읽지 않은 책이라 내게 더욱 흥미로웠다. (책을 소개하는 책을 읽을 때는, 내가 읽은 책을 저자가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를 먼저 살핀다. 나와 비슷한 시선이거나, 나와는 다른 시선이지만 내게 강렬한 인사이트를 주는 글이라면 나머지 글도 유심히 읽지만- 나와 다른 시선이면서 어떤 인사이트도 주지 못하면 책을 덮고 만다)

저자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그 날카로운 시선을 둥글둥글한 필터를 덧씌워 내놓은 글들은 유려했다. 다양한 지식을 전달하지만 그 지식들을 관통하는 거시적인 흐름을 꿰뚫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재미와 인사이트를 전한다. 책을 읽으면서, 심리학자 제놈 브루너가 했던 두 가지 앎의 방식이 저자에게 완전히 체화되었구나- 생각했다. 그는 지식을 이해하고 다루는 법으로서의 앎과 스토리를 이해하고, 지어내고, 들려줄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앎을 제시했었는데- 그 두 개의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아들어가는 느낌을 계속해서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야- 읽는 내내 즐거웠다. 읽었던 책은 한 번 더 훑는 느낌이라 좋았고, 읽지 않은 책들은 어떤 책부터 읽어나가면 좋을지 팁을 얻은 것 같아서 좋았다. 무엇보다, 저자가 지식을 다루는 역량에 끊임없이 탐복할 수 있었던 점이 제일 좋았다. 이런 책이라면, 시리즈를 손꼽아 기다리지 않을 수 없겠다. 그가 소개한-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을 읽어나가며, 다음 여정에서 만날 <지식 편의점>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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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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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의 작은 공간. 보통의 엄마들이라면 그 작은 가게에 떡볶이집을 열거나 옷 가게를 열었겠지만 그녀는 원래 그런 것들에는 재주가 없었다.(14쪽) 다섯 평 될까 말까 한 그곳에 그녀는 '글짓기 교실'을 열었다. 사실 말이 작가였지, 그녀의 경력이라곤 무명 문학잡지에 산문 한 편을 발표한 게 다였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부르는 '작가'라는 호칭에도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동안 고요한 적막을 피할 수 없었지만, 글짓기 교실에는 이내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깔깔거리고 손뼉을 치고 또 갑자기 진지해졌다가 또 갑자기 음담패설로 빠지는 계동 아줌마들의 수다방을 두고, 김 작가는 '글쓰기를 사랑하는 계동 여성들의 모임'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저 수다나 실컷 떨다가 헤어지는 날이 더 많았지만, 수다를 떨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모인 것이라는 건 뭔가 달랐다. 그 작은 차이는 공간에, 또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했다. 그 안에서 풀어내는 자기 인생 이야기는 입 밖으로 뱉는 순간 흩어지고 마는 수다가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한 재료가 된다.

'글쓰기를 사랑하는 계동 여성들의 모임'을 지켜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영인의 시선을 취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왜 거기 모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알면서도, 나 역시 영인보다는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 계동 여성들과 더 가까이 위치해있으면서도 그랬다. 그 시선을 발견한 순간, 나는 부끄러웠다. 그녀들의 대화를 엿듣고 '수준 낮음 그 자체'라고 탕탕 못 박은 영인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책 몇 권 더 읽었다고 뿜어내는 우월감이나, 내가 미처 가지지 못한 김 작가의 뻔뻔함과 무모함, 글쓰기를 매개로 모여 깔깔거리고 한참을 웃을 수 있는 모임의 끈끈함을 모두 시기하고 있는 나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맞다. 나는 김 작가가 부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유명한 작가가 아니었기에, (그래서 조금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 같았기에) 그녀를 시기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리하야 영인이 김 작가의 삶을 이해하게 될수록- 나 역시 그 시기심을 거두었다. 시기심이 걷힌 자리에는, 김 작가의 무모함 뒤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던 어떤 마음이 차올랐다. 그것은 아마도 이런 것.

내가 세상을 보는 법을 설명해 줄게요. 수쿠스가 말했다. 듣고 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거예요.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필요로 해요. 그렇죠? 누구나 조금 더 행복해지고 조금 덜 슬퍼지게 만들어주는 작은 일들을 필요로 한다고요. 그게 뭔지 말은 안 하죠. 그리고 보통 스스로는 그걸 얻을 수가 없어요. 누군가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내려면, 그게 아주 작은 거라고 해도, 재능이 필요한 거예요. (...)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어떤 작은 일들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을 만족시킬 방법을 알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고요. 사람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돈을 낼 테니까, 꼭 돈이 아니라도 어떻게든 대가를 지불하거든요. 그 사람들은 나한테 의존하게 되는 거예요. (작품 해설 중에서 재인용(존 버거, 라일락과 깃발: 그들의 노동에3), 341쪽)

글을 쓰는 마음도, 글을 읽는 마음도, 글짓기 교실을 여는 마음도, 글짓기 교실에 찾아오는 마음도- 모두 이 안에 녹아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이야기를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중에서도 유독 쓰면서 힘을 내는 이들이 있다는 것. 주먹다짐만큼이나 치열한 글쓰기를 하며, 감정을 한바탕 끓여내고 식히는 과정은 다름 아닌 삶의 치유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눌 이들을 만난다는 건, 돈 따위로 환산될 수 없는 묵직하고 뜨끈한 무엇이라는 것.

당장 먹고사는 일이 나의 삶을 압박해오더라도, '글짓기 교실'을 열 수 있는 그 패기를 닮고 싶다. 아무리 사소하고, 시시 껄껄한 이야기라도 진지하게 듣고 그 안에서 어떤 삶의 포인트를 짚어낼 수 있는 날카로운 시선 역시 갖고 싶다. 이왕이면 '돈키호테'처럼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자유롭기를. 그리고 조금 더 재미있게 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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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러시아 고전산책 5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김영란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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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Faust. 그는 악마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었던 전설 속의 인물이다. 박식한 학자였던 파우스트는 그가 이미 가진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혼을 걸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금지되 지식을 탐한다. 악마 메피스토는 계약기간 동안 흑마술로서 파우스트의 욕심을 충족시켜 주지만, 계약 기간이 끝난 후 파우스트의 영혼은 메피스토의 소유가 되고 영원히 저주받게 된다. 욕망의 극한까지 간 파우스트는 무엇을 얻었을까. 그것은 구원일까, 저주일까.

이 책 <파우스트>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야기 속 누군가는 '파우스트'로 감정의 격동을 깨우려고 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 처음 느낀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내려가 버렸다. 책에는 모두 세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묘하게 닮아있다. 그것은 남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게 된 여자 주인공들의 특성이다. 소설에 등장한 여인들은 어딘가 신비롭고, 무표정하다. 뿐만 아니라, 영리하고 진실하며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한번 보면 잊히지 않을 만큼 아름답기도 하고) 이 기묘함은 이야기를 이끄는 강한 모티브가 된다.

남자 주인공들은 그녀들을 욕망한다. 여행 중 우연히 보았던 그녀를, 친구의 아내가 된 그녀를, 지주의 딸인 그녀를. 마치 세이렌의 노래처럼 그녀들은 주인공들을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세상 그 어떤 사랑 이야기가 평범하겠냐마는). 그들은 그녀들을 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작가 투르게네프는 '파우스트'의 마지막을 보면서 그것은 저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독약처럼 혈관을 뛰어다니는 정서적 격동이 누군가에게는 창조적 원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억누르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폭풍우가 되어 그를 집어삼키기 마련이니까.

 

나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렇다고 청년도 아니야. 남을 속이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수월하게 자신을 기만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말이지. 나는 모든 것을 자각하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네. 내가 이미 마흔에 가까웠다는 것도,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아내이고 또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어. 그리고 나를 사로잡는 이 불행한 감정에는 남모르는 마음의 가책과 활력의 낭비 외에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것도 난 잘 알고 있네. 이런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원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더군.

'파우스트' 중에서, 130쪽

그들은 상자를 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욕망은 상자를 열게 했고, 한번 열린 상자는 다시 닫히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더없이 솔직했던 그 순간을 그들은 어떻게 회고할까. '참았어야 하는데...'일까?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바꿀 만큼 가치 있던 순간이라 생각했을까? ...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메피스토가 실존하는 악마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을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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