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밑에서
최일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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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이에 어떻소. 덤덤하게 들락날락 품앗이가 따로 없지 뭐. 나도 마누라 묻고 나면 또 어디선가 장사를 알리는 기별이 올 텐데.”
 “말이 났으니 말인데, 참 숱하게 다녔네. 서울 장안의 영안실을 안 간 데 없이 죄 가본 것 같애. 생긴 구조까지 환한걸.”
 “사람 안 죽은 아랫목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됐다구. 죽는 곳이 따로 있다더냐 이런 뜻인데, 이제는 거진 다 병원에서 죽네?”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생을 마치는 꼴이지.”
 “아무렴. 나올 때도 울고 갈 때도 울고. 나올 때 안 울면 큰 일 나. 신생아실 간호사 손에 거꾸로 매달린 채 볼기를 찰싹 얻어맞기 십상이지.”
 “이른바 고고지성”
 “고통에 찬 비명이나 수술 뒤의 가스 새는 소리를 포함한 병원의 모든 소리는 살아 숨 쉬는 자들의 것이야. 넋이야 있고 없고 별채같이 나앉은 영안실 망자들은 아예 찍소리조차 못내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문신과 그는 드디어 말을 놓고 앞앞의 일회용 종이컵에 다투어 술을 따랐다.
 “그러나 대형 병원일수록 심한 북새통이며 온갖 발소리를 참기 힘들어. 충돌 직전의 인파가 아사리판이야.
 책 <국화 밑에서> 18쪽

 

 


 60년이 넘도록 소설을 써왔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이 60년 동안 거의 매해 소설을 발표해왔다는 것은 또 어떤 일일까?

지금까지 최일남 작가가 발표한 소설은 160편이 넘는다. 한국의 근대와 현대를 모두 아우르는 국문의 산실이라고 할 만한 작가 혹은 작품을 찾는다면 바로 그-여기다.

총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국화 밑에서]는 한국 현대소설사의 산증인이라고 일컫는 최일남 작가의 녹록한 현역의 에너지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변사들이 등장했던 옛날 영화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담겨 있는 주제나 시사성은 2019년의 한반도의 어딘가를 잘라 담은 것처럼 생생하다.

어쩌다보니 최근에 노년, 죽음 등의 주제와 관련된 작품들을 연이어 읽었는데,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저 주제들과 관련하여 과장이나 상상이 섞이지 않은, 가장 현실적이고 믿을만한 내용의 작품이라고 느껴진다. 젊은 작가들이 상상이나 추측으로 저런 주제들을 다룬 작품들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작중 인물들이 서로 치고 받듯이 주고 받는 말들도 대단하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소설로 옮긴 느낌이라고 하면 맞을까. 다만 일상적이고 가벼운 단어들이 아니라 그 속에 한국어의 맛과 멋을 담아 졸여낸 단어와 문장들이다. 국어사전을 펴놓고 소설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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