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총통 선거는 미국과 같이, 4년에 한번씩으로 연임이 가능하다. 그리고 총통, 부총통이 런닝 메이트로 출마한다.

 

 

관전포인트

1. 역사적 배경  - 민족문제 - 민남인과 한족의 대립

대만은 다민족국가이다. 2000만이 넘는 인구에서 주요 종족은 복건성의 민남족, 객가족(하카), 한족, 그리고 소수민족으로 원주민들이 있다.

중화문명은 진시황시대의 장안(서안)을 중심으로 갈등과 융화를 통하여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중화라는 의미에서 민남족, 객가족, 한족이 같은 한자문화권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종족이지만, 명말청조에 복건성에 대거 이민온 민남인과 1949년 국공내전에 패해서 도망쳐온 한족은 인종적인 의미에서는 다른다.

장개석정권에 대만을 들어오기전에 1949년 2월 28일 대만에서의 대만인(민남인, 객가인)의 탄압을 통하여 그들은 한족역시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외세민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대만 남부에 사는 오랜 시간 대만에 거주한 민남인과 타이페이를 중심으로 냉전시기에 권력층을 형성한 한족과는 대립의식이 강하다. 그리고 소수민족은 말레이계나 필리핀 북부 계열의 원주민으로 건국초기 미국처럼 이들 원주민들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무시를 당하고 있어서, 선거에 영향력이 미미하다.

 

2. 대만민주화, 민진당출현, 이등휘 총통

3. 국민당과 신민당의 연합, 민진당와 이등휘 전 총통의 영향

2000년 선거의 패배 요인은 국민당의 분열에 있다. 국민당후보로 연전 행정원장이, 그리고 송추위 가 탈장하여 신민당을 결성했다. 대만 내부에선 이등휘와 이들과 갈등을 그 원인으로 꼽고있다. 2003년 초반부터 국민당 연전과 신민당 송추위는 단일 후보를 내어, 역사에 더 이상 죄인이 될수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연전이 총통후부, 송추위가 부총통 후보로 약조하였고, 송추위가 2003년 여름 한국용인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대만 총통은 한국의 명예박사학위가 모두 있었다면, 반듯시 부총통에 당선된다고 너스내를 떨었다. 전반적으로 선거 1년전의 통합의지는 전국민당을 결성시키는 효과가 있었지만, 시너지 효과는 선거직전의 통합에 비하여 떨어진다고 한다.

이등휘 전 총통의 대만연합은 이번 선거에서 민진당의 천수이벤을 지지하는 묘한 구조를 이루고있다.

 

 

4.대만독립을 묻는 공투(국민투표)와 중국의 외교군사적 대응

 국공내전은 중국의 전통성을 두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시민전쟁의 성격이 있다. 이 중국전쟁에서 중국인민은 공산당을 선택했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피난을 해서 양국시대를 이룬다. 국내적으로 공산당이 중국을 정통성을 인정받았지만, 국제적으로 국민당이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로 정통성을 인정받는 구조를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미중화해에 함께, 1971일 중일수교,1972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계승, 1979년 미중수교, 1992년 한중수교등으로 중화민국 국민당의 주요 외교 파트너들이 공산당정권과 수교를 한다.

 이러한 냉전의 국제구조하에서 국민당정권은 친미친일 정책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던 것이, 본성인 출신인 이등휘의 총통취임이후, 중화민국이 대만화한다. 신대만인 의식, 민남어활용의 증대, 정권의 친일화등으로 중국화를 탈피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일보의 만화가 고바요시 요시노리는 일본정신이 가장 훌륭하게 본존된 곳이 대만이라고 규정하고, 이등휘 전총통역시 자기는 옛날에 일본이라고 매스컴에서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민진당이 2000년 정권교체를 성공하면서 국공내전의 협상파트너인 국민당이 중화민국을 대표할수없어진다. 민진당은 2000년 선거당시 대만의 독립화를 강하게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한계가 많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선거에서 국민투표를 해서 대만독립여부를 묻겠다고 한다. 2000년 선거와 마찬가지로, 선거전략이라는 의견과 독립으로 가는 일보전진이라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중국은 이에 대하여, 일국양제의 원칙하에 부정하고, 미국, 프랑스 등의 대국들에거 하나의 중국원칙을 주장한다. 중국의 대만판공처는 전쟁불사, 2008년 올림픽반환, 2010년 상해박람회 반환, 경제 후퇴등이 있더라고, 독립투표시에는 전쟁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1995년과 1999년 대만총통선거전에 복건성, 강서성등에서 대류모 국사훈련을 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공군력에서 대만이 월등이 우세하므로 대만 침공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경제후퇴를 각오한 전쟁보다는 무력시위선에서 대만의 독립움직임을 억제할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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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만의 화교정책

양안교류, 소삼통

대만경제와 외환보유고

참을수없는 존재의 가벼움 -

퇴임후 김영삼 전대통령, 이등휘 전총통, 대처 전수상 대만인의 친일의식 - 고바요시 요시노리의 대만론 1.미국 2. 일본. 3. 대만 삼류이하의 인종등 대만의 유흥가 - 린션베이루 타이페이101빌딩과 거대 건물 빙랑샤오지에(태국,해남도산 삥랑) 교통카드 한국과 대만의 공통적 사회원인 - 이혼율증가, 결혼감소, 저출산, 실업률 증가 더운나라의 건물구조, 환경오염, 위생관념의 부족, 후진국병과 선진국병의 혼재 - 이해할수없는 부자나라 1회용 물품을 많이 쓰는 이유 -위생관념이 적어서.... 강성한 중소기업과 가족기업 해외 뻐어나가는 타이상 - 대만근해에는 물고기가 없다. 중국대륙의 대만첩들의 마을, 천수이벤의 카오슝에서의 타이상에게 바람, 총통부인 소수민족에 대한 격멸감, 동남아인에 대한 천대 - 극심한 인종차별국가 본성인, 외성인, 하카, 소수민족, 외국인 - 인종문제 대만화 차-동방미인, 우롱차 등 대만민주화의 제한 요인 광동 무엇이든 먹는다. 비행기뿐이,네발날린것은 자동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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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과 상해임시정부

71년 유엔, 72년 일본, 79년 미국과 단교 그리고 1992년 한중수교

중화민국의 열등감,

김종필, 김영삼등의 보수주의 자의 대만 방문, 일본 보수주의와 연대

월드컵, 아시안컵 야구대회과 노무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보인 대만인의 열등감

국제공헌과 좁은 의미의 국가이익

양안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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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가는 길 타이완가는 길은 쉽지않다. 한국에서 타이완에 가는 국적기가 없고, 일본에서 타이완 가는 길은 오키나와에서 배편, 오사카, 후쿠오카와 도쿄에서 많은 비행기가 있다. 하지만 타이완 가는 길은 멀다.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일본 재입국 비자, 타이완 비자, 항공권이 필요했고, 학생이기 때문에 지도교수의 허가도 필요했다. 무려 1달에 걸친 준비가 필요했다. 오사카에서 카오슝가는길 (3월 31일) 비자를 받으러 타이베이 중화민국 재오사카 경제문화대표부에 갔을 때, 한국인이기 때문에 첫 번째 비자는 한국에서 직접 받으라는 영사의 말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92년 일방적인 단교에 대한 피해는 내가 가장 받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에 걸친 엉성한 영어와 일본어로 영사를 설득한 끝에 접수를 했지만, 걱정되었다. 경제문화대표부에서 타이완의 정치적 외침을 읽어보았다. 선거때마다 카오슝 앞바다에 떨어지는 중국의 로앛트 연습, 세계 1위의 외환보유국의 UN 가입의 불가 판정, 스포츠, 농산물등의 경제문화 외교의 실패 등을 읽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오사카 대표부에 갔는데, 비행기 이륙 2시간 전까지 비자 심사가 끝나지 않았다. 타이완에 가는데 비자가 필요한 나라는 한국과 북한뿐이다. 그때부터 지하철 역까지 배낭을 배고 지하철 역까지 뛰었다. 그 후 간사이 국제공항에 가는 기차를 갈아타는 역에서 16Kg의 배낭을 찾고, 뛰었다. 그리고 간사이에 이륙 1시간에 간신히 도착하여, 동북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사이 공항을 구경할 여유없이 수속을 마쳤다. 어딘지 모르게 외국인 등록증을 잊어버려 출국수속에 문제가 생겼다. 비행기가 이륙해서야 간신히 여유를 가졌다. 타이완의 인정 (4월 1일) 내 옆에는 오사카에서 공부하는 타이완 아가씨가 앉았는데, 엉성한 일본어로 많은 질문을 했다. 한국인이고, 관광으로 타이완에 간다고 하자 자기집에서 1박하라고 졸랐다. 간신히 친구가 기다린다는 말을 알아듣고는 더 이상 조르지 않았지만, 시골의 인정 같았다. 카오슝의 야경을 구경하며, 밤 9시에 4시간에 걸친 도착했다. 공항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서 너무 기뻤다. 친구는 아는 교수님과 그 분 제자와 3명이 같이 나왔는데, 그 교수님의 Lee's Hotel이라는 고급 호텔을 예약해 놓았다. 정말 놀랬다. 그 분의 태도는 외국에서 온 손님인데, 이정도야 뭘이어서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자동차로 카오슝의 야시장을 구경하고, 가장 잘 논다는 타이완 학생들과 잘 나간다는 카페를 데려갔는데,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모두 커피 한 잔씩 마시고 끝났다. 한국인이라는 요란한 카페에서 술과 담배를 썩어가며, 시끄럽게 떠들텐데 타이완 학생들은 마치 10년전의 한국의 대학생처럼 얌전했다. 친구와 호텔에 돌아가 긴 이야기를 하며,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교수님의 심부름으로 타이완 학생 하나가 왔다. 오늘의 숙제는 카오슝 안내란다. 정말 타이완 사람의 사람 대접에 놀랐다. 후 일 알았지만, 타이완 문화에서 인간관계는 너무 중요하고, 비즈니스에서 가끔은 너무 많은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사회문제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 학생도 역시 자동차로 3시간만에 카오슝의 모든 것을 모여주었다. 나는 내 발로 걸으며, 눈으로 느끼고, 사진으로 남기는 여행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은 보았지만, 사진도 못 남기고,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타이완식 식사를 하면서, 그들의 손님 대접하는 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손님맞이와 비슷한 듯 했다. 음식은 중국 음식 특유의 기름이 많았다. 내가 가진 타이완에 대한 선입관은 세계 제 1의 외환 보유고답게 홍콩이나 싱카포르처럼 고도로 발달된 모습이라고 생각했지만, 말레이시아나 태국의 야시장이나 차이나타운과 비슷했다.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도로는 차와 인간이 혼재되어 있고, 인간보다는 차가 우선했다. 한국과 비교하면, 정말 한국운전자가 안전의식이 있다고 자부해도 좋다. 일본 센다이의 버스 운전사 연봉은 7천만원 정도 인데, 거의 버스가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일본의 교통기관은 흔들리지도, 지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음식도 가족끼리도 반찬을 따로따로 먹는 일본과는 달리 종업원이 대충대충 음식을 손으로 나르기도 했다. 이런 타이완의 문화가 마치 올림픽을 전후한 우리의 모습 같아서 정말 정겨웠다. 몇 시간 뒤에는 또다른 타이완의 자부심을 알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 학생은 우리가 이미 지불한 돈을 되돌려주며 타이완에서는 화를 내다고 했다. 타이완에는 말한 사람이 모두 책임을 진다며 한사코 점심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수업이 있다면, 역까지 바래다 주었다. 버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여 맥도날드에서 갔는데, 디바의 노래가 나왔다. 그리운 한국 음악이 나오자 절로 몸이 흔들어졌다. 타이완에서는 한국 음악이 인기가 있었다. 우리를 줄곧 안내한 친구가 맥도날드로 뛰어와 여행계획도를 주었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감사를 표현할 시간도 없이 수업에 가버려 너무 미안했다. 중국의 실용적인 다도(茶道) (4월 2일) 버스로 타고 핀동(屛東)으로 가는 길은 열대의 대농장과 푸르른 벼가 익어가는 벼이 펼쳐졌다. 조그만한 타이완이 무척이나 큰 대륙처럼 느꼈졌다. 핀동 역에서 약속한 교수님이 마중나왔다. 그는 일본의 규슈대 심리학과에서 7년간 공부해서, 일본어가 능숙해서 반가웠다. 타이완에서 처음으로 통역없이 마음 편히 이야기를 했다. 그의 집은 4층으로 무척이나 켰다. 가구는 거의 없고 품위가 없어 보였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예술적 경지의 자개농이나 일본인의 원목, 호주인의 직접 만든 자연스러운 멋을 가구는 없고, 조잡한 플라스틱정도였다. 좋은 집에 어울리지 않는 가구들이어서 타이완의 짧은 역사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높은 담에 철책이 쳐져있어, 중국인의 개방에 대한 수성(守成)을 느끼게 했다. 일본 생활에서 중국인과 일본인은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곤 했는데, 타이완 사람도 역시 일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많이 표현했다. 내가 아는 일본인의 관념에는 절대 타이완 사람의 지저분하고,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하여 용서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타이완 사람의 대륙 기질에 따른 한 턱 내는 것도 부담스럽게 느낄 것이다. 타이완 사람은 제의한 사람이 전부 책임지는 문화에 대하여 일본사람의 와리깡 정신을 아마도 염치가 없어보일 수도 있다. 그 교수님 역시 일본문화론은 결코 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는 것이다. 그래도 교수님은 부부싸움은 일본어로 한다고 한다. 그래야 서로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없어 논리적인 전개를 한다는 우수개를 하였지만, 많은 타이완 사람이 일본어를 잘 했다. 저녁 식사는 이런 저런 그릇을 펼쳐놓고는 먹고 싶은 것을 자기의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정겨워보이기도 하고, 참 멋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음식맛도 중요하지만, 보는 맛도 중요한데. 식사중 맥주를 권해서 긴장했다. 중국 사람들은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다는데 과연 나의 주량으로 감당할지 걱정이 되었지만, 맥주 1잔으로 마쳤다. 전날의 까페에서와 같았다. 타이완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집 주변의 학교선생님 몇 몇을 초대하여 같이 다도를 했다. 일본인은 엽차라도 그 자리에 맞는 예의를 중시하고, 차가운 차도 호호 불어가며 마시고, 역거운 쓴맛을 없애려고 단 과자를 먹는 형식미를 중시하는데, 형식미를 중요하는 다도보다는 맛을 중시했다. 아무런 멋도 없는 주전자와 컵에 차를 마시는데, 온도를 정확히 맞추었다. 그래서 차중에 제일로 친다는 갈색 녹차가 우러나왔다. 연신 첫 번째 차는 버리고, 도기 주전자의 온도를 맞추려고 따뜻한 물을 주전자에 부었다. 그들이 말하는 타이완의 자존심은 국가와 국민의 모두 부강하는 것이다. 어떤 고급 일제차를 살 것인가는 고민하는 교수님이 자랑하는 타이완 드림은 일하면 곧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 올림픽을 전후한 코리아드림과 IMF관리체제의 부도난 한국을 동시에 연상하게 했다. 그런 경제력에도 항상 중국의 군을 바탕으로한 외교력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조를 연발했다. 정말 타이완 사람은 아직은 세련미보다는 자본주의를 맛을 처음 본 시골 사람들처럼 가끔은 사치스럽지만 아직은 플라스틱 가구, 맛을 중시하는 다도 등 실용적이었다. 남국에서의 휴식 - 리틀 카오산 로드 (3월 3일) 아침 일찍 제일 아름다운 켄팅국립공원에 가는 기차 시간이 되었다고 친구가 소란스럽게 깨웠다. 교수님과 아쉬운 이별을 하며, 홈스테이를 마쳤다. 타이완의 제일 남부의 켄팅에 가는 가장 느린 기차는 한국의 비둘기호보다 조금 더 낡고, 편의 시설이 없었다. 그리고 중간에서 버스로 갈아탔다. 켄팅 중심부에 도착했을때는 조그마한 관광지였지만, 외국인이 더 많아 보였다. 무척 젊고 발랄한 인상이었다. 오토바이를 랜트하여 가이드북에 별이 세 개나 있는 켄팅 森林遊樂區에 갔다. 산위에서 보는 제일 남부의 타이완 바다는 검푸는 흑진주 빛처럼 검푸른 사람가 너무도 남국의 멋이 배여 있었다. 푸른 산림에서 사이를 오토바이로 달리며, 마음에 드는 곳에 멈춰 사진도 찍고, 여유있게 거닐기도 하였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역시 거닐기도 하고, 밤을 준비하려고 텐트를 치고, 기타를 치는 모습에 흥겨워졌다. 우리도 그들처럼 공원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여행 전문가 정도 되는 나는 그 공원안에 무엇이 있을지 보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장 남부의 등대 향하는데, 스쿠버, 스노클링, 다이빙하는 곳에 멎춰 바라다 보았다. 시간도 없고, 비행기를 탄지 얼마 안되어, 기압차 때문에 (이웉라이저) 귀에 무리가 될까봐 아무것도 할 수는 없었다. 그 곳의 바다는 연보라빛 애머랄드 같았다. 하얀 등대에서 타이완의 최남단까지 왔다는 증명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잔디공원과 용암이 흘러내린 앞바다를 거닐며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천천히 나누웠다. 무슨 영화속의 한 장면같았고, 근 몇 년이 이런 여유는 처음 같았다. 타이완은 나에게 17번째 나라인데, 줄곧 혼자서만 여행을 했는데, 둘이 하는 여행이 주는 편안함을 즐겼다. 타이완 최남단의 동지나해에서 석양을 보며, 숙소로 돌아왔다. 켄팅의 음식점은 타이완 음식을 서구인의 구미에 맞추어 준비한 집이 많았다. 음식맛이나 흥청내는 관광지의 멋이 무척이나 태국의 카오산로드를 그립게 했다. 나는 포장마차에서 훈제 닭고기, 베이컨, 버섯, 순대 등을 잔뜩 사들고, 하이네켄 맥주도 잔뜩 사서 저녁을 대신했다. 한국에서 친구들과 먹던 그 맛이었다. 그러나 폭음 덕북에 밤새 잠을 편히 잘수가 없었지만, 역시 여행은 술이 있어야 맛이 난다. 다음 날은 기암절벽으로 猫鼻頭에 가는데, 바람이 세어 오토바이가 균형을 자꾸 잃었다. 그 곳에서 보는 자연 그대로의 바다는 새로운 인상이었다. 줄곧 타이완의 원시 그대로의 바다는 어디에서나 다른 인상으로 나에게 느껴졌다. 일본은 어디를 가도, 자연미가 없다. 무엇인든지 인간의 문명이 손길이 느껴진다. 공원의 입구에서 출구까지 화살표로 걸어가는 길이 표시되어있고, 그 길안에서는 안전이 보장된다. 누구도 다른 길에 갈 생각은 하지도 않지만, 금방 질려버린다. 입장료로 낸 10.000원 정도는 20분에서 2시간정도 걷다보면 끝나버린다. 일본인의 아름다운 자연미라고 찬미하는 사이에, 수묵화에 여백은 두는 한국인은 인공미에 질려버린다. 타이완의 대륙적인 기질은 사람이 걸을 수 있다면, 자유롭게 걸으며 사색을 즐길 수 있다. 자유로운 만큼 낭떠러지 절벽과 안전한 길은 혼재되어 있어, 각자 알아서 주의해야한다. 다음은 오토바이를 타고, 제국주의 일본을 저지하기 위여 1875년에 청조에서 건설한 성을 구경하러 恒春에 갔다. 일본인들이 남은 성문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나, 타이완 사람이 식민지시대에 일본인의 교육제도, 도로, 철도등 건설 등을 칭찬하며,일본어를 배우는 모습은 언뜻 한국인에게 어색해보일수 있다. 우리는 일본 침략을 문명과 문명의 충돌을 무력에 의해 잠시 굴복당한 것으로 본다면,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있는 타이완의 입장은 좋은 지배자라면 어느쪽 이든 상관이 없는 상황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오키나와와 비슷하게 봐도 당시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에서는 설명이 가능할수도 있다. 그 성앞에서 포카리스웨트 맛의 코코아를 통째로 마시는데, 정말 열대에 왔다는 것을 다시 인식되었다. 오후에는 華蓮에 가는 가장 빠른 기차를 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무궁화정도 되었다. 타이완의 봄방학기간이라서 발 디딜틈 없는 기차는 설날과 추석 전후의 우리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너무 정겨웠다. 도시락을 먹는 사람, 신문을 보는 사람, 고향에 빨리 가고 싶은 학생을 비집고,우리 자리에 앉았다. 퇴폐화 되어가는 원시의 타이완과의 대화 ( 4월 5일 ) 대륙적인 기암절벽을 보러, 太陸閣에 가는 버스는 곡예운전의 연속이었다. 100M 위의 절벽은 시속 80에서 급정거까지 경주차 선수처럼 운전하는 운전사의 곡예운전에 승객들은 바깥경치를 구경할 수가 없었다. 모두 자기의 운명을 걱정하는지, 수십미터의 아래의 절벽을 보며 자연의 웅장함에 감명을 받았는지 숙연해졌다. 머리 노란 외국인들의 놀란 모습은 확실했고, 나도 너무 무서웠지만, 중국과 타이완의 생활에 익숙한 친구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푸른디 푸른 절벽 밑은 강물이나 흔들리는 다리도 아름웠다. 특히, 太陸閣은 대륙을 닮아서 그런지, 寧安橋에서 보는 중국 궁전을 보뜬 長春祠는 거대한 폭포 어우러져 중국에 온듯한 착각을 만들었다. 그 곳에서 히치하이킹에 성공하여, 나는 마음 조리는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어 기분이 좋았다. 친구는 담배는 피우는 여행을 하는 두 아가씨에 조금 놀랐다. 타이완에서는 별로 여자들이 남자를 피우지 않는다고 하고, 그들은 대학 강사와 조교라서 무슨 최첨단을 걷는 신촌의 샌님이나 도쿄 긴자의 마마(mother)를 연상하게 했다. 그들은 친절하게 역앞의 숙소까지 데려다주어, 한국 엽서를 기념으로 주었는데, 너무 기뻤했다. 택시를 타고, 아미애 원주민의 민속춤을 보러 갔다. 택시 운전사는 중독성분이 있는 각성제같은 타이완 특유의 음료를 많이 먹어 이빨이 빨간색이었다. 그러나 다른 타이완 사람처럼 친철하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돈이 없다며, 100위엔에 가자고 조르자 그는 150위엔 이하는 안된다고 했지만, 우리 고집에 못 이겨 100위엔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미터기에 180위엔이 나와서 정말 미안했다. 더구나 공연 2시간 전쯤 도착했는데,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그래서 그는 택시 안에서 2시간 동안 앉아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 엽서를 주었는데, 한국말로 인사도 하며 호감을 보였다. 그리고 너무 피곤해서 돈보다는 한적한 곳에서 쉬고 싶어 그냥 따라왔다고 한다. 원주민은 공연은 민속음악, 무사들의 전쟁의식, 사냥, 추수, 구애, 결혼 등을 주제로 나누웠졌다. 추수의 풍습은 농경 문화답게 우리와 너무 비슷했다. 그리고 전쟁과 사냥은 역시 조그만한 원주민답게 방어적이고, 격한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혼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어느 나라나 같지만, 원주민들은 하나의 관광산업이 되고 있어 슬펐다. 그들의 문화보다는 서구적 상업주의에 맡게 각색된 연극에 몰두하고, 모든 삶의 터전은 전시품이 되는 것은 북미, 동남아나 일본이 모두 같았다. 공연후 타이완 사람이 어디까지 가냐며 친근해 보이는 인사를 했다. 타이뻬이까지 간다면, 자기들 차에 같이 가자고 졸랐다. 우리도 심심하여 같이 가기로 했는데, 역에서 기차표 환불하고, 시내에서 짐을 찾는 것을 도와주는 모습이 벌써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운전하는 남자는 간판 수리공인데,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고, 부인은 미인이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아 그 집은 아들과 주로 보딩랭귀지로 친해졌다. 몇 시간의 자동차안에서 내가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말도 잘못하는 그 꼬마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 하는지, 친구가 통역을 짧게 하여 너무 답답했다. 타이완은 동해안의 개발이 전혀 되지 않아 한국의 강원도 같은 인상이었다. 그도 역시 제 2차 대전 당시 일본 군부가 건설한 도로와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건설한 군용도로를 곡예운전을 했다. 확장공사를 하고 있어, 더욱 위험해 보였다. 그래도 자동차 안에서 보는 원시 그대로의 타이완 동해안은 아름다웠다. 그는 羅東의 고향에서 머문다면, 같이 머물자고 졸랐다. 그와 그의 친척과 야시장을 걷는데 타이완의 서민들의 삶이 너무 재미있었다. 담배나 인형을 건 도박은 한국의 난장과 같은 풍경이었다. 그의 집은 교수의 집처럼 아주 커다랬지만, 가구는 모두 조잡했다. 첫 번째 홈스테이는 타이완의 지식인과 정치이야기를 했고, 두 번째 홈스테이는 말도 통하지 않는 타이완의 서민과 인간미를 느낄수 있었다. 그 역시도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된다는 타이완 드림을 성취하는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친구와의 재회 (3월 6일) 다음 날은 늦게 타이뻬이에 도착하여 동북대에서 같이 종종 금요일 밤마다 술을 같이 마신 친구 카즈라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타이완에서 일본인 친구와의 재회를 색다른 맛이었다. 같이 야시장에서 식사를 하는데, 그가 초 두부를 추천했다. 두부인데, 담백한 맛에 식초맛이 썩여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식초는 썩은 음식인데, 두부를 썩혀서 냄새가 마치 시궁창 같았다. 냄새에 찔렸지만, 입안에 넣자 두부의 담백한 맛이 느껴졌다. 먹기 시작해서 30분 정도 지나자, 다름대로 맛을 느꼈지만, 한국인의 미감으로는 더 먹는 것이 힘들었다. 그 친구는 보통의 구미가 까다로운 일본인과는 달리 잘도 적응했다. 하기야 동북대에서 타이완맨으로 통하니깐. 다음날은 고궁박물관과 중정기념관(장개석)에 갔다. 고궁은 세계 4대 박물관이지만, 소장품은 많지만 건물이 협소해 얼마 전시가 되지 않았다. 주로 옥, 청동기의 예술이 전시되어 있어, 처음으로 옥을 주제로한 예술 볼 기회여서 재미있었고, 카즈 역시 3번째지만, 모두 전시품이 달라서 재미있어했다. 그리고 역으로 돌아가 중정기념관에 걸어 가는데, 228평화공원이 지나쳤다. 제주43항쟁처럼 본토인의 불균등한 상태에서 무력으로 점령한 것에 대한 데모를 47년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수많은 역사의 순간들이 눈앞에 어른거려진만, 여행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중정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정기념관에서도 역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과연 무엇이 옳은 길인지 알수가 없었다. 장개석에 대한 연민과 한국의 독립 인사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자리였다. 밤 늦게 가차를 타고, 타이뭗에 가서, 타이완 학생집에 갔다. 타이완 학생은 전북대에 교환학생으로 공부를 해서 너무 반가워했다. 일본인이 온다고 아사히(朝日)맥주, 우동, 초밥(스시)를 준비하여, 카즈와 오랜만에 기름기 없는 음식을 먹는 다고 기뻐서 잔뜩 먹었다. 그리고 자정이 될 무렵 타이완에서 공부하는 전북대 교환 학생 정승조 형이 와서 한국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날은 천천히 타이뭗 대학을 걷기도 하고, 학교내 노천 카페와 일본풍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본인의 한국인과 타이완 사람에 대하여, 3국의 젊은 사람 문화의 비교, 중국과 대만 문제(양안문제)'들을 이야기 했다. 한참 한국어와 일본어를 통역하다보니, 종종 한국사람에게 한국말로 통역을 하기도 하고, 헷갈려졌다. 그날 밤에도 타이완 학생 기숙사에 머물면서 이야기를 나누웠지만, 그들이 가진 고민은 비슷한 듯 했다. 양안문제에 대하여서는 모두 자기들은 타이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내년 총독 선거에서 운명을 결정진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중요 선거시 중국의 미사일 포격에 대한 불만과 공산당, 국제 사회에서 타이완 보이코트는 스스로 절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인식의 차이는 군대를 제대한 사람과 너무 달랐다. 밤새도록 친구와 대학 캠퍼스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웠다. 새벽에 교환학생 형과 다른 학생이 오토바이로 역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리고 카오슝역에서는 다른 타이완 학생이 차로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안녕! 추억속의 고향! 타이완 (4월 9일) 타이완에 대한 인상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정으로 가슴 깊이 각인되었다. 친구와 짧지만 서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눈 여행을 처음이라서 새로운 여행관을 심어주었다. 마지막으로 타이에서 즐거운 점이 있다. 공항에서 자리가 없었다. 일본이 단체 관광객이 너무 많았다. "미안하지만, 1등석도 괜찮게 싶습니까?" 자리가 없는 관계로 1등석에 앉아서 일본에 돌아오면 따뜻한 타이완의 정을 가슴깊이 다시 한 번 각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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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연구기관

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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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륙에서의 중화민국시기의 한국관련 자료 많음.

2. 주요대학-정치학의 경우

대만대학, 정치대학

3. 서점 - 전공서적

중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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