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클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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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의 작은 공간. 보통의 엄마들이라면 그 작은 가게에 떡볶이집을 열거나 옷 가게를 열었겠지만 그녀는 원래 그런 것들에는 재주가 없었다.(14쪽) 다섯 평 될까 말까 한 그곳에 그녀는 '글짓기 교실'을 열었다. 사실 말이 작가였지, 그녀의 경력이라곤 무명 문학잡지에 산문 한 편을 발표한 게 다였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부르는 '작가'라는 호칭에도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동안 고요한 적막을 피할 수 없었지만, 글짓기 교실에는 이내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깔깔거리고 손뼉을 치고 또 갑자기 진지해졌다가 또 갑자기 음담패설로 빠지는 계동 아줌마들의 수다방을 두고, 김 작가는 '글쓰기를 사랑하는 계동 여성들의 모임'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저 수다나 실컷 떨다가 헤어지는 날이 더 많았지만, 수다를 떨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모인 것이라는 건 뭔가 달랐다. 그 작은 차이는 공간에, 또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했다. 그 안에서 풀어내는 자기 인생 이야기는 입 밖으로 뱉는 순간 흩어지고 마는 수다가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한 재료가 된다.

'글쓰기를 사랑하는 계동 여성들의 모임'을 지켜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영인의 시선을 취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왜 거기 모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알면서도, 나 역시 영인보다는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 계동 여성들과 더 가까이 위치해있으면서도 그랬다. 그 시선을 발견한 순간, 나는 부끄러웠다. 그녀들의 대화를 엿듣고 '수준 낮음 그 자체'라고 탕탕 못 박은 영인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책 몇 권 더 읽었다고 뿜어내는 우월감이나, 내가 미처 가지지 못한 김 작가의 뻔뻔함과 무모함, 글쓰기를 매개로 모여 깔깔거리고 한참을 웃을 수 있는 모임의 끈끈함을 모두 시기하고 있는 나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맞다. 나는 김 작가가 부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유명한 작가가 아니었기에, (그래서 조금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 같았기에) 그녀를 시기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리하야 영인이 김 작가의 삶을 이해하게 될수록- 나 역시 그 시기심을 거두었다. 시기심이 걷힌 자리에는, 김 작가의 무모함 뒤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던 어떤 마음이 차올랐다. 그것은 아마도 이런 것.

내가 세상을 보는 법을 설명해 줄게요. 수쿠스가 말했다. 듣고 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거예요.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필요로 해요. 그렇죠? 누구나 조금 더 행복해지고 조금 덜 슬퍼지게 만들어주는 작은 일들을 필요로 한다고요. 그게 뭔지 말은 안 하죠. 그리고 보통 스스로는 그걸 얻을 수가 없어요. 누군가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내려면, 그게 아주 작은 거라고 해도, 재능이 필요한 거예요. (...)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어떤 작은 일들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을 만족시킬 방법을 알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고요. 사람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돈을 낼 테니까, 꼭 돈이 아니라도 어떻게든 대가를 지불하거든요. 그 사람들은 나한테 의존하게 되는 거예요. (작품 해설 중에서 재인용(존 버거, 라일락과 깃발: 그들의 노동에3), 341쪽)

글을 쓰는 마음도, 글을 읽는 마음도, 글짓기 교실을 여는 마음도, 글짓기 교실에 찾아오는 마음도- 모두 이 안에 녹아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이야기를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중에서도 유독 쓰면서 힘을 내는 이들이 있다는 것. 주먹다짐만큼이나 치열한 글쓰기를 하며, 감정을 한바탕 끓여내고 식히는 과정은 다름 아닌 삶의 치유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눌 이들을 만난다는 건, 돈 따위로 환산될 수 없는 묵직하고 뜨끈한 무엇이라는 것.

당장 먹고사는 일이 나의 삶을 압박해오더라도, '글짓기 교실'을 열 수 있는 그 패기를 닮고 싶다. 아무리 사소하고, 시시 껄껄한 이야기라도 진지하게 듣고 그 안에서 어떤 삶의 포인트를 짚어낼 수 있는 날카로운 시선 역시 갖고 싶다. 이왕이면 '돈키호테'처럼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자유롭기를. 그리고 조금 더 재미있게 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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