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에르 드 부아르> [5호 도시의 욕망]은 제호아래서 기대될 법한 화려한 도시의 풍경을 개괄하거나 설명하기보다, 오늘날의 도시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인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지적한다. 요컨대, 전지구를 호령하는 여러 기업의 본사가 있는 시애틀이 다양성의 도시를 표방하지만 실은 고학력 지적 노동자들을 위한 도시에 진배없다는 시애틀, 창조도시의 비인간적 실험실(브누아 브레빌, pp.54-66)이나 혁신자유라는 참 좋은 단어가 부자들에게만 적용된다는 부자들의 자유가 충만한 도시, 보스턴(토마스 프랭크, pp.127-133)은 한 도시의 현 상황을 면밀히 짚어가며 결국 오늘날의 도시란 과연 누구를 위한 도시인가라는 냉철한 질문을 던진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두 편의 글은 2부에 연이어 있는 애플이 바꾼 중국인의 삶(조르단 푸유, pp.82-94)빈곤, 아시아 도시화의 덫(자크 드코르노아, pp.95-99)이다. 전자는 폭스콘을 비롯한 중국의 전자제품 생산업체가 위치한 도시와 노동자의 풍경을 형용사나 수식어 없이 건조하게 기술해가지만, 회색 도시의 노동자들이 근근이 살아가는 암울한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되게 한다. 드코르노아의 글은 아시아의 도시화가 가난을 낳고 제도적인 불공평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비롯해 비공식 노동의 현실, 여성과 아이 그리고 빈자들이 처한 취약성까지 도시의 병폐를 전방위적으로 제언한다. 특히 도시 지역의 빈곤 퇴치 문제는 시장에 내맡길 수 없다는 유엔 연구 보고서의 문구로 결말부를 정리하는 이 글은 <마니에르 드 부아르> 5호에 실린 글들이 견지한 전반적인 태도를 간명하게 드러낸다.

 

<르몽드>의 글들은<마니에르 드 부아르>에 실린 글들은 다수 <르몽드>를 출처로 갖는다, 본 호 p.200 참조자주 마지막 문장들이 의문문이다. 가령 이런 식. “과연 대도시가 포퓰리즘 해독제에 최적격이라 볼 수 있을까?”(p.124) “사무실과 주택 비율을 조화롭게 유지해 소외계층의 접근성을 높이고, 지역 주민과 연계해 도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이상주의적인 희망인 것일까?”(p.110) “과연 낙수효과라는 신화가 현실이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먼 게 아닌가.”(p.49) “코로나19 위기가 솔리다리테(Solidarité, 연대)의 시대를 열 수 있지 않을까?”(p.23) “어떻게 해야 이 야박한 도시에서 살아남을 것인가?”(p.14) 우린 이 질의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숙의해야 한다. 이 물음들은 도시 더 나아가 사회의 향방에 대한 거시적인 윤곽선만 그린 채 구제적인 토의와 실천들로 메꿔지길 기다린다.

 

사는 것은 원래 낭만이 아니다”(김지연, p.191)라는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는다. 누구에게나 산다는 것이 감미롭고 감상적일 수 없다만, [5호 도시의 욕망]이 보고하는 것은 도시 내부에서 비가시적으로 그어지는 어떤 선들이 더 팽팽해지고 질겨져 누군가를 가장자리로 내몰고 삶의 양태를 옳지 못한 방향으로 바꾸고 있다거나 더 나쁘게는 터전마저 빼앗고 있다는 사실들이다. 그리고 이건 어떤 도시도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나 역시 오늘도 위태롭게나마 “‘영끌끝에 중심지에 힘들게 안착”(성일권, p.14)하려 발버둥 친다. 나도 질문을 던지며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이건 과연 우리의 순수한 욕망일까, 도시의 일그러진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일까.

 


르몽드코리아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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