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실습하던 어느 날이었다. 심정지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 온다는 문자가 왔다. 코드 블루였다. 2년차 레지던트가 내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의 불평 섞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1층으로 잽싸게 내달렸다. 금요일 새벽의 정적을 깨우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곧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EMS 요원들이 대기 중이던 의료진에게 짧게 브리핑하고 환자를 침대로 옮겼다. 흉부를 빠른 리듬으로 압박하는 기계가 가슴 위에 둘려져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벗겨내고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심장은 이미 멎은 상태였다. 환자의 가슴에 압박을 멈추면 심전도가 평행선으로 바뀌는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이 광경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고 있던 나는 소름이 돋았다. 과연 그를 살릴 수 있을까. 산소 마스크를 씌운 탓에 얼굴 윤곽조차 보이지 않던 환자는 발가 벗은 체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주한 움직임 속에 배려나 관심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의무감, 지루함 같은 게 공기 중에 느껴졌다. 응급실을 가득 채운 따분한 기운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의지를 잠식시켜 버린 듯, 모두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사망시각을 알리라는 담당의사의 지시가 내려진 순간 내가 느꼈던 건 분노였다. 


의식이 없는 상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던 애매한 상황. 오히려 빨리 그만두는 것이 미덕이었을까. 그 사람은 도대체 언제 죽은 걸까. 생과 사를 가르는 모호한 경계선이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같이 일했던 Critical Care PA가 중환자실에 올라와서,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누구나 이 침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거라고 무덤덤하게 얘기했다. 문득 의식적으로 회피해왔던 나이듦과 외소해짐에 대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죽음을 위한 준비는 은퇴 후에 걱정해야 될 것쯤이라 생각했다. 오랫동안 죽음이라는 개념이 실재하지 않는 관념 속에만 머물러 있던 탓이다.


아내가 전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자기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고통을 느끼지 않을 거 같다고 말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건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나오는 고백인가. 아니면 죽음에 대한 무관심의 표현인가. 


철학자 강신주도 "어쩌다 어른"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비슷한 말을 했다. 스피노자를 인용하면서 죽음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리고 타자의 죽음.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우리가 공감하거나 느낄 수 없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바로 두 번째 죽음, 즉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다. 우리는 서로의 죽음을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인생을 충만하게 산다는 것에 죽음을 의식함이 포함되어 있다면 매 순간이 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상기하며 날마다 애쓰면서 살아가야 할텐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인생의 후반전은 '너와 나'의 행복으로 가득차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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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량의 책을 단기간에 구입하게 된 건 순전히 조바심 때문이었다. 대학원 생활을 통해 지식의 전문화를 추구했지만 결국엔 무식해지고 말았다. 물론 학교에는 교양있고 똑똑한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한 나는 고시공부에만 몰두한 나머지 다른 분야에 대해선 편식을 하게 된 꼴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 변한다. 그건 진리다. 간혹 가다가 책 읽으면 뭐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데, 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내 자신이, 마음이,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그 말은 어리석은 말이기도 하다. 그건 마치 오늘 당장 내가 팔굽혀펴기를 50번 하고, 아 난 달라진게 없어, 라고 결론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책을 읽는다는 게,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숙성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해서 생기는 오해이다. 변화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개 고통이 수반된다.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반복이 포함됨을 의미하고, 인간의 뇌는 반복을 기피하는 습성이 있으므로,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곧 고통스럽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팔굽혀펴기를 딱 하루 50번 했다고 달라지는 것은 당연히 없다. 하지만 그걸 한달 내내 반복한다면, 그 사람의 몸은,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삶은 어느 정도 바뀌게 되어있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을 하루에 10분씩 한 달간 읽으면 한 권을 독파할 수 있다. 한 시간씩 읽으면 두세 권을 읽는 것도 가능하다. 엄선된 책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반복적인 학습을 한 사람은 결국 변할 것이다. 그것은 진리다. 거부할 수 없는 자연법칙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방법론의 문제를 제기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고민거리가 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이 시대에 사람들은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비용과 댓가를 치루는 데에 인색해졌다. 하지만 인생에 꽁짜는 없다. 뿌린만큼 거두는 게 인생이다. 책을 읽으면 반드시 변한다. 단 "꾸준히"라는 단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결국 자신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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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기를 쓴다.


폭풍이 한 차례 대륙을 지나가고 추운 날씨도 주춤해질 때즘, 레지던시 인터뷰 시즌도 드디어 막을 내렸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이 시간이 내 앞에 성큼 다가오자 여러 복잡한 감정과 기분에 휩싸였다. 이 느낌은 뭐지? 불안함, 그리고 설레임. 이젠 다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 휴식에 대한 갈망,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아쉬움, 아내와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어찌 이리 복잡할 수가. 그래도 다행이다. 하나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어쨋든 하나님의 은혜로 이 과정을 지금까지 잘 버텨낼 수 있었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졸업을 한다.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소망하게 되는 이 시기를 나는 지금 잘 보내고 있는가. 과연 내가 내린 선택은 옳은 결정이었을까. 그에 대한 책임을 난 온전히 다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내 인생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이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게 되었다. 바꿀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 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쉴 때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당연히 독서다. 읽고 싶은 책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가격을 메겼다. 그리고 100불 단위로 묶어서 구매계획도 세웠다. 100불 어치를 4번 정도 사면 지금 내가 당장 읽고 싶은 책들은 다 커버할 수 있다. 근데 역시 무리다. 대학원 시절 내내 읽지 않고 사재기한 책들이 40권은 족히 넘는다. 그것들 중엔 묵직하고 두꺼운 책들도 많아서, 이젠 책장에 꽂아놓고 구경하는 것조차 힘들어질 지경이다.


요즘 유시민의 책들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플로리다에 갇혀서 호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5일 동안 이북으로 다운받은 작가의 책을 속독했다. 읽으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데다 하소연하는 모습이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와 작가에 대한 애정이 다시 싹트였다. 그건 일종의 인식의 변화였고, 늘 견지해왔던 글쓰기와 독서에 대한 내 태도에도 어느 정도 균열을 일으키게 한 아주 운 좋은 만남이었다. 그러니깐 난 제대로 독서를 한 셈이다. 그렇게 화가 나고 어의가 없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난 글을 읽고 있었고, 작가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이 좋았다. 외롭지 않아서.


유시민의 책은 예전에 4권 정도 읽었고, 지금 세어보니 안 읽은 책이 열댓권이나 된다. 지식습득의 목적보단 글쓰기와 독서 훈련에 더 적합하다고 느껴져서 그의 책은 꼭 챙겨 읽는다. 앞으로 전부 차근차근 읽어나갈 생각이다.


수고 많았다. 엄숙히 결과를 기다리고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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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블로그를 시작하려고 여러번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었다. 

그래서 서평을 올리는 것보단 내 일상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먼저 채워넣기로 했다. 

날짜별로 기록되고 제목도 붙일 수 있으니 검색에 있어서는 일반 워드보다 훨씬 편리하다.


생각이 많아진다.

아직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진짜 이래도 되는 건지, 싶다. 

아니면 나도 모르는 어떤 변화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내가 인지할 수 없다면 그건 변화가 아닌 것인가.


내 아내를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블로그를 다시 시작한다.

이건 일단 비공개이고, 마이리뷰는 조금씩 채워나갈 계획이다.

책 읽을 시간, 분석하고 생각할 시간, 그리고 글 쓸 시간이 나에게도 과연 생기기나 할 것인가.


그래도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뎌 본다.

독서하는 인생엔 희망이 남아있음을 믿는다. 

암튼 한 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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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여행 에세이, 개정판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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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과 독서, 그리고 여행이 한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했는지, 작가가 과거의 상처와 내면의 아픔을 직면하고 승화시켜서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성장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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