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씽킹 WEALTHINKING (양장) - 부를 창조하는 생각의 뿌리
켈리 최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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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을 따라 쓴 보물지도 가운데 '돈'과 관련한 것은 딱 한 줄, '책 살 돈만 벌고 열심히 놀자'밖에 없다. 여기서의 '책'에는 비단 책뿐만 아니라 책으로 대표되는 문화생활 일체를 망라한 것이기도 하고, 책만 하더라도 적게 사는 편은 아니기에 구체적으로 수치화하지는 않았지만 '책 살 돈'이라는 게 아주 작은 금액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달에 얼마를 벌고, 나머지는 놀자! 가 아니라 '책 살 돈'만 벌고 나머지는 놀자라고 쓴 것은 돈에 연연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것은 돈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이미 쓸 만큼은 있어요, 이런 건 더더욱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늘 '돈 안되는 일'이었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내게 좋았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재미있는 일 쪽을 택하겠다는, 일종의 의지 표현이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왔다. 충분한 돈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원하는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책도 실컷 봤다. 빌려보기도 하고, 사서 읽기도 하고, 서평단이나 가끔 출판사에서 조건 없이 책을 보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도움들을 빌어 한량처럼 살 수 있었다. 원했던 삶이었고, 충분히 좋았다. 이만하면 만족스러우니, 돈을 더 바랄 이유도 없다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보게 됐다. 만약 내게 돈이 많았더라면,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현실은 우리가 아는 원리, 그러니까 돈이 돈을 벌고, 배경 좋은 사람들이 기회를 잡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돈과 배경을 이길 수는 없는, 그런 원리로 흘러갈지 모른다. 우리는 자주 그런 서글픈 현실을 목도해왔다. 그래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우리는 절대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포기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본문 중에서, 72쪽)



아주 솔직히는 '돈이 많은 사람'이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돈이 돈을 번다는, 개인의 재능과 노력이 돈과 배경을 앞서기 힘들다는 현대사회의 경제 논리에는 동의하더라도 굳이 '돈이 많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해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보았다. 나에게 부자란 무엇인가, 나에게 돈이란 무엇인가 하고. 나열한 것 가운데 욕망하는 워딩은 없었지만, 부정하는 워딩도 없었다. 내게 돈은 그런 것이었다. 어떤, 도구.



하여, '돈'이라는 도구로 말미암아 더 좋은 것들을 많이 나눌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이 책이 매력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냥 돈을 많이 벌자, 어떻게 하면 많이 벌 수 있다! 하는 것보다- 돈을 벌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나눔'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실로 돈을 버는 일 또한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이뤄내기 힘들다. '나'만을 생각하던 것에서, '너'를 생각하고, 그리하야 내가 가진 것 가운데 '네가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돈이 필요하고, 돈이 벌린다. 그 묘한 관계의 순환 사이에 돈이 오고 간다는 게 새삼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뭐랄까, 이런 게 돈 버는 일이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뭔가 돈을 버는 일을 '온라인에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왜 그렇게까지? 그냥 나누어 드릴게요, 싶은 마음이었는데- '잘' 벌고, 잘 흘려보내면 그보다 더 좋은 경제활동도 없겠다는 생각이다. 자, 이제 뭘 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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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 - 박서련 일기
박서련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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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친구가 있다. 어느 날은 봤다가, 어느 날은 보지 않았다가- 그렇게 띄엄띄엄 친구의 일상을 만났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동생이 그 친구의 일기를 매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 그래? 하고 물었을 때는 조금 놀라서였고, 재밌어서!라고 했을 때는 어쩐지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친구는 그저 의식의 흐름을 따라 일종의 의식처럼 일기를 쓴다고 했다. 너무 오래 해온 일이라 빼먹은 날이면 어쩐지 찜찜하다고. 그래서 날짜가 며칠 지났더라도 기어코 그날의 일기를 쓴다고 했더랬다. 지구력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찾아볼 수 없는 나로서는 친구의 오랜 습관이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런 습관이 내 친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네?



이 책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는 작가 박서련의 일기 모음집이다. 그가 이제까지 써왔던 무수한 일기 가운데 이 정도면 모두에게 공개해도 되겠지? 싶은 것들을 추린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기는 일기라 굉장히 사적인 기록이다. 그와 일면식도 없고, 접점을 찾기도 힘든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꽁꽁 숨어있는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새벽시간의 탐앤탐스, 마라샹궈, 맥모닝, 위트앤시니컬같은 것. 내게도 어느 순간의 키워드가 될만한 것들을 바위 아래 숨겨진 보물을 찾듯 꺼내와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폈다. 글 쓰고, 게임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 커피와 맥주를 마시는 작가이면서 청년이면서, 한국인인 박서련은 그렇게 나와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평행선을 그어갔다.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좀 그려지려나, 싶기도 했지만 끝내 그런 일은 없었다. 뭔가 암호화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사실 그녀의 일상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집중해서 읽지도 못했다. 다만, 그 경쾌한 기분이- 어깨에 힘을 다 빼고, 쓰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써 내려갔다는 '느낌'만이 남아 '일기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아, 연말연시에 일기 쓰고 싶은 일기라니, 너무나도 적절했다!)



지난 일기를 읽은 H가 왜 일기에 자기 얘기는 안 써주냐고 했다. 만나야 쓰지, 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나서 어떤 사람 생각을 했다. 스무 살 때 이글루스 블로그 쓰던 나한테 누가 영화예매권 두 장을 선물한 적이 있다. 오로지 내 일기에 언급되고 싶어서. 그게 뭐라고 이런 짓을 하나요, 물었더니 네 일기는 재미있고 네 일기에 내 이름이 나오면 나도 재미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뭐 그런 대답을 들었던 기억이다. 그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인상이 아주 나쁜 것과는 별개로, 이 하나는 내게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기억되고 있다. (본문 중에서, 137-138쪽)



나란 사람은 워낙 충동적이면서도 재미는 없는지라- 아무리 어깨에 힘을 빼고 쓴다 한들 그렇게 가볍고 유쾌한 일기가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의식의 흐름을 좇다 보면, 어? 언제 내가 여기에 닿았어? 하는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르고, 그것이 내게 재미있는 자극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재미있어하고, 나를 살리고, 내가 먹는, 혹은 잊을 수 없는 일들. 뭐, 그런 것들 모두가 나하고 나 사이의 일이니까, 나와 나 사이의 어떤 지점들을 내 마음대로 써보려고 한다. (재미없으면 뭐 또 어때, 그것 또한 어쩔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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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프리퀀시 트리플 9
신종원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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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가는 실제 보드게임의 공용 장비인 구각뿔 주사위 두 개를 반드시 사용할 것.


2) 텍스트는 주사위를 굴려 나온 합: 0~99 사이의 값만큼만 전진할 수 있다.


3) 주사위를 굴리는 횟수는 열 번으로 제한하는데, 열 개의 평면 픽션을 새로운 십면체 주사위의 눈으로 구부려 접기 위함이다.


4) 위의 세 가지 게임 규칙은 석촌동에 거주하는 게임 기자이자 보드게임 마스터 이명규의 마스터링 아래 협의되었다. (아나톨리아의 눈, 본문 47쪽)



1.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를 좋아한다. 세 편의 소설이 한 권에 모이는 방식을 통해 작가는 일반적인 소설집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해볼 수 있을 테고, 독자는 당대의 새로운 시도들을 시차 없이 마주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하여 이 책도 반가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하지만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오랫동안 덮어두었다. 나는 또 한 번 나의 난독증을 의심해야 했다. 그러다 어제, 새해 첫 외출을 준비하면서 이 책이 다시 눈에 띄었다. 가방에 넣기 좋은 적당한 사이즈와 볼륨감... 때문이기도 했으나, 한 살 더 먹었으니 지난해의 내가 못 했던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영민하게, 해설부터 읽었다.



2. 나보다 먼저, 깊게 이 소설을 마주한 문학평론가 이소는 감탄이거나 낙담인 사이에 이 소설이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 말에 기대감이 일었다. 먼저의 경험은 낙담에 가까웠으나, 감탄이 될 수도 있을까? 싶었다. 그 문장에 기대 세 편의 소설을 읽었다.



3. 책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은, 다른 색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같은 팔레트를 쓴다. '아나톨리아의 눈' 서두에 등장하는 게임 규칙이 세 편의 소설에 모두 적용된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보기도 했더랬다. 소설가인 그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로 성실하게 게임 규칙을 따르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번에 굴릴 주사위에 어떤 숫자가 나올지 그도, 나도-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고, 그러니 이야기는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것이 처음에는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더랬고, 나중에는 아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세 편의 소설이 모두 같은 규칙으로 쓰여진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 데는 화자와 직접 대결하는 외부의 목소리가 설정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였다. '고스트 프리퀀시'의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저자는 그의 내부를 돌아다니며 청각에, 시각에, 혹은 꿈에 결함을 일으키는 목소리를 작품 내부에 직접 내려앉히는 방식으로 작품을 써나갔다. 그리하여 세 편의 소설은 누군가의 독백인 것 같으면서도, 대화인- 하지만 누구와 나누는지 모를 어떤 대화처럼 빚어졌다.



4. 그 대화의 밖에서, 온전히 제3자의 눈으로 소설을 읽는 나로서는- 그러므로,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듣고 있는 소리가 내게는 들리지 않고, 그에게는 보이는 것이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꿈같이, 그에게는 분명히 보인다는 변기 위의 귀신같이. 그럼에도 어떤 장면들은 아주 흥미로웠다. 특히 따옴표를 쓰지 않고 66과 99를 쓰던 친구는 오래 남았다. 그가 대학에 가서 쓴 빈 페이지들을 보며 적잖이 감탄했다. 그건, 아무나 내보일 수 없는 용기니까.



무언가 픽션이 되면 그것은 사라진다. 소설가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든 목소리는 굽이치는 파흔을 남기게 마련이며, 그러므로 글쓰기는 오래전부터 잉크를 빌려 목소리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안티노이즈로 사용되어왔던 것이다. 따라서 소설가는 다시 불을 끈다. 주위를 더듬어 의자에 다가가 앉는다. 거기서 그가 하는 것은 단지 듣는 것이다. 어둠 또는 희미한 분광의 심박을 헤아려보듯, 작은 녹음기의 두 귀를 앞으로 내민 채.


3, 2, 1... REC [●] (고스트 프리퀀시,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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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못했을까?
와쿠다 미카 지음, 오현숙 옮김 / 길벗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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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는 거의 안 읽는 편이지만, 육아서는 가끔 먼저 찾아 읽게 된다. 내 고민에 대해서는 '조금 돌아가면 어때, 그 안에서도 분명 얻는 게 있을 거야.'하고 너그러워지는 부분도 아이에 대해서만큼은 왠지 모르게 불안하거나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이의 어제가 오늘과 완연하게 다르다고 느껴질 만큼 아이의 성장이 빠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아이의 오늘은 나의 오늘과 그 가치가 같다고 느껴지지 않게 되고, 아이의 시간이 빨리 흐르는 만큼이나 뭔가 더 해줘야 할 것 같은, 혹은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 집 꼬맹이는 여섯 살. 이제 보름 뒤면 '예비 초등'이라는 일곱 살이 된다. 일곱 살을 앞두니 주위에서 "채니는 요즘 어떤 거 해?", "내년엔 어떻게 할 거야?", "학원은 어디 안 보내고?" 하는 말들을 심심찮게 듣게 된다. 내년에도 학습 관련한 계획이 전혀 없는 나는 '그냥 올해처럼 지내는 거지, 뭐'하고 말지만, 그들의 머리 위에 뜬 물음표는 쉽게 내게 전염되어 '뭔가 해야 하는 건가?'하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된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특별한 계획도 없으면서 아이는 다그치는 상태'가 되었다. 자주 잔소리를 늘어놓게 되고, 이유 없는 화가 치밀기도 했는데- 그 원인이 모두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면서,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왜 나는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못했을까?

'아이가 말을 안들어요'가 아니라,

'엄마가 내 말을 안 들어줘요'는 아닐까?


칭찬을 하든, 꾸짖든- 중요한 것은 '훈육'이고, 억지로 바꾸려고 한다고 해서 아이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지난 5년간의 육아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자꾸만 꾸짖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먼저 튀어나왔다. 인정하고, 가르치고, 전달하고, 생각하게 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아이'로 성장시키겠다고 머리로는 다짐해도, 실천은 잘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 잘 안됐다. 요즘 아이의 서사는 캐릭터 하나로 시작해 끝도 없이 공상의 세계로 빠졌다가 30여 분을 무중력의 상태로 헤매고 나서야 맺어지기 마련인데, 그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야기의 짜임새가 탄탄할 리 없으니, 자꾸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등장하거나 갑자기 사건이 종결되고 다른 상황으로 점프하기도 하고=_=) 그럼에도, 들어줘야지. 암요 암요. 책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이가 흡족한 얼굴로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주라고. 그런 경험들이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줄 테고, 부모와 신뢰가 쌓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모두 맞는 말이라 굳이 줄을 그을 것도 없었다. 괜히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보며, 오늘은 너의 티니핑 세계관을 꼭 집중해서 들어줄게!하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이 다짐은 눈녹듯 사라지고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경청'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정말이지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해 봐야겠다고는 생각한다. 눈 녹듯 사라지고 없으면, 내일 다시 결심할게. (아이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주위 사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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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로버트 판타노 지음, 노지양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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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음은 어디쯤 와 있을까. 태어났으므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나의 일일 거라는 데까지는 쉬이 가닿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여기의 건강하고 아직은 젊은 내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조금은 형이상학적일지 모르겠다. 죽음의 실체를 경험하지 않고, 그것을 상상하여 쓰는 것이므로.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정말이지 진지하게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 역시 마주해야 하는 일, 그 언젠가가 어쩌면 오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다.


이 책 <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의 저자 로버트 판타노는 서른다섯의 젊은 소설가였다. 악성 뇌종양을 진단받았던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을 일기 형식의 에세이로 기록했다. 이 글들은 그의 노트북에서 발견된 유일하게 저장된 문서였다. 모든 것들의 끝에서 남긴 메모들. 그는 몸을 짓이기는 고통 사이에서 '나'는 누구인지, '나의 삶'이란 무엇인지, 이 세계에서 '나'의 존재란 무엇이었던지를 담담하게 탐구했다. 사실 육체의 고통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써 내려가며 어떤 문장으로 이 긴 글을 끝맺어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



사실, 아주 멀리서 본다면 우리 중 누구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똑같은 관점에서 아주 밀접한 거리에서 보면 우리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중요한 존재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실체 없는 가상의 물질로 수렴된다. 모든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잊히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90쪽)



내가 악성 뇌종양을 진단받았다면- 나는 연명치료를 원했을까, 병원에 있었을까(아니면 집으로 돌아왔을까), 가족이 나를 돌봐주기를 원했을까(아니면 간병인의 돌봄을 원했을까), 무엇을 좀 더 해보고 싶었을까, 어딘가에 가고 싶었을까, 마지막으로 보게 될 책이나 영화는 무엇일까, 누구를 만나고 싶고, 무엇을 먹고 싶었을까. 혹은 그 모든 것들이 다 의미 없는 것이라 생각되었을까. ... 아주 멀리서 본다면- 어떤 사람이 지금 얼마나 중요하고, 중요했는지,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게 누구건 간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과연 무엇이 중요했던지조차 판단하거나 기약할 수 없는 채로 잊힐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성공과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각자의 처참한 순간들과 함께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 세상의 진짜 끝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쥐고 떠날 수 없다. 물론 슬프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더욱 빛난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따뜻한 커피, 언제고 읽을 수 있는 책, 해야 할 일의 리스트- 그런 것들은 지금 내가 살아있으므로, 오늘의 나를 위한 것이므로 귀하다.



하지만 언젠가 세상의 끝을 마주한다면, 그것들을 놓을 수 있는 용기도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일에서건 관계에서건, 물리적인 것에서건)가 무사히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기를. 잊혀도 좋을 만큼 넉넉하게 채워지기를. 그리하여 내가 난 자리가 숭덩한 느낌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의 나는 진실한 마음으로 그것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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