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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손을 빌려 드립니다 ㅣ 웅진 모두의 그림책 2
김채완 지음, 조원희 그림 / 웅진주니어 / 2017년 5월
평점 :
저(아빠)와 딸아이가 이 책을 꽤 재밌게 봤다는 점은 우선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또 다 읽고 난 후 실소와 함께 불쾌한 뒷맛이 남았어요.
솔직히 말해봅시다.
육아를 하지 않는 전업주부가 '변신'을 할만큼 바쁘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알지 않나요? 육아와 직장생활 중 둘 중 하나라도 병행하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림책은 디테일한 묘사로 '엄마'의 가사노동의 양이 많다는 걸 강조하고 있습니다. 쌓여있는 설거지더미, 빨래바구니 한 가득인 빨래. 바닥에 놓여있는 음식물 쓰레기통과 쓰레기봉지. 특히 음식물 쓰레기통과 쓰레기봉투를 눈에 잘 띄게 그려넣어 '아빠'가 최소한의 가사노동도 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어요. 흔히 쓰레기봉투와 음식물 쓰레기통 치우기는 아빠가 할 일로 정해져 있잖아요?
한때 가사노동의 70% 이상, 현재도 50% 정도 담당하고 있는 7살 딸아이 아빠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부부 둘뿐인 집에서 설거지거리와 빨래가 저렇게 쌓여있다는 건, 전업주부께서 가사노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다음 날로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해치운다는 전제하에, 딸 하나 있는 저희 집도 하루 세끼 집에서 다 해먹고 빨래, 설겆이, 각종 잡일 다 해결하는 데, 대충 계산해봐도 하루 4~5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각잡고 하는 대청소 등이 아니라면 하루치의 루틴은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 빨래건조기의 도움을 받아 넉넉잡고 2시간이면 끝낼 수 있습니다. 다들 아시잖아요? 알만한 사람들이 왜 이래 정말.) 아이 없는 전업주부가 산책할 시간도 없이 바쁘다고요? 직장다니는 제 와이프가 콧방귀 뀔 소리네요. (그림책에서 여러번 강조되는 바, 이 집에는 아이가 없습니다. '엄마' '아빠'로 부르고 있지만, 캣맘을 의미할 뿐이에요. 그림책 곳곳에 나오는 벽에 걸린 사진에는 아이의 모습은 없고 부부만 찍혀있거든요. 이 짧은 그림책에 엄마아빠 둘만 찍은 사진을 세 번이나 그려넣은 의도도 노골적입니다. 아이가 없음을 강조하며 육아하지 않는 전업주부의 삶도 '변신'할만큼 충분히 힘들다고 말씀하시려는 거겠지요. 동의할 수 없지만.)
여기까지는 한가한 전업주부의 피해망상쯤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 싶어요. 하지만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불쾌한 뒷맛이 있어요. 그림책에서 여러번 강조하듯 아빠는 매우 바쁩니다. '엄마'가 '변신'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요. '엄마'의 '변신' 후 아빠는 반.성.하고 가사노동을 전담합니다. 전업주부께서 낮에 소파에 누워 책 읽고 산책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회사일로 매우 바쁜 '아빠'더러 집안일을 떠맡으래요. 그럼 '엄마'는 낮에 뭐하실건데요? 회사생활로 인한 하루치의 고단함을 아빠는 어디서 해소하라는 말인가요?
이 그림책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선 '아빠'의 이해와 헌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전업주부를 일종의 피해자처럼, 가사노동에 무관심한 남편을 가해자 혹은 원인제공자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단지 '엄마'가 부부 두 명분의 가사노동조차 감당못할만큼 저질체력이거나 '독박가사'라는 피해망상에 빠진 유리멘탈이어서는 아닐까요?
비슷한 소재의 유명한 그림책인 <돼지책>은 충분히 공감할만 했습니다. 짐승같은 남자아이 둘에 부인을 하녀부리듯 하는 아빠는 정말 돼지나 다름없는 인간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돼지책>의 엄마와 이 책의 '엄마'를 같은 입장이라고 묘사하는 건 말이 안되요. 설마 본인의 입장을 예컨대 대가족의 산더미같은 빨래거리를 얼음낀 시냇가에서 손 호호 불어가며 빨래하던 할머니 세대와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이 책을 읽어주며 딸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일하러 다니면서 집안 일도 해야해서 힘들다. 네가 없고 엄마 아빠 둘이만 살때는 별로 할 일이 없었는데, 네가 생기고 나니까 정말 할일이 많아졌다. 어른의 삶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힘든 거다. 너도 어른이 되면 꽤 힘든 삶을 살게 될 거다. 하지만 네가 있어서, 가족이 있어서 엄마아빠는 행복하고 기운을 얻게 된다. 딸아이는 대충 이해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제발 이 책에 공감하시는 노키즈 전업주부들과 작가님께서 제 7살짜리 딸아이 정도의 이해력과 삶에 대한 통찰은 가지고 계셨으면 좋겠네요.
- 찾아보니 김채완 작가가 16살에 쓴 그림책이군요. 이해했습니다. 그림책이 왜 이런 내용인지.
- 곁가지지만 '고양이 손을 빌리다'는 표현은 일본어 속담 아닌가요? 猫の手も借りたい. 작가님들이 고양이 좋아하시는 건 알겠는데, 굳이 익숙치 않은 일본속담으로 제목을 정하실 필요까지는.. 제목만 보고 일본그림책 번역한 건 줄 알았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