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의 민간인(民間人)은 전쟁과 상잔의 비극을 단 두 연의 압축적인 문장들로 보여준다. 두 번째 연을 읊어보자면 다음와 같다.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 백일을 넘어섰고(지난 63일 기준), 아직도 러시아는 이 침공을 전쟁이라고 명명하지 않고 있다. 문득 생각나 민간인을 다시 펼친 얼마 전, 난 정말 이 수심(愁心)을 어떻게 가늠하겠냐고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했다.

 

전쟁 속에서 쓴 일기는 재바르게 한국으로 넘어왔다. 올가 그레벤니크가 그림과 글로 남긴 전쟁일기: 우크라이나의 눈물(정소은 옮김, 이야기장수, 2022)은 그가 자신의 두 아이와 전쟁 발발 후 지하 생활을 거쳐 탈출하기까지의 기록이다. 폭죽 소리인 줄 알고 깼던 224일 새벽 5, 하지만 그 시끄러운 소리는 사위에 떨어지는 폭격 소리였고 올가는 네 살 난 딸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과 연락처를 적어주며 “‘전쟁이란 놀이”(8)하고 있다고 설명해야 했다.

 

내 인생 35년을 모두 버리는 데 고작 10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86)는 올가의 말이 너무도 슬펐다. 천천히 한 줄 한 줄을 머금으며 전쟁일기를 읽던 내 마음이 무너진 건 이 대목에서였다. 가까스로 비행기에 오른 올가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마지막 순번으로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짐칸에 우리 가방을 넣을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 나는 겉옷과 배낭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 엉엉 울고 싶었지만, 바로 곁에 내 아이들이 있었다”(128). 결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현실 앞에서 눈물마저 삼켜야 하는 순간.

 

얼마 전 KBS 1TV에서 <우크라이나 침공 100> 특집 2부작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전쟁일기와 마찬가지로 민간인의 눈과 목소리로 전쟁의 실상을 담아냈다. 그중 2부는 테티아나의 일기. 한국과 인연이 깊은 우크라이나의 평범한 여성 테티아나는 모친과 아들을 폴란드로 피난시키는 대신, 자신이 모국의 수도에 남아 시민기자로서 전쟁의 실상을 영상 일기를 기록했다. 어렵게 만난 그의 외조부와 외조모의 말이 잊히질 않는다.

 

- 라이사(테티아나의 외할아버지): 지옥이 따로 없지, 지옥이지, 내 인생 말년에...

- 아나톨리이(테티아나의 외할머니): 내가 앉아서 네 외할아버지한테 말했어 보세요, 우리 삶이 2차 세계대전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나네요

 

지옥이 다시 그곳에 있다. 그 지옥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똑같은 지극히 작고 평범한 사람들이”(정소은, 134)있다. 올가는 전쟁일기를 쓴 이유에 대해 “‘전쟁 그만!’이라고 외치기 위해서”(14)라고 말했다. 여기의 나는 무력하고 무참하지만 그래도 소리 내 외쳐본다, 전쟁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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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나를 가장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던 말 중 하나가 문제인 걸 알고 있지만, 여기서 그렇게 열을 내면서 말한다고 해도 바뀌지 않아요였다. 두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1) ‘여기서 바뀌지 않는 이야기는 여기서 굳이 꺼낼 필요가 없는 이야기가 될까, 그리고 2) 이미 안다는 건 무엇을 안다는 것이며, 이미 안다고 전제하는 이야기는 당연하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덮어두어도 되는가. 가령, 나는 아이 10명 중 6명은 낮에 부모가 돌봐육아부담 15년 만에 최고(연합뉴스 20211129) 기사가 가임 기혼여성의 출산 (계획) 기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았고(출생율 지적), 누가 아이 안 낳는지 밝혀졌다”.. 70년대생 직장인 여성 20% ‘무자녀(매일경제신문 2022123) 기사를 보았다. 구태여 보도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결혼, 출산, 육아휴직에 관한 선거 후보들의 공약은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이렇듯 관심의 대상인 출생율에 관해, 언론에서 언급하고 정부에서 지원하고 공직자들이 공약을 내건다고 해도 현실 출생율의 증가는커녕 감소를 둔화시키긴 했는가? 그래도 계속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의 즉각적인 시정을 위해서인가 현실에서의 보다 나은 가능성의 모색과 기약을 위해서인가. 이 모든 물음표들과 수사의문문들을 차치하고, 더 간단한 답을 내려 보자. 이야기가 계속되는 이유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문제라서다. 어가는 문단이 길었지만, 오늘 내가 다루는 책이야말로 아주 오랜 시간 여성적 또 비생산적’(돌봄 선언14, 이하 쪽수만 표기)이며 여성의 일”(19)로 알아왔고 그래서 덮어두고 얘기하려 들지 않았던 돌봄에 관해 인식적·실천적 지평의 급진적인 확장을 선언한다. 더 케어 컬렉티브(돌봄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2017년 영국에서 결성된 단체)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은 제목이 알려주듯 돌봄에 대해 선언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돌봄의 결여를 확산시켰고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며 운을 떼는 이 책은 개인이 개인과 맺는 관계에서부터 전 지구를 대하는 관계에 이르기까지 팽배한 무관심의 지배”(18)에 맞선 대안의 윤곽을 그리고자 시도한다. 저자들은 돌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개인적 능력”(18)임에도 너무 많은 돌봄 요구”(82)너무 오랫동안 시장가족에 의존해 해결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돌봄 선언을 읽다보면 돌봄이라는 도탑고 따뜻하고 포근하고 왠지 엄마가 떠오를 것 같고 동시에 필요한 행위지만 돈 벌고 먹고 사는 일보단 엄청 더 중요한 것 같진 않고 나도 하긴 할 순 있으나 막상 또 하려면 조금 성가시거나 품이 많이 들 것 같다고 여겨지는 이 단어와 행위가 얼마나 급진적이고 포괄적인 가능성의 역량으로 심화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돌봄에 대해 쉽게 떠올릴 직접적인 대인 돌봄에서 더 나아가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17)까지로 개념을 확장한다. 그리고 난잡한 돌봄의 윤리”(80)를 주창하고 보편적 돌봄”(41)을 구체화한다. ‘난잡한 돌봄은 돌봄이 모든 규모의 사회 영역에서 개인이나 가족 단위를 넘고 더욱이 인간을 넘어 비인간에게까지도 차별 없이 실천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보편적 돌봄이란 돌봄이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되고 중심에 놓이는 사회적 이상”(41)을 뜻한다.


저자들은 난잡한 돌봄과 보편적 돌봄이 가능한 지구와 미래를 그릴 대안을 정치, , 공동체, 국가, 경제로 나눠 짚어간다. 선언과 주장 곳곳에는 선례가 될 만한 주로 유럽과 미국, 간혹 남미에서의 연대와 돌봄의 실천들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돌봄 선언에서 인상적인 건 돌봄과 시장의 관계를 불신하는 대목들이다. 요컨대 돌봄의 중요성을 이미 알기 때문에 돌봄 노동의 가치를 임금 인상의 방식으로 이어가자와 같은 생각은 이 책의 관점에서 아주 순진하고 편협한 대안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돌봄 노동의 저평가와 착취를 더욱 악화시킨 원인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겨냥하는 이 책은 돌봄과 자본주의 논리는 타협할 수 없다”(142)고 강력히 설파하며 돌봄 인프라의 탈시장화와 모든 생애주기에서”(120) 돌봄을 거의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국가를 요망한다


누군가에게는 돌봄 선언의 부분부분들이 조금 과격하고 비약적으로 느껴진다고 하겠지만 오히려 이것이 선언문이기에 가능한 범위라고 생각하며, 더군다나 4일제 캠페인”(125)이나 협동조합과 인소싱부터 () 시장의 지역화”(156) 등과 같이 우리네 일상과도 멀지 않은 실천적 대안들도 곳곳 있고, 더더욱이나 돌봄이 이토록 광대한 사회·정치적 현안들로 증식될 수 있다는 건 기존에 우리가 쉬이 안다고 믿은 돌봄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다시 이 글을 열었던 내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안다고 믿는 건 많은 걸 덮어버린다. 게다가 그렇게 덮어버림으로써 더 많은 걸 볼 수 있고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재단한다. 돌봄을 손쉽게 안다고 치부하고 덮을 때 주4일제 노동 같은 피부에 더 와닿는 논의로 뻗어나갈 가능성을 잃는다. 또한 문제는 계속해서 떠들어야 한다. 그게 지금 여기서 당장 시정되지 않을지라도 문제라는 이유는 그자체만으로 떠들 수 있어야 한다. 팬데믹 이후 돌봄이 결여나 공백과 짝을 지어 이야기 터져 나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좌시했던 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해 좌고우면했던 태도의 수면 아래에서 더 많은 문제들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돌봄 선언은 그간 사적 영역이나 시장으로 내몰렸던 돌봄이 여성을, 이주민을, 글로벌 사우스를, 환경을 그리고 지구를 어떻게 무관심의 영역으로 덮어버렸는지를 통탄한다. 저자들은 돌봄의 어려움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는 전망에는 회의적이지만, 그 어려움을 완화할 수 있다는 전망에는 긍정적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열을 내고 말하고 떠들 것이다. 이건 단지 내가 돌봄 노동의 주체라서만이 아니다. 이를테면 지난 해 6월에서야, 그러니까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지 68년이 지나서야 가사근로자 고용개선법(이하 가사근로자법)이 통과된 현실 안에서, 나는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을 절감한다.


작년 나를 장 깊은 생각으로 몰고 갔던 일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으니 조금은 희망차게 이 글도 마무리해볼까 한다. 2021년 읽었던 모든 책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문장이다. “가사, 양육, 간병 등 돌봄노동은 힘들고 번거로운 의무인 것처럼 인식되지만, 한편으로 자기 자신과 친밀한 사람들은 돌볼 기회와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삶의 본질적인 기쁨이자 누구나 생애 주기 속에서 원하는 때에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권리이기도 하다”(이철수, 이다혜, 영혼 있는 노동, 스리체어스, 2019, 71). 우리는 누구나 어떻게든 돌봄을 통해 자랐고 살아가고 있다. 멋지지 않은가, 돌본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애 주기에서 경험해야 할 권리이기도 하다는 것. 그렇다, 돌봄은 알고 있더라도 여전히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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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에르 드 부아르> [5호 도시의 욕망]은 제호아래서 기대될 법한 화려한 도시의 풍경을 개괄하거나 설명하기보다, 오늘날의 도시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인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지적한다. 요컨대, 전지구를 호령하는 여러 기업의 본사가 있는 시애틀이 다양성의 도시를 표방하지만 실은 고학력 지적 노동자들을 위한 도시에 진배없다는 시애틀, 창조도시의 비인간적 실험실(브누아 브레빌, pp.54-66)이나 혁신자유라는 참 좋은 단어가 부자들에게만 적용된다는 부자들의 자유가 충만한 도시, 보스턴(토마스 프랭크, pp.127-133)은 한 도시의 현 상황을 면밀히 짚어가며 결국 오늘날의 도시란 과연 누구를 위한 도시인가라는 냉철한 질문을 던진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두 편의 글은 2부에 연이어 있는 애플이 바꾼 중국인의 삶(조르단 푸유, pp.82-94)빈곤, 아시아 도시화의 덫(자크 드코르노아, pp.95-99)이다. 전자는 폭스콘을 비롯한 중국의 전자제품 생산업체가 위치한 도시와 노동자의 풍경을 형용사나 수식어 없이 건조하게 기술해가지만, 회색 도시의 노동자들이 근근이 살아가는 암울한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되게 한다. 드코르노아의 글은 아시아의 도시화가 가난을 낳고 제도적인 불공평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비롯해 비공식 노동의 현실, 여성과 아이 그리고 빈자들이 처한 취약성까지 도시의 병폐를 전방위적으로 제언한다. 특히 도시 지역의 빈곤 퇴치 문제는 시장에 내맡길 수 없다는 유엔 연구 보고서의 문구로 결말부를 정리하는 이 글은 <마니에르 드 부아르> 5호에 실린 글들이 견지한 전반적인 태도를 간명하게 드러낸다.

 

<르몽드>의 글들은<마니에르 드 부아르>에 실린 글들은 다수 <르몽드>를 출처로 갖는다, 본 호 p.200 참조자주 마지막 문장들이 의문문이다. 가령 이런 식. “과연 대도시가 포퓰리즘 해독제에 최적격이라 볼 수 있을까?”(p.124) “사무실과 주택 비율을 조화롭게 유지해 소외계층의 접근성을 높이고, 지역 주민과 연계해 도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이상주의적인 희망인 것일까?”(p.110) “과연 낙수효과라는 신화가 현실이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먼 게 아닌가.”(p.49) “코로나19 위기가 솔리다리테(Solidarité, 연대)의 시대를 열 수 있지 않을까?”(p.23) “어떻게 해야 이 야박한 도시에서 살아남을 것인가?”(p.14) 우린 이 질의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숙의해야 한다. 이 물음들은 도시 더 나아가 사회의 향방에 대한 거시적인 윤곽선만 그린 채 구제적인 토의와 실천들로 메꿔지길 기다린다.

 

사는 것은 원래 낭만이 아니다”(김지연, p.191)라는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는다. 누구에게나 산다는 것이 감미롭고 감상적일 수 없다만, [5호 도시의 욕망]이 보고하는 것은 도시 내부에서 비가시적으로 그어지는 어떤 선들이 더 팽팽해지고 질겨져 누군가를 가장자리로 내몰고 삶의 양태를 옳지 못한 방향으로 바꾸고 있다거나 더 나쁘게는 터전마저 빼앗고 있다는 사실들이다. 그리고 이건 어떤 도시도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나 역시 오늘도 위태롭게나마 “‘영끌끝에 중심지에 힘들게 안착”(성일권, p.14)하려 발버둥 친다. 나도 질문을 던지며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이건 과연 우리의 순수한 욕망일까, 도시의 일그러진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일까.

 


르몽드코리아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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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기 위해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났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 내 최대 취미는 매일 오는 신문의 텔레비전 편성표를 펼쳐놓고 무엇을 볼까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치던 것이었다. 간혹 프로그램명 밑에 작은 글씨로 소개글을 짤막하게나마 달아놓았던 칸도 있었는데, 이걸 읽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였다. 시간별로 구획된 단정한 칸들 안에 빼곡히 써진 각종 텔레비전 프로그램들과 나의 주말 단잠을 포기하게 만들던 <디즈니 만화동산>까지, 그때의 내 작은 일상은 편성표와 함께 맞춰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 <가요톱10>을 보려 부랴부랴 밀린 학습지를 풀었고, <연예가중계>를 보려 엄마에게 나름의 로비(!)도 했었다, 콩을 다 먹을게요, 동생과 안 싸울게요, 내일 약수터에서 물 떠올게요.

 

한 지방 초등학생의 “일상과 시간성에 영향”(154면)을 상당히 끼쳤던 텔레비전 프로그램 편성 역사에서 1980년대는 주요한 위치를 담당한다. 또 하나의 국민 시계이자 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30면 주1)인 텔레비전은 당시 정권에 의해 “‘전파영토’를 전유”(133)했고 “당시의 사회적 시간에 간섭하면서 시청자로 하여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뉴스의 시간성과 리듬을 의례적인 일상의 리듬으로 받아들이게 했다”(148면). 컬러방송과 아침방송, 각종 미디어 이벤트(156-59면, 일상적인 시청과는 다르게 축제적인 시청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1981년 제62회 체전’이나 ‘국풍 ’81’) 등은 “텔레비전의 시간성과 국민의 일상시간이 점차 연동”(155면)시키고 “텔레비전을 매개로 해서 국민의 일상시간이 정치적 자원으로 동원 가능”하게 했다. 정부의 입김이 셌던 만큼 시청자들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1984년 시청자들은 “시청료 거부운동”(165)을 통해 시청자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이것이 당시 정권과 체제의 변혁을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김학선의 <24시간 시대의 탄생>은 텔레비전 뿐 아니라 1980년대 국민의 일상 시간을 주무르고 그것을 자원으로 이용하려했던 신군부정권의 정책과 그 집행과정들을 풍부한 통계자료에 근거해 파헤쳐 간다. 나에게는 낯선 ‘야간통행금지제도’(제2부 3장), ‘등화관제훈련’(제2부 4장), ‘서머타임’(제4부 8장)이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24시간 시대의 탄생”(5면)과 여전히 존재하는 줄 몰랐던 ‘국민생활시간조사’(제3부 5장), 근대적 국민국가의 정체성과 일체감을 상징화하는 ‘국경일, 법정기념일, 법정공휴일 제도’(제4부 9장)는 1980년대의 시간정치의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당시의 시간성을 둘러싸고 저항하고 기꺼이 충돌했던 국민들의 반향이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사회적 시간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과 그들이 일상을 구성하고 통제하는 수단인 동시에 그 일상의 경험을 거쳐 새롭게 조직되는 결과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14면).

 

<24시간 시대의 탄생>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시간 규율을 내면화하고 있는 우리네 의식의 연원이 1980년대의 “근대화 담론 속에서 근면 이데올로기와 연결”(20면)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저자는 “1980년대 시간성의 변화는, 발전국가 시기였던 1970년대와 민주․소비사회로 지칭되는 1990년대를 연결하면서 이후 대한민국 사회를 21세기 성과사회로 나아가게 한 하나의 변곡점으로 역할”(67면)했다고 지적한다. 근대적 시민이나 세계화 시민을 양성한다는 하에 실은 국민의 시간을 발전을 추동하게 하는 자원으로 인식하고 관리하려했던 1980년대 국가의 주체 논리가, IMF를 거치고 신자유주의와 함께 개인에게로 옮겨온다는 것이다. 푸코의 입을 빌리자면 ‘자기 자신의 기업가’이며 한병철의 입을 빌리자면 성취하는 개인으로 재탄생한 개인이 ‘지배없는 착취’를 행하는 것. 이제 모두에게 시간은 곧 돈이다. “자본은 더이상 토지나 노동과 결합하지 않고도 순환을 통해 이윤 창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돈과 등치된 시간도 마찬가지로 노동과 직접적인 관련 없이 증식․투자․축적․순환이 가능”해짐에 따라 “하루 24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한정된 자원이 아니다. 이러한 시간성의 지속은 시간과 돈의 빈부격차를 더욱 벌려놓는다. (…) 현대사회에서 시간 빈곤의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의 게으름이나 나태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시간과 돈의 구조적 연결에 기인한 것이다”(22-23면).

 

내가 가장 자신 있는 ‘킬링 타임’(killing time). 그러나 킬링 타임을 하고 나면 난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모두가 자신의 시간에 미시적으로 정치를 해야 하는 이 시대의 논리에, 시간을 돈처럼 아껴서야 하는 이 시대의 논리에 역행하는 행동이기 때문일까? 1980년대의 시간 정치의 양태를 아주 꼼꼼하고 세심하게 살펴본 저자의 수고에 감사하며, 「마치며」에서 그가 언급하듯 1990년대와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1980년대의 시간성에 대한 저자의 다음 연구를 기대하게 한다. 그리고 <24시간 시대의 탄생>은 내게도 다른 여지를 남겼다. 나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시간자원의 양극화 현상”이 계층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공간자원마저 오그라드는 상황들을 다소 목격했다. 이에 대한 연구도 찾아보고 싶다. 


덧붙이는 말. 아는 교수님들이 미주에 많이 등장해 반가웠다.



* 함께 읽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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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되풀이된 경험을 통해 느낀 바 있다인간이란 어떤 경우에서건 자기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기대치를 결국에는 낮추거나적어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행복은 결코 지성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심장침대식탁안장난롯가 그리고 전원 등에 있는 것이다." (289 재인용)


부제인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오늘날의 우리들이 허무주의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유명 작품들과 작가들을 따라가며 비판도 하고 보완도 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인간 존재의 확장은 무엇에 관심을 가질 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이미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데 있다는 얘기다”(367). “우리는 탈마법화된 우리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성스러움들을 찾아내는 기예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376). 결론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모든 순간은 빛나기 때문에 사건과 순간에 나를 내맡기고 의미를 관조하라는 정도가 되겠다. (ps. 나에게 남은 질문. 그렇다면 인식이나 사고의 전환이 해답이란 것과 차이가 있을까? 보다 큰 구조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는 채로 남지 않을까?)


후반부로 갈수록 하이데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설명하지 않으면서 하이데거를 말하는 저자들의 내공과 탁월함이 느껴진다. 장황하게 늘여놓지 않으면서 글에 충분히 녹아들어가 있는 이론. 사상이나 이론의 쓸모와 실천에 대해 일상적인 삶으로부터의 출발과 연결이 아주 필요하다고 보지만 극도로 소박하거나 순진하게 다루는 방식들이 늘어나는 통에 꽤 오랜 기간 신물이 났던 터, 내게는 저자들의 사유나 깊이가 글을 방향과 질을 완전히 좌우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책이어서 의미가 깊었다. 저자들이 단테, 니체, 칸트 등이 보여준 허무주의를 이겨내는 방법에 동의하지 않았듯이 나 또한 그들이 제시한 해결 방법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진 않지만 일정 정도는 공감하는 바인데, 그게 저자들의 학문적인 내공이 느껴져서인 듯.


전반부보다는 5장부터 술술 읽히는 편이다. 근대 이후의 철학이 나오니 상대적으로 심적인 거리감이 좁혀지기도 하고, 저자들도 중반 즈음에 자신들의 질문에 대해 정리도 해준다. 개인적으로는 멜빌의 <모비딕>을 다룬 6장이 가장 흥미로웠다. 언급한대로 철학적인 시각을 화려한 이론 기술보다는 저자 자신들의 단단한 시야를 바탕으로 해설해가는 설득력이 아주 쏙 빼닮고 싶을 정도였는데, 특히 이스마엘에 대한 분석이 좋았다. 에이합을 거대한 서양(철학) 역사의 침몰로 귀결시키는 건 너무 거창한 건 아닌가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수긍을 안 할 순 없었다.


이외에도 율법을 완성하러 온 예수에 대한 해석에 혼자 탄복을! “예수는 율법에 순응하기보다는 그것을 완성하러 왔다고 새롭게 말함으로써 율법을 주변적인 것으로 만든다. 즉 율법과 그것이 정한 금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유대교적 관념에서는 주변부에만 머물러 있던 순수한 인간 욕망의 문제를 기독교적 관념의 중심부로 옮겨놓음으로써,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동시에 그는 율법의 자리 역시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옮겨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유대 세계를 완전히 변형시킨다”(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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