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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나라에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마리트 퇴른크비스트 그림, 김라합 옮김 / 창비 / 2022년 1월
평점 :
“아무래도 예란은 다시는 못 걷게 될 것 같아요.”
엄마의 목소리는 슬펐어요. 하지만 종일 침대에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또 블록 쌓기를 하는 예란의 일상은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어스름 녘이 되면 어스름 나라에 사는 백합 줄기 아저씨가 찾아오거든요. (사람들이 허깨비 나라라고 하는 바로 그 나라, 맞아요!) 이 그림책은 백합 줄기 아저씨가 처음으로 예란을 데리러 온 날의 이야기에요. 그 날은 엄마가 ‘아무래도 예란은 다시는 못 걷게 될 것 같아요’라고 말한 바로 그날이었어요.
예란의 집은 삼 층에 있었고, 창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아저씨는 곧장 창문으로 들어왔어요. 바둑판무늬 외투를 입고, 머리에 높다란 검정 모자를 쓴, 아주 작은 남자였죠. 그는 스스로를 ‘백합 줄기’라고 소개했어요. 혹시 어스름 나라에 가고싶다면 데려가 주겠다고요. 다리가 아픈것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니- 예란은 곧장 따라나섰지요.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집니다. 하늘을 날게 되기도 하고, 사탕이 열린 나무도 만났어요. 전차를 운전하기도 했는데, 전차가 철로를 벗어나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동물원에서는 레몬주스를 마시고 싶다고 소리 지르는 아기 곰을 만나기도 했고, 아주 자유로운 사슴을 만나기도 했지요. 예란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을거에요. 그럴 때마다 백합 줄기 아저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 이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어스름 나라에서 돌아온 예란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대에 앉아 있어요. 하지만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지요. 걷지 못하게 된 슬픔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 덕분에 어스름 나라에 갈 수 있게 된거라면 예란은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 같아요.
불을 밝힌 도시의 전경을 보며, 예란의 ‘어스름 나라’에 대해 오래 생각했어요. ‘어스름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 예란에게 ‘어스름 나라’는 어떤 곳일까-하는 것부터, 나를 침대에 묶어두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필요한 ‘어스름 나라’는 어떤 곳일까, 하는 것까지요. 그러다 문득- 예란에게 백합 줄기 아저씨가 온 것이 우연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란이 어스름 녘을 기다리며 펼친 책 때문이겠지요. 만약 예란이 책을 펼쳐들지 않았더라면, 어스름 나라는 그의 삶에 끼어들지 못했을거예요. 걸을 수 없고, 움직이고 싶을 때 곧장 도와줄 사람도 없는 예란에게 삶은 어쩌면 절망일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 아이는 책을 펼쳐들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갔어요. 그 작은 움직임이 그 아이의 삶을 바꿀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같은 맥락에서 프리다 칼로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어스름 나라는, 곧 예란에서부터 시작된것. 날 수 있게 된 것도, 상상하는 모든 일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도요. 다시, 표지를 마주하며 예란과 백합 줄기 아저씨의 여정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매일이 새롭기를, 오늘은 어제보다 더 신나는 모험을 하기를 바라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