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서커스 베루프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작을 읽지 않아도 읽을 수 있음.

네팔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저널리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묵직한 주제에 미스터리를 조금 덧입힌 소설임.

피와 수수께끼가 난무하는 종류의 스릴러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비추.

 

책갈피

p225
신념을 갖는 것과 그것이 옳고 그름은 별개야.
(중략)
"당신 신념의 본질은 뭐지? 당신이 진실을 전하는 이라면 무엇을 위해 전하고자 하는지 알려줘."
(중략)
나는 여태껏 보도의 이유를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일부러 그래왔다.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손을, 발을 움직이는게 프로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묻는다. 생각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이유로,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를 묻고 있다.
p228~9
"자기가 처할 일 없는 참극은 더없이 자극적인 오락이야. 예상으 뛰어넘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 끔찍한 영상을 보거나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말하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그런 오락인 거야.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이미 실수를 저질렀다. 되풀이할 생각은 없어."
오락이라는 말이 가슴을 도려냈다.
(중략)
하지만 받아들이는 쪽은? 정보는 거센 물살이다. 일일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략)
라제스와르는 나를 손가락질했다.
"다치아라이. 당신은 서커스의 단장이야. 당신이 쓰는 글은 서커스의 쇼야. 우리 왕의 죽음은 최고의 메인이벤트겠지."
p230
사람들은 어째서 줄타기를 보며 즐거워할까? 언젠가 떨어지지나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나?
(중략)
"하지만 나는 이 나라를 서커스로 만들 생각은 없다. 다시는."
p238
사진은, 최초 보도는 그것 자체로 해석된다. 지금 내가 돌아가서 현장을 찍으면 그 사진은 내 의지에서 벗어나 잔혹함을 감상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p247~8
그는 왕궁 사건을 수치라고 했다.
(중략)
이 나라가 왕국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전 세계의 보통 사람들이 자극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만 주목하는 것을 혐오했다. 그에게는 그의 정의가 있었다. 그의 거절은 긍지에 기인한 것이었으리라.
p256
'안전제일'이 보도의 원칙이라면 '비극은 돈이 된다'는 것은 보도의 상식이다.
p268
나는 정보를 선별한다. 어떤 매체든 무한한 시간과 지면을 가진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을 쓴다는 것은 동시에 어떤 것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p270
범천권청
(중략)
"'범천은 뭔지 알아요. 힌두교의 최고신, 브라흐마를 가리키는 걸로 기억합니다만."
p274
옥상가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미 좋은 시가 있는데 비슷한 시를 짓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조롱하여 쓰는 말이지요.
p276~7
"제 기사와 부처님의 가르침은 격이 너무 달라요."
야쓰다는 몸을 뒤척였다.
"뭘요. 결국 간시궐입니다."
(간시궐 :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운문 선사가 간시궐, 곧 마른 똥 막대기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 현상적 세계의 외형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선적(禪的)표현)
p311~2
의혹과 비난 속에서 퓰리처상 수상자 케빈 카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머리독수리와 소녀>는 저널리즘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이 세상의 비극을 전달할 수 있다는 건 그 자리에 있었다는 뜻이다. 어째서 구하지 않았는가?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p345~6
경찰과 기자는 언제나 미묘한 관계다. 경찰에게 기자는 정보를 졸라대기만 하고 자기 정보는 내놓지 않는 귀찮은 존재다. 기자는 그 일반적인 관계를 마음 한구석으로 미안하게 여기면서도 경찰이 독선에 빠지는 걸 막을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고, 적어도 자기들은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p354
그는 어째서 취재를 거절하는지 설명해주었고, 내 사고방식의 어느부분이 안일한지 지적해주었다. 이것은 어지간한 친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때, 아무런 대가 없이 야단쳐주는 것은 가족 아니면 기껏해야 학교 선생님 정도다. 그 외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냥 화를 내거나, 아무 말 없이 앞으로 상종하지 않는 길을 택한다. 그는 내게 친절했던 것이다.
p449
무엇을 쓸지 결정하는 작업은 무엇을 쓰지 않을지 결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진실은 항상 복잡하고, 여러 입장이 저마다의 정당성으 주장한다. 모든 주장을 병기하는 것은 공평한 태도가 아니다.
p450
기자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드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중립이라고 주장할 때, 기자는 덯체 빠진다. 모든 사건에서 모든 이들의 주장을 제한 없이 다루기란 불가능하고,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기자는 항상 취사선택을 한다. 누군가의 주장을 글로 씀으로써 다른 누군가의 주장을 무시한다. 그 과정이 지면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 선택으로 기자의 견식이 드러난다. 주관으로 선택하면서 중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죽음을 선택한 남자 스토리콜렉터 66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이한이 옮김 / 북로드 / 2018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데커의 3번째 시리즈. 동료도 생기고, 인간관계도 넓어진 데커, 그러나 흡입력은 1,2번째 시리즈보다 조금 떨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괴물이라 불린 남자 스토리콜렉터 58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데커의 2번째 시리즈. 왜 갑자기 20년만에 진범이 나타났는가? 왜 마스는 감옥에 갇혀야만 했는가? 몇십년에 걸친 세월 속에 숨겨진 진실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쳐다보지 마 스토리콜렉터 67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파킨슨 병으로 육체가 좀 먹고, 가족들에 대한 사랑에 몸서리 치고, 원치 않아도 범인을 쫓게 되는 임상심리학자 '조 올로클린'시리즈 9번째 작품. 피와 연쇄살인이 난무하는 시리즈물에 익숙하면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조금씩 범인에 대한 모습이 드러나면서 긴장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스릴러 시리즈물이지만, 다른 스릴러 시리즈물보다 주인공의 삶이 좀더 부각되어 더욱 가슴을 저리게 한다. 가족에 관해서도 생각할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시대 배경이 최근임을 알 수 있는 묘사들을 찾는 것도 읽는 재미를 부각시킨다. 그리고 심리학자가 주인공이다보니, 심리를 드러내는 약간의 힌트들이나, 각 시대별 사람들이 가지는 남성-여상 간 서로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에 대한 인식들도 묘사되어 있다.

 

책갈피 :

p22
다시금 긴 침묵이 흐른다. 줄리안이먼저 입을 뗀다.
"내가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어린 나이에 결혼하지 않을 거야."
"왜"
"좀 더 여행을 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
"나는 당신 여행을 막은 적 없어."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야, 조." 줄리안이 말한다. "그냥 내 생각을 말하는 거야."
p23
어리석소 어리석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실수였고, 그후로 줄곧 그때 저지른 일을 합리화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떤 변명으로도 내가 망쳐놓을 것을 원래 상태로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 한 번의 바보 같은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는 일은 드물지 않다. 우연한 만남, 사고, 혹은 한순간의 광기. 하지만 느리고 작은 변화가 쌓이고 쌓여 결국 폭발해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느린 변화. 내 인생은 한 번의 진단으로 인해 바뀌었다. 사망 선고는 아니었지만,병은 나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p25
"당신은 상냥한 남자야."
나는 늘 상냥한 남자였어. 당신이 나를 떠난 6년 전에도.
사과를 하려는 걸까, 나는 궁금하다. 어쩌면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뒷머리 선에서 진주 같은 땀방울 하나가 돋아나 척추를 타고 미끄러져 등의 오목한 곳으로 떨어진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은 나도 알아." 줄리안이 말한다. "우리가 저지른 실수를 모두 만회할 수도 없고......"
p27
우리는 식사를 계속하지만, 대화는 전처럼 가볍지 못하다. 질문이든 대답이든.
p41~2
벽난로 위에 생긴, 불그스름하게 번진 갈색 표식이 눈길을 잡아끈다. 원으로 둘러싸인 오각형 별 모양이다. 아래쪽 모서리들은 마치 벽이 피를 흘리는 것처럼, 회반죽 장식에서 피가 새어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상징들은 본능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어떤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반응하게 만든다. 이 별 모양도 그런 축에 속한다. 이교도의 표지로 인식되는 이 별 모양의 유래는 저 옛날, 고대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는 프리메이슨의 상징, 기사의 문장, 악을 물리치는 부적, 충성의 배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난 다섯 개의 상처를 의미하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표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뒤틀리고 불쾌한 무엇, 일종의 명함이거나 의도의 진술이라는 것밖에는.
p81
"로니 크레이 기억해?"
줄리안이 몸을 굳히고 조용해진다. 내게는 이미 익숙해진 침묵이다. 별거와 함께 찾아온 침묵.
"그 사람이 사건을 좀 봐달라고 해서."
"그런 일은 그만뒀다고 자기 입으로 그랬잖아."
p84
잠에서 깨어났는데 갑자기 이 삶이 더는 내게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중략)
내가 내 삶보다 더 자랄 수도 있을까?
(중략)
그건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울 때 사람들이 잘 써먹는 핑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략)
당신은 변했어. 내가 당신을 떠나는게 아냐, 이미 당신이 먼저 나를 떠났어. 당신은 일을 너무 많이 해. 당신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여기서 모든 일을 나 혼자 도맡아 하는데 지쳤어. 당신은 뚱뚱해졌어. 더는 당신한테 끌리지 않아. 이제는 섹스도 지루해졌어. 나한테 당신이 필요할 때 당신은 늘 내 곁에 없었어.
p85
어떤 남자들은 '불륜'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하려 들거나 섹스는 육체, 사랑은 정서와 관련된 행위이므로 둘은 별개라고 설득하려할 것이다.
한심한, 아적인수 격 개소리! 무엇으로도 죄를 면할 수 없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다.

p90
아무도 굳이 나를 찾으려 하거나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나를 잡아간 자는 내 가족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가족에게 납치된 아이였다.

p98
마치 누군가 눈치도 없이 장난을 친 기분이다. 행복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속임수였고 갑자기 행복을 빼앗긴 기분이다. 나는 시무룩해져 내 생각의 끄뜨머리로 살금살금 진실을 건드려보고 있다. 앞으로 무엇을 알게 될지 겁이 난다. 나한테는 언제 말할 셈이었을까? 입원할 날이 돼서야 알려줄 생각이었을까?
p109~10
공포와 후회가 나를 자꾸만 이곳으로 끌어당긴다.
(중략)
사랑하는 누군가를 죽이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 죄의식이 내면에서 커지고 부풀어 오른다. 마치 기행충처럼. 마치 독해파리처럼 심장에 똬리를 튼다.
(중략)
나는 내 자신을 완벽하게 숨기는 법을 통달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비법은 너무 높은 기준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절대 너무 영리하게 굴지 말고, 절대 자진해서 나서지 말고, 절대 목소리를 높이거나 손을 들거나 한 걸음 앞으로 나서지 말라. 첫째나 꼴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평균에 머물고 평범해지고 군중 속에 보이지 않게 스며들라.......
p111
어머니는 그런 연극을 무시했다. 아버지에게 아침을 차려주었다. 집을 청소했다. 일을 하러 갔다.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왜 그럴까, 나는 궁금했다. 왜 어젯밤에는 그렇게 조용히 할 수 없었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무엇보다 어머니의 침묵에 상쳐받았다. "당신 때문에 죽겠어." 아버지는 말했다. "차라리 나한테 욕을 해. 때리라고. 뭐라도 던져. 날 수녀원으로 보내지만 말아줘."
p112
어떻게 누군가를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애정을 갈구할 수 있을까? 사랑과 증오는 위아래가 뒤바뀐 동일한 감정이 아니다. 하나는 심작의 착각이고 또 하나는 배반당한 사람의 부산물이다. 둘 가운데에는 무관심이 놓여 있다.
p139
이 순간까지, 줄리안과 나는 익숙하고 편안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각자 본인 집에서 딸들을 공유하며 나람의 삶을 살고 있었다. 짧은 정사, 근심, 웃음, 그리고 온갖 짜증나는 일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동일한 두 사람이 약간 다른 궤도를 돌고 있었다.
p143~4
루이스는 취향은 단순하되 품성은 복잡한 남자다. 이 친구는 과거를 떨쳐내려고 노력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봤자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p155
도미니크가 서글픈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 여자가 저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셔야 해요. 저는 일주일에 7일을 일했어요. 간신히 생활을 꾸려나갔죠. 나는 간신히 물 밖에 머리만 내놓고 발버둥치는 꼴이었는데 그 여자는 같이 익사할 생각 따위는 애당초 없었어요. 대신 내 망할 놈의 돈을 챙겨서 석양을  향해 항해해갔죠. 저는 죄다 남김없이 잃었다고요."
p156
왜, 한번은 엘리자베스더러 뭐가 어찌 됐든 너를 떠받들어줄 남자하고 결혼해야 한다고 했다지 뭡니까. 차이거나 버림받지 않으려면요. 딸한테 그런 충고를 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잊어. 안정이 최고야."
p162
이건의 눈동자에 불꽃이 타오른다.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의 일로도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긴 한 모양이지. 하지만 이건은 자긱 저지른 실수를 후회하거나 자신을 의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일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잘나가는 나르시시스트답게, 자기성찰이나 반성이 불가능한, 으스대는 냉정함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따. 이 세상의 문제는 바보들과 광인들은 늘 자기 확신이 넘치는데, 더 현명한 사람들은 오히려 의심으로 가득하다는 데 있다고, 일찍히 버트런드 러쎌이 말했더랬지.
p165
"도깅이 뭔지 아십니까, 이건 씨?" 내가 묻는다.
"공공장소에서 알지도 못하는 아무나하고 섹스하는 거죠."
"줄겨 하십니까?"
"성병에 걸리고 싶으면 뭘 못 하겠어요."
p166
당신은 자신이 누구보다 잘났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지배하는 규범이나 도덕적 분별 따위를 어겨도 되는 특별한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죠."
p167
입은 스웨터는 당신 부인이 사줬을 테죠. 캐시미어. 아마 매년 생일 선물로 사주는 것 같은데요. 그건 당신이 부인한테 질려하는 이유 중 하나겠죠. 또한 부인은 살이 쪄서 볼품없어지면서 장모님과 닮아가고 있고, 그래서 당신은 딴 방에서 잘 겁니다. 아니, 내가 틀렸어요. 당신은 여기 시내에 아파트가 있을 겁니다. 부인은 큰 집에서 아드님들과 함께 살고 있을 테고요.
p169
나는 상담실에서 외롭고 사회적으로 서투른 젊은 남자들을 숱하게 봤다. 거의 예외 없이 학창시절 둔하고, 멍청하고, 뚱뚱한 남자애였다.
(중략)
그래도 대부분은 자라면서 어렸을 때의 서투름과 낮은 자존감을 극복한다. 친구나 썩 괜찮은 역할 모델, 또는 숨은 가능성을 알아봐주는 여자애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는 우울증과 지속적인 사회적 불안을 겪는다. 알코올과 약물 남용에 빠지고 병리적인 완벽주의를 발전시킨다. 자신의 예전 자아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p189
학자들이 하는 말로, '팩트드르이 절반의 수명'이라는 개념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 아는 사실의 절반은 진실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연구, 더 나은 기술과 더 늘어난 지식 덕분에 현재의 진실이 거짓이 되거나, 더 개선된 형태가 받아들여지는데, 이 역시 다시 노후하기 시작한다. 흡연은 한때 의사의 권장 사항이었다. 명왕성은 예전에 행성이었다. 지구는 한때 평평했다.
이 가설을 기반으로, 내가 이 범죄에 관해 알아낸 사실의절반은 틀렸음이 입증될 것이다. 시간의 틀이 더 길어질수록 더 많이 바뀐다 .한데 거짓으로 판명되는 것은 어느 쪽 절반일까? 나는 내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증거를 기반으로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다.
셜록 홈스가 이런 격언을 남겼다. '불가능한 것을 모두 삭제하고 남은 것은, 그게 무엇이든 아무리 그럴싸해 보이지 않더라도 진실일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개소리다. 불가능한 것은 정의하거나 정량화하거나 꼬리표를 붙이거나 목록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삭제할 수 있단 말인가?
p193
사람들이 왜 휴일을 매년 같은 장소에서 보내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매번 똑같은 가족 옆에서 캐러밴을 세우고, 같은 카페와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같은 이야기를 듣고, 마치 영원히 끊기지 않는 고리에 인생이 갇혀 있는 사람들 같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거주지들이 있고, 일부는 휴가철마다 새로 지어진다.
p196
마시는 여전히 땅콩버터 숟가락을 차지하려 애쓰고 있지만 목소리를 갈수록 쇳소리가 된다.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란 말야."
"망할 놈의 숟가락 좀 그냥 동생한테 줘버려.' 남자가 아들의 귀를 철썩 갈기며 말한다.
"하지만 제 거란 말이에요."
"가족끼리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어."
"재도 지 걸 나한테 준 적 없단 말이에요."
"조용히 안 하고 계속 성가시게 굴면 확 뺏어버린다. 아빠가 분명히 말했다."
(중략)
"바람을 피울 작정이었죠." 루이츠가 말한다.
"아니에요. 그래요. 맞아요." 남자가 겨드랑이를 긁적인다. "그냥 데이트란 걸 해보고 싶었어요. 뭔가 아이들하고 시끄러운 개들하고 연체된 고지서 말고 다른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어요."
p204
"생일은 다음 날이었어요. 여자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지...... 자기들 생일이 무슨 축제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요."
"인생의 진리지." 루이스가 말한다. "거기에 쓸데없는 의문을 제기해선 안 돼."
p213
나는 관음증과 노출증의 심리학을 설명하려 애쓴다. 이는 인간의 두 가지 핵심 본능인 생존 및 재생산과 관련이 있다. 위험과 섹스 모두 우리를 흥분시킬 수 있으며, 이따금씩 뇌가 양자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헷갈려서, 우리는 반항 행위에 의해, 노출 행위에 의해, 또는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의해 흥분한다.
p220
클리프턴 나비는 기억하면서 내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화가 난다. 지각 있는 나는 마음속으로 지금의 나란 인간을 증오한다. 본성은 양육에 승리하지 못했다. 둘 다 글러먹었다.
p226~7
제 잘못이죠. 저는 결혼으로 신분상승을 했다가 몰락하는 남자의 고적적 본보기거든요. 아내는 준 남작의 막내딸이었죠. 그래도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다만 여자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죠."
p242
"우리 사회는 남자들의 공격성을 너그러이 바주는 것 같아요. 남자들은 나약하고, 불행한 존재로 여겨지죠. 예전과 달리 통제력뿐만 아니라 특권이나 권력도 잃어버렸으니까, 그래서 남자들이 우리한테 주먹을 날리더라도 용서해줘야 한다는 식이지."
"그분은 엘리자베스를 때리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멍든 자국을 내 눈으로 봤는걸."
"그분이 따임을 때리는 걸 보셨습니까?"
베티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들의 문제는....."하고 베티가 말한다. "자기들 젠더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에요.
p244
"이혼녀였다고. 예뻤다고. 그 애는 자기 앞가림을 하는 아이였어요. 결혼은 망쳤지만 삶을 즐기고 싶었죠. 그게 뭐가 잘못인데" 그애는 독립적인 여성이었어요. 해방되었고 자주적이었죠. 결혼이라는 굴레가 자신을 옭아매서는 안 된다고 믿었어요."
이 연설은 어째 이전에 한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기 사람들을 지키고 이방인, 게으름뱅이, 회피하는 자, 청교도주의가, 위선자와 작은 마을의 뒷담화를 증오하는 여자의 훈계.
p246
죽음은 최종 행위여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 급작스럽게, 또는 예기치 않게 죽었을 때는 너무 많은 일들이 미완인 채로 남는다.
(중략)
지금까지는 이 범죄를 해결할 열쇠를 우연히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가문의 문서, 일기장 한 뭉치, 또는 연애편지 묶음. 하지만 무언가가 우편으로 배달되거나 내 무릎으로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p263
뭔가 안심이 될 만한 말을 해주고 싶지만 여전히 반쯤 잠든 상태인 나는 줄리안의 실망을 달래줄 말 한 마디도 떠올리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따금 영어에서 가장 강력한 세 단어가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틀렸다. 정답은 이렇다. '제발 나를 도와줘.'
p274
이 남자의 동기가 뭡니까? 권력, 질투, 아니면 성적인 만족?"
"복수와, 아마도 통제겠죠." 내가 대답한다.
"어째 자신이 없는 말투네요."
"저는 아직 그 남자를 모르니까요.'
p281
어머니가 수모당하는 것을 보면서 자란 아들은 자신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중략)
남자는 여전히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근육 단련을 시작해, 하루하루 더 중량을 늘려가며 자신을 몰아붙였다.
p297
"내 자궁을 떼어낼 거래."
"암 덩어리를 잘라내려는 거잖아."
"내 일부가 사라질 거야. 나를 여자로 만드는 무언가가."
"당신은 더는 아이가 필요 없잖아."
"핵심은 그게 아니야"
줄리안이 소매에서 티슈를 한 장 꺼내 코를 풀고 젖은 종이를 주먹에 말아 쥔다. 나는 여자가 된다는 것은 아기를 낳는 일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해준다. 줄리안은 그걸 이미 지나왔다. 이제는 부모가 됐고, 그게 더 중요하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야. 당신은 똑같은 여자일 거야. 당신 머리, 당신 개성, 당신 영혼도."
"당신은 우리가 영혼이 있다고 믿지 않잖아."
"당신은 예외야."
p305
범죄심리학은 잔혹하다. 인간 행동에서 최악의 사례를 캐 들어가는 학문이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강간범, 소아성도착증, 피학대 음락증, 폭력의 피해자들...... 이는 대가를 챙긴다. 사람을 갉아먹는다.
p309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전도서 3:1-15). 모든 일에는 시간이 있다. '태어날 시간, 죽을 시간, 울 시간 그리고 웃을 시간, 죽일 시간, 치유할 시간......'
(중략)
인생사 타이밍이 핵심이다. 좋은 농담은 타이밍이 핵심이다.
p323
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들을 위해 변명을 한다. 사건을 축소한다. 용서한다. 서사를 바꾼다. 그들의 피가 우리의 피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샘솟는다. 내일은 새로운 날이야. 내년이 되면 더 나아질 거야. 우리는 돈을 절약하고 살을 빼고 담배를 끊고 운동을 더 하고 사랑에 빠지고 충만해질 거야.
p328
"우리 주님은 진정 뉘우치는 죄인들을 용서하십니다."
"지옥을 공짜로 벗어나는 카드 말씀이시군요."
p366
"부인이 공격받은 사건은 잊으려고 아무리 애쓰셔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내가 말한다. "부인이 진실을 대면하고 화해하지 않는 한은요. 이 남자는 다른 사람들을 사냥하는 동안에도 부인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p366~7
누구에게나 세 개의 심장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심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심장, 그리고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는 심장. 내가 사랑들에게 찾는 것은 마지막 심장이다. 보통 가장 상처받는 심장.
p382
줄리안이 이 이야기를 이제 와서 처음 하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전기가 한 번 쓰이고 다시 고쳐 쓰여서, 이제는 놀랄 거리가 조금도 남지 않을 줄 알았는데. 모든 질문이 제기되고, 모든 일화들이 불려나온 줄 알았다.
p384
처음 만난 이야기를 윤색하고, 특별한 순간을 낭만적으로 색챌하고, 반짝이는 창조 신화로 세세한 부분까지 광을 낸다. 이건 모든 커플이 마찬가지 아닐까.
p385
나는 내 일은 너무 가까이 가져왔다. 줄리안과 딸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
그래도 우리 사이가 지속될 수 있었을까? 누가 알겠는가? 제아무리 최고의 결혼생활이라도 핀터(해럴드 핀터, 영국 출신의 부조리 연극의 대표적인 작가--옮긴이)의 연극처럼 될 수 있다. 중간에 긴 막간이 비거나,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대사를 끝마치거나 아예 아무런 대화도 없는
p388
왜 여자들은 성차별과 남성우월주의를 불평하면서 애덤 랜드리 같은 자식이 자기 찌찌를 건드리게 가만 놔두지?
사람들이 세상이 남자의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그런 식으로 굴도록 놔두는 쪽은 녀자들이다. 여자들은 여만인을 내좇아버리거나 야만인들에게 변화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데, 반대로 근육남과 알파메일(강한 이미지의 남성을 이르는 말-옮긴이)과 야민인 들에게 영합한다. 어쩌면 자기들이 야만적인 야수들을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실은 남성우월주의와 여성혐오를 영속화하고 있을 뿐이다.
심리학자가 내 생각에 동의할지 궁금하다.
p403
"당신은 내가 왜 인간보다 개를 더 사랑하는지 알아요?" 총경이 소리친다. 전반적으로 더 누그러졌다. "개들은 먹여주고 쓰다듬어 주기만 하면 나를 사랑해주거든. 사람은 누구 하나 날 사랑해주지 않을 때도."
p408
"당신 말씀이 옳습니다, 콜리어 씨. 제가 뭘 알겠어요? 저는 그저 폭행당한 여자들, 강간 피해자들, 아동성도착자들, 아동학대범들과, 학대로 너무 심한 외상을 입어서 남자 목소리만 들어도 침대에 오줌을 싸는 아이들을 치료하느라 20년을 보냈을 뿐이니까요. 당신은 아마 어떤 여자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계시겠지만, 저는 파편들을 줍는답니다. 그 사람들이 다시 완벽해지게 만들죠. 그렇지만 젠더 일반화와 충고에 감사드려요."
p413
사이먼이 저한테 전화를 걸었죠. 몇 시간씩 통화했어요. 누군가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면 그렇게 되는 법이죠. 서로 시시덕대고, 서로에게 빠져들고. 서로를 원하게 되고. 이런 과정이 순식간에 진행되는데, 서로를 연결하는 지점이 있거든요. 공통의 과거라는."
p419
나는 언제나 그들을 찍어낼 수 있다. 그들은 따로 차를 타고 오거나 각자 다른 시간에 오고, 때로 자기들의 속임수를 감추려고 방을 하나 더 예약한다. 부부 사이인 척하며 내게 집에 아이들을 두고 왔다는 둥 두 번째 신혼여행을 왔다는 둥 주절대는 치들도 있다.
가명과 가짜 주소를 대는 것은 표준화된 절차에 가깝다. 현금으로 지불하고 적어도 집에서 30킬로미터는 넘게 떨어진 곳을 찾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야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마주칠 염려가 없을 테니까
(중략)
내가 '혹시 모르니까' 신용카드를 이용해달라고 하면, 그들은 즉각 현금을 내놓거나 악수를 청하는 척하며 내 손바닥에 20파운드 지폐를 밀어 넣는다.
p421
상습범들, 말하자면, 용서받았지만 회개는 하지 않고 기만을 배운 자들. 대부분은 딴짓을 숨기는 데 더 능숙해진다. 비밀 이메일 계정과 별도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여분의 옷을 두고 주머니의 영수증을 꼼꼼히 확인한다.
p437
좋은 사람들이 왜 나쁜 짓을 저지를까? 수많은 이유들이 있다. 부인, 또래 압력, 좁은 시야, 낮은 자존감, 무지, 교만, 무질서, 경쟁, 시간 압박, 인지부조화, 중독, 복수심 또는 손신을 만회하려는 마음, 계속 댈 수도 있지만, 핵심은 수학과 판다 외에 '예스 노', 혹은 흑백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p440
내가 자기를실망시킬 때마다 써먹는, 흡족해하며 얕잡아보는 미소다. 나는 한 번도 충분히 좋지 못했다. 나는 그녀와 충분히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그녀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충분히 영리하지 않다. 충분히 돈을 벌지 못한다. 야망이 없다. 모든 면에서 실해작이다. 그렇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지켜준다.
(중략)
직장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면 나는 일 중독자다. 하루 결근을 하면 게으름뱅이다. 그녀는 나의 공포와 나약함을, 공감과 불완전함을 먹이로 삼는다. 나를 밀어냈다가 다시 다정하게 다가온다.
(중략)
날 욕망하지 않고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심지어 내가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존재임을 온갖 방법으로 보여준다.
p443
나는 거짓말을 할까 궁리하지만 진실이 더 잘 먹히는 법이다.
p451
나는 천성적으로 문제를 푸는 사람이다. 구체적인 질문과 답을 좋아한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매듭이 안 지어진 일은 내 주의를 잡아끌며 성가시게 구는, 팔랑거리는 신발근이 된다.
p456
조지 오웰은 1946년에 살인이 뉴스가 되려면 극적이고 비극적인 요소들, 스펙터클하고 시각적인 이미지, 그리고 도덕적 분노 따위가 필요하다고 썼다. 거기다 '이상적 피해자'를 보탰어도 좋았으리라, 약자이고 우리의 동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누군가.
p459
"'사자의 시선'이라는 말을 들어봤나?"
"아니"
"개한테 막대기를 던지면, 막대기를 쫓아갈 거야. 하지만 사자한테 막대기를 던지면, 너를 쫓아오겠지."
p472~3
"당신 다리는 멋져 보여."
"가슴은 어떤데?"
"무척 생기 넘쳐 보여."
"생기?"
"왼쪽도 그렇고. 핑키도 나쁘지 않아."
"내 가슴에 이름을 붙였다. 이거지."
"그게 잘못됐어?"
"아마 성적 대상화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건 내가 당신 가슴을 단순히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한다는 말이잖아.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당신의 모든 부분을 동등하게 사랑하는걸."
p490
틀림없이 내가 전화를 건 줄 모르고 우연히 통화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p533
아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지만, 천국에서 꼭 다시 만날 거라고 믿는다. 또한 악이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다는 것도 믿는다. 그날 일어난 사건은 의사와 병원의 잘못이라고 믿는다.
p534
나는 많은 이유로 울었지만, 대부분은 다양한 자기연민으로 인한 눈물이었다. 줄리안이 보고 싶어서 울었다. 찰리와 엠마 때문에 울었다. 내 죽음이 두려워서 울었다.
나는 이제 시간을 다르게 잰다. 시간은 줄리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중략)
음, 나는 어쩌면 죽음에 사로잡히고 싶은지도 모른다. 어쩌면 추억 속에서 뒹굴고 싶은지도 모른다.
p534~5
나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악의도 품지 않는다. 너무 많은 원인이 만들어낸 많은 상처들을 목격한 지금, 내 역할은 다른 사람들이 더 달콤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고통을 빨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임을 알지만, 슬픔에 잠겨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은 남편이 계속 버티는데 도움이 되는 거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그 남자는 잠이 들면 잊고 깨어나면 기억한다. 그리고 비극적인 소식을 처음 듣는 양 다시 충격을 받는다.
그 남자는 물에 빠지지만 헤엄치고, 숨이 막히지만 숨을 쉰다. 그리고 이따금, 밤늦게, 모든 이불을 걷어차 버릴 때, 누군가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바닥에 메세지를 적어나가는 것을 느끼리라.
나...... 여기...... 있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티네의 끝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끌림, 오해, 슬픔, 직업과 생활, 그리움이 잔잔하게 녹아 있는, 세상에서 자신이 지켜야만 하는 자리가 있는 '어른'들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책갈피 :

p8
처음 남났을 당시 그들은 '인생길의 반 고비에 이르러 올바른 길을 잃고' 있던 중이었다. 즉 마흔 살이라는 일종의 독특하고도 섬세한 불안의 나이에 접어든 참이었다. 그들의 환하고도 소란스러운 일상은 그것이 지속된다고 상상하든 지속되지 않는다고 상상하든, 어느 쪽도 그리 내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또한 [신곡]의 시구에 나오는 그대로,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지는 알길이 없건만' 문득 깨닫고 보니 그 '컨컴한 숲 속'에 헤매 들었던 것이다.

p58
아버지가 '베니스에서 죽다' 증후군이라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지어낸 말이지만, 그 정의는 '중년이 되어 돌연 현실사회에 적응하는데 염증이 나서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려고 파멸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이라네요.
바로 나를 가리키는 말이죠.^^ 살아서 돌아오라고 몇 번이나 다짐하셨어요. 아버지에게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 어떻게든 무사히 잘 지내야 한다고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p59
[베니스에서 죽다]의 주인공 에셴바흐는 예술과 현실의 균형을 부단한 정신적 노력으로 유지해나가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 같은 미소년 타지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이후 그의 뒤를 추적하는 것으로 일상을 버리고 이윽고 파멸에 이른다.

p62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그는 자신이 음악가로서 다시 한 단계 높은 곳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무래도 지향하고 있었던 것과는 또 다른, 어떤 따분한 산에 올라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뿐만이 아니다. 주위에도 사실은 그렇게 보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고독을 느끼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품었다. 그런 경험은 음악가가 된 이후로 여태까지 한 번도 없어싿.
그리고 마흔을 코앞에 둔 자신의 나이를 새삼 의식하고, 헤어지던 참에 서로 마주 보았던 그날 밤 택시 안의 요코의 얼굴을 침통한 표정으로 다시 떠올렸다.

p118~9
무엇이 달라졌기 때문이냐고 한다면 서로 간의 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육체와의 경계쯤에 매우 가연성이 높은 부분이 있다.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그 한끝에 불이 붙으면 그것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서 손을 댈 수 없게 되고 만다.
 그 불길에 상대의 마음이 만나 불타버리면 두 사람은 단지 고통에서 달아나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원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만일 그러한 것이라면 애초에 길게 이어질 리 없다. 그 불길은 어딘가에서 좀 더 온화하게 지속되는 열기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이란 그러므로 젊은 사람에게는 일종의 느슨해진 연애일 뿐이다. 그 앞에 빤히 보이는 결혼에는 아무리 큰 축복이 넘치더라도 한 줌의 체념이 섞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코가 리처드와 재회한 것은 나이상 이제는 슬슬 결혼해야 한다고 느끼던 때였다.
진보적인 통신사 여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아이가 있는 인생과 아이가 없는 인생, 양쪽 모두를 가능한 일로 상정하고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그리고 마흔이라는 나이를 코앞에 두게 되자 역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그녀의 육체와 마음 사이에는 나이에 걸맞은 자유로운 틈새가 생겨나 있었다. 굳이 불길이 일지 않더라도 그녀는 리처드와의 미래를 온건하게 상상하고 그 몸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와 생활을 함께하는 것이고 그가 부친으로서 적합한 인물인가 하는 것이었다.
p129
마키노의 이야기에는 허세가 없고, 희화화되는 대상은 결국 그 본인이어서 타인을 조롱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풍자적인 효과가 있고, 딱히 얌전한 것은 아니지만 외설적인 내용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전체적으로 기품이 있었다.
p161
한 곡이 끝낼 때마다 그녀가 앉았어야 할 왼편 깊숙한 계단 옆의 빈 좌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제는 오지 않겠구나, 하고 그는 깨달았다. 그 좌석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곁으로는 오지 않으니라는 것을. 그녀를 향한 마음의 찢어진 틈새에서 느릿느릿 출혈이 이어졌다.
p186
'누구의, 과연 누구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인가, 결코 만족하는 일이 없는 의지로 그들의 몸을 쥐어짜는 것은'이라는 [두이노의 비가]의 시구가 뇌리를 스쳤다.
p198
그 대신 상대의 시선에서 뭔가 포옹을 대신할만한 것, 그 벌충으로서의 열기화 촉촉함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중략)
마키노는 행복했다.
생활 곳곳에 사랑의 빛이 비쳐들어 그 반사가 때때로 그를 놀라게 하고 실눈을 뜨고 웃게 만들었다.
행복이란, 매일매일 경험하는 이 세계의 표면에 관해 함께 이야기할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p206
마키노는 예전에는 당연한 듯 가득 채워졌던 창조적인 삶의 충실이 하필 지금 이런 때에 자신에게서 완전히 바쪄나간 불우함을 저주했다.
p211
리처드와 헤어지고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자유로운 몸이 된 다음에야 그녀는 스스로 마키노와의 사랑을 허락했다. 하지만 리처드의 인식으로는 그녀가 아직 그와 사랑의 권내에 있고 다만 변덕이 나서 잠깐 스트레스도 풀 겸 근처를 방황한 정도인 것이다.
(중략)
리처드는 그런 요코의 배려를 일종의 흔들림으로 간주하고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연락을 끊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매번 재결합을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고 둘이 사귈 때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투로 명랑하게 용건만 전하고 전화를 끊는 일도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이미 다 해결된 것처럼.
p227
그녀 자신도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하루빨리 그를 만나고 싶었다. 결혼해서 그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어느 틈엔가 간절히 그런 바람을 가진 그녀는 마흔이라는 자신의 나이에도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p239
고레나가의 암울한 분석에 따르면, 오카지마는 '그런 것'을 자신이 여태까지 알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게 무엇보다 화가 나서, 자기도 당연히 다 알고 있고 그런데도 시도하지 않은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누누이 변명을 늘어놓는 전형적인 '거품 아재'라는 것이었다.
(거품아재 : 일본의 거품경기 때인 1965년~1970년에 출생하고 부유함을 누리며 성장하여 사회의 중견이 된 세대)
p240
노다의 생각을 간추리면 이런 것이었다.
예술의 가치는 칸트의 정의 이래로 '아름다움(beautiful)'이냐 '숭고함(sublime)'이냐, 둘 중 하나였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특히 현대의 인터넷 사회에서는 그것이 그대로 '멋있다(cool)'와 '대단하다(awesome)'가 되었다. 현대 아트 중에서도 있기 있는 것은 역시 게르하르트 리히터처럼 '멋있는' 작품이거나 안드레아스 거스키처럼 '대단한' 작품으로,
p253
내가 지금 대체 뭘 하는 건가, 하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마키노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싶다...... 그 마음은 순수했지만 그에 대한 사랑은 아무래도 보답받을 길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 불가능함을 지금 제 손으로 확정 지으려하고 있었다.
p254
미타니는 요코가 마키노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워졌으며 또 이제부터 마키노를 만나기 위해 아름다운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몸이 부르르 떨리는 듯한 격한 질투에 휩싸였다.
p258
가슴이 아파왔지만 그것도 이윽고 잊힐 게 틀림없다. 자신은 지금까지 남들보다 더 성실하게 살아왔다. 세상 누구라도 죽기 전까지는 분명 각자 나름대로 죄를 범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용서받을 죄의 무게에는 아직 여유가 있을 터였다.
p266
PTSD 발작은 파리에서 오는 항공편 안에서도 내내 걱정스러웠지만, 도쿄에 도착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꿈꾸었다. 생각지도 못한 감정의 폭발로 이 사랑을 망쳐버리는 것을 염려했지만, 그래도 그의 사랑이 주는 평안 뒤에서 위안을 찾고 있었다.
p267
그와 마주하면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인생의 기쁨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그것은 거의 불가사의하다고 느껴질 만큼 기적 같은 일이었다.
p285
마키노와 대화를 나눈 뒤에는 매번 가슴속에 잠시 마음껏 쾌활할 수 있었던 여운이 따듯하게 남았다. 다른 어느 누구와 이야기해도 그런 식으로 웃음이 끊이지 않은 적은 없었고 그와의 대화 어디를 찾아봐도 자신이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이외의 다른 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와 함께 있을 때의 자신에 대해 요코는 인생에서 지금껏 알지 못했던 종류의 애착을 느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살수도 있구나, 하는 깨우침을 얻은 것만 같았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와 다른 어딘가에 있었을 때의 자신과는 다르게 기분 좋은 것이어서 집에서 혼자 있을 때조차 그가 바로 곁에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계속 그런 자신으로 남고 싶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앞으로 그런 자신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단지 추억 속에만 있을 뿐. 그리고 그 '구멍이 뚫린 듯'한 가슴속의 공백에는 이제 한없는 쓸쓸함만 스며들었다.
p311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심에 대해 "왜?"라는 질문이 오래도록 꼬리를 끌었지만, 미타니와의 결혼생활에 그런 되풀이를 끌고 들어가는 것은 남편으로서 불성실한 일이었다. 지금 의미가 있는 것은 요코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미타니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었다.
p326
리처드는 헬렌과의 관계를 통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위로를 얻었지만 죄책감이 그것을 손상시키지는 않았따. 오히려 그 양심의 가책이 만만치 않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꼭 필요한 의외의 효능을 가진 묘약이 되었다. 남몰래 '악'을 범하고 있다는 우월감이 그를 다그쳐 겸허하게 만들었다.
인내에는 대부분 이해득실의 계산이 따르는 법이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인내를 강요당하는 애타는 번민에는 남들이 당연히 지키는 금지를 몰래 깨뜨린다는 욱신거림이 오히려 한 알의 청량제가 되었다.
p334
지금까지 사회의 부정을 엄격히 파헤쳐운 자신이 막상 남의 일이 아니라 남편의 문제와 직면했을 때, 그것을 없었던 일로서 눈을 감아야하는가.
p340
"당신에게는 그런 차가움이 있어. 항상 느꼈어. 너무 차가워. 그래서 나는 항상 불안했어. 내가 인생에서 정말로 힘들어할 때 당신이 과연 내 옆에 계속 있어줄까 하고. 당신은 늘 혼자야. 아주 많이. 당신의 성장 과정 때문인지도 모르지. 누구와 결혼했더라도 당신은 분명 그랬을 거야.
p353
그는 [히프노스의 문집] 속의 수수께끼 같은 한 문장에 마음을 빼앗겼다.
'명석함이란 태양과 가장 가까운 상처다.'
(중략)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 화제들이 너무도 많이 쌓여 있었다.
p360
마키노는 자신도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그게 아니라 지금 자신이 그녀에게 품고 있는 호감에 그대로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요코에게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일정 바라서는 안 된다. 그녀의 존재와 함께 그것은 이제 다 잊어버려야 한다.......
p361
사나에는 결국 그 죄의 밤에 돌연 번뜩였던 자기에 대한 변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죄의 총량'이라는 이론이다. 한편생 어떤 죄도 범하는 일 없이 살아가는 인간 따위, 이 세상에 있을 리 없다. 누구라도 죄를 범하게 마련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거우냐 가벼우냐의 차이밖에 없다.
p367
어딘지 불안한 기색으로 임신을 털어놓은 사나에를 마키노는 조심스럽게 포옹했다.
인생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고 느꼈다. 그리고 지난 밤에 강하게 몰려왔던 요코에 대한 미련을 이번에야말로 끊어 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p374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보다는 상대와 함께할 때의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서로에게 더 큰 불행이었다.
p397
눈앞에 마키노의 아이를 가진 여자가 앉아 있다. 요코는 예전에 자신이 얼마나 강하게 그것을 꿈꾸고 원했는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키노가 결국 다른 여자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자시느이 나이를 생각하면 그건 이미 불가능한 바람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고 그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요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p402
'그냥 팬'에 머물지 않는 마키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사나에가 꿰뚫어본 것만 같아 졸지제 얼버무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는 결코 그런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심으로는 분명 그와의 재회에 전혀 기대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p407
사랑을 위해서는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 짓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뻔뻔함에는 혐오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키노를 위해 나는 저토록 낮은 곳까지 떨어질 수 있을까, 하고 요코는 불안해졌다. 어쩌면 그런 방법을 동원할 것도 없이 마키노에게서 사랑을 받아버린 자신에 대한 통렬한 복수인 것 같기도 했다.
p409
요코는 홀로 호텔 방 카펫에서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고는 침대에 엎드려 드디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호읍했다.
p412
줄리안 브림과 존 윌리엄스의 편곡에 의한 드뷔시의 달빛, 브라우어의 트립티코, 피아졸라의 탱고모음곡 등 (중략) 토드 렌그렌의 어 드림 고즈 온 포에버 (중략)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 제17번 '사냥' 제4악장
p417
페르난도 소르 전곡을 친다면서
p418
카르팡티에의 사라진 발자국이었어.
p421
라흐마니노프와 라벨, 빌라 로보스의 보컬리즈 작품
p425
이제는 때때로 그의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상상하면 무서워졌다.
p426
하지만 그 모든 행복이 이상함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p432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그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가슴을 쳤다.
p433
마키노의 머릿속에는 요코의 표정이 언뜻언뜻 떠올랐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든 지워버리려고 해온 사나에와의 2년간의 결혼생활이 더 선명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사나에가 얼마나 필사적인 심정으로 그 거짓 메일을 보냈을지,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마키노는 손에 잡힐 듯이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을 여태껏 속여왔는데도 마키노는 당장 아내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없을 만큼 이미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따. 아이러니하게도 마키노는 그것을 지금 이런 때에 새삼 깨달았다.
p436
요코는 오랜만에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공감하는지를 다시 떠올렸고, 앞으로의 인생을 가능한 한 그런 사람들과 함께 보낼 수 있기를 원했다. 그것이 아마도 삶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일 터였다.
p437
사나에가 한 짓에는 경멸의 감정을 품었지만, 그녀 본인을 원망한다기보다 인생 그 자체에 대한 허무감이 더 강했다.
p442
"자유의지라는 것은 미래에 관해서라면 없어서는 안 될 희망이야. 인간은 자신이 뭔가를 해낼 수 있다라도 반드시 믿을 필요가 있어. 그렇지? 하지만 요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과거에 대해서 깊은 회한이 드는 법이야. 뭔가 좀 더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라고 말이야. 운명론이 오히려 위로가 되는 경우도 있어."
p443
그녀는 사나에가 털어놓은 자신과 마키노의 이별의 진상을 생각했다. 그것은 역시 완전하게 어쩔 수 없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더 괴로웠다.
p448
티토는 [달마티아의 아침 해]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지에 누운 주인공의 사체를 파르티잔의 희생에 대한 시적인 오마주라고 이해했었지. 하지만 민족주의자들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었어.
p449
"그러니까 지금이에요,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내 과거를 바꿔주는 지금 이 순간."
p453
사나에의 고백 이후 마키노는 아내에 대한 겹겹의 모순된 감정으로 괴로워했다.
차갑고 거센 분노와 쓸쓸한 배려. 떠밀어낼 듯한 경멸과 못본 척해버릴 수도 없는 연민. 그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과 더 깊은 이해. 그리고 수없이 헤어지자는 결단까지 마음이 기울었던 혐오와 이제는 애착이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할 익숙해진 애정.......
p456
마키노는 마침내 잠이 든 자식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 아이에게는 부모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안심하고 믿게 해주자고 생각했다. 자신을 품에 안은 아버지의 마음속에 실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성이 늘 존재했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 아닌가.
p460~1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아다지오, 바리오스의 대성당, 빌라 로보스의 가보타 쇼로, 무반주 첼로 모음곡
p467
4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서 요코도 역시 나이가 느껴졌지만 그 모습은 정채를 내뿜었다. 예전에 거의 매일 컴퓨터 너머로 대화하던 무렵의 기억이 연달아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그리웠다.
마키노는 요코의 인생도 그때로부터 크게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했다.
p468
이 멋진 세계~뷰티풀 아메리칸 송스
p469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사나에와 유키와의 생활 속에서 그에게 죄책감을 안겼다. 마키노는 특히 유키의 삶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싶었다. 그걸 못해낸다면 자신은 인간으로서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린 일이라고 수없이 자신을 타이르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미련에 화를 내곤 했다.
요코의 생기 있는 모습을 보고 마키노는 내 일처럼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그런 만큼 이제 새삼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느낌도 들었다.
p470
마키노는 지금 이 삶의 사실성에 발이 묶여 있었다. 현재는 이미 각자 충실한 것이 되어버렸고 그 생활에 따르는 감정 또한 싹터버렸다.
과거는 바꿀 수 있다. 그렇다, 하지만 과거를 바꾸면서 현재를 바꾸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가능한 일일까.
p475
바루으어의 3부의 명곡 검은 데카메론, 빌라 로보스, 다케미쓰 도루, 로드리고, 브라우어의 소나타
p478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 번, 5번, 제3번, 아란후에스 협주곡
p479
마키노와 자신 사이에 흘러간 시간의 기억이 그녀의 가슴을 옥죄었다.
요코는 감은 눈커풀 틈으로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떨구면서 그것을 꾸욱 견뎠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왜일까?'라고 다시금 물었다. 왜 자신은 그와 따로 떨어져 사느 인생을 걷고 되고 만 것일까.......
p480
그를 만나서는 안 된다고 요코는 생각했다. 이미 때늦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중략)
자신은 이곳에 이생의 매듭 하나를 짓기 위해 찾아온 것이니까...... 그러나 이 최소한 이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그르 향한 사랑 안에 머물고 싶었다. 지금까지 단 세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그러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깊이 사랑했던 사람...... 음악이 앞으로 내달려갔다. 이 한때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녀는 기도했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기를
p482
"그럼 오늘 이 마티네의 끝에서 한 가지, 매우 특별한 곡을 연주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And now, at the end of the matinee, I will play one more melody-a very special melody-for you)."
(중략)
그 첫머리의 아르페지오를 들은 순간, 요코의 감정은 억누를 길 없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p484
아까부터 그는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중에서 [행복의 동전]의 한 구절을 단편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천사여! 우리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광장이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닐까. 그곳에서는 이 세계에서는 끝내 사랑이라는 곡예에 성공한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이...... 그들은 분명 이제 더 이상 실수하지 않으리니...... 다시금 고요함을 되찾은 양탄자 위에 서서, 마침내 참된 미소를 짓는 그 연인들......'
p485
마키노는 이미 그녀 쪽으로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 모슴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점점 커져갔다. 눈시울을 붉히며 요코도 마침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처음만나 주고받았던 그날 밤의 미소로부터 5년반의 세월이 흘러가 있었다.
p490
마티네(matiness)는 프랑스어로 '오전 중'이라는 뜻의 마탱(matin)에서 유래한 말이다. 연극, 음악회, 오페라 등의 낮 공연을 가르키는 용어로, 주로 저녁에 이루어지는 공연을 낮 시간이 자유로운 학생과 주부들도 즐길 수 있게 시간대를 넓혀 대상을 확대하려는 예술경영 전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