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일본 소설'이라면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 가장 전형적인 일본소설이라거나 일본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겁니다. 그런데도 제가 일본소설이라고 하면 그의 소설부터 떠오는 이유는, 아마 그의 소설이 일본 영화의 어떤 경향과 닮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이케 다카시와 츠카모토 신야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할까요? 때로 그의 소설에는 일본제 고어영화의 한 장면을 글로 옮겨놓은 듯 잔인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도 아주 섬세하고 시각적인 묘사로 말이죠. <오분후의 세계>나 <오디션>에서처럼 말이죠. 그 중에서도 이 소설에서 프랭크가 어떤 미팅크클럽에 가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은 가히 백미군요. 처절한 아름다움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저런 장면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단지 선정주의일 뿐이지 않느냐, 싶기도 하지만, 저런 잔인과 냉담이 무라카미 류가 바라보는 현재 일본사회의 심연의 본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 지극히 통속적인 소재를 지나치게 선정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경향이 있지만 쇼킹만을 주기 위해 그의 소설에 삽입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의 소설은 거의 대부분 무너져가고 있는 일본사회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 일본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무척 비관적입니다. 이 소설에서 서슴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는 미국인 프랭크의 광기는 나름의 당위성을 획득합니다. 그의 행동에 심정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코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정체가 밝혀진 후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기만 했던 프랭크는 소설 말미에 가서는 '고발자'처럼 여겨집니다. 무너져버렸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인정하려하지 않는 일본 사회의 시스템을 직시하라고 요구하는 고발자로서 말입니다. 그 폐허를 보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두 손을 잘라내는, 그런 처참하고 냉정한 방식으로 말이죠. 일본이 어떤 사회인지, 전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 만나는 일본은 회복의 가망이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다를까요? 연쇄살인자 프랭크가 자신의 어릴적 시절을 회상하며 하는 말 중에 이런 게 나오는군요. "... 기본적으로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따분한 인생을 살고 있어. 자극을 원하면서도 그들은 안심하고 싶어하지. 두근거리는 영화가 끝나고 자신과 세계가 의연하게 정확히 존재하는 것으로 안심하는 것이지. 그것이 공포 영화의 진짜 존재 이유야. 공포 영화는 충격 완화의 역할을 완수하는 것뿐이야.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공포 영화가 사라져 버린다면 상상력의 불안을 해소해 주는 것이 한 가지 없어지는 것이고, 아마 엽기적인 살인은 비약적으로 증가할 거야. 공포 영화를 보고 살인을 생각하는 멍청이는 살인에 대한 뉴스를 보아도 살인을 생각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