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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쳐다보지 마 ㅣ 스토리콜렉터 67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파킨슨 병으로 육체가 좀 먹고, 가족들에 대한 사랑에 몸서리 치고, 원치 않아도 범인을 쫓게 되는 임상심리학자 '조 올로클린'시리즈 9번째 작품. 피와 연쇄살인이 난무하는 시리즈물에 익숙하면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조금씩 범인에 대한 모습이 드러나면서 긴장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스릴러 시리즈물이지만, 다른 스릴러 시리즈물보다 주인공의 삶이 좀더 부각되어 더욱 가슴을 저리게 한다. 가족에 관해서도 생각할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시대 배경이 최근임을 알 수 있는 묘사들을 찾는 것도 읽는 재미를 부각시킨다. 그리고 심리학자가 주인공이다보니, 심리를 드러내는 약간의 힌트들이나, 각 시대별 사람들이 가지는 남성-여상 간 서로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에 대한 인식들도 묘사되어 있다.
책갈피 :
p22
다시금 긴 침묵이 흐른다. 줄리안이먼저 입을 뗀다.
"내가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어린 나이에 결혼하지 않을 거야."
"왜"
"좀 더 여행을 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
"나는 당신 여행을 막은 적 없어."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야, 조." 줄리안이 말한다. "그냥 내 생각을 말하는 거야."
p23
어리석소 어리석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실수였고, 그후로 줄곧 그때 저지른 일을 합리화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떤 변명으로도 내가 망쳐놓을 것을 원래 상태로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 한 번의 바보 같은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는 일은 드물지 않다. 우연한 만남, 사고, 혹은 한순간의 광기. 하지만 느리고 작은 변화가 쌓이고 쌓여 결국 폭발해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느린 변화. 내 인생은 한 번의 진단으로 인해 바뀌었다. 사망 선고는 아니었지만,병은 나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p25
"당신은 상냥한 남자야."
나는 늘 상냥한 남자였어. 당신이 나를 떠난 6년 전에도.
사과를 하려는 걸까, 나는 궁금하다. 어쩌면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뒷머리 선에서 진주 같은 땀방울 하나가 돋아나 척추를 타고 미끄러져 등의 오목한 곳으로 떨어진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은 나도 알아." 줄리안이 말한다. "우리가 저지른 실수를 모두 만회할 수도 없고......"
p27
우리는 식사를 계속하지만, 대화는 전처럼 가볍지 못하다. 질문이든 대답이든.
p41~2
벽난로 위에 생긴, 불그스름하게 번진 갈색 표식이 눈길을 잡아끈다. 원으로 둘러싸인 오각형 별 모양이다. 아래쪽 모서리들은 마치 벽이 피를 흘리는 것처럼, 회반죽 장식에서 피가 새어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상징들은 본능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어떤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반응하게 만든다. 이 별 모양도 그런 축에 속한다. 이교도의 표지로 인식되는 이 별 모양의 유래는 저 옛날, 고대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는 프리메이슨의 상징, 기사의 문장, 악을 물리치는 부적, 충성의 배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난 다섯 개의 상처를 의미하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표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뒤틀리고 불쾌한 무엇, 일종의 명함이거나 의도의 진술이라는 것밖에는.
p81
"로니 크레이 기억해?"
줄리안이 몸을 굳히고 조용해진다. 내게는 이미 익숙해진 침묵이다. 별거와 함께 찾아온 침묵.
"그 사람이 사건을 좀 봐달라고 해서."
"그런 일은 그만뒀다고 자기 입으로 그랬잖아."
p84
잠에서 깨어났는데 갑자기 이 삶이 더는 내게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중략)
내가 내 삶보다 더 자랄 수도 있을까?
(중략)
그건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울 때 사람들이 잘 써먹는 핑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략)
당신은 변했어. 내가 당신을 떠나는게 아냐, 이미 당신이 먼저 나를 떠났어. 당신은 일을 너무 많이 해. 당신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여기서 모든 일을 나 혼자 도맡아 하는데 지쳤어. 당신은 뚱뚱해졌어. 더는 당신한테 끌리지 않아. 이제는 섹스도 지루해졌어. 나한테 당신이 필요할 때 당신은 늘 내 곁에 없었어.
p85
어떤 남자들은 '불륜'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하려 들거나 섹스는 육체, 사랑은 정서와 관련된 행위이므로 둘은 별개라고 설득하려할 것이다.
한심한, 아적인수 격 개소리! 무엇으로도 죄를 면할 수 없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다.
p90
아무도 굳이 나를 찾으려 하거나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나를 잡아간 자는 내 가족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가족에게 납치된 아이였다.
p98
마치 누군가 눈치도 없이 장난을 친 기분이다. 행복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속임수였고 갑자기 행복을 빼앗긴 기분이다. 나는 시무룩해져 내 생각의 끄뜨머리로 살금살금 진실을 건드려보고 있다. 앞으로 무엇을 알게 될지 겁이 난다. 나한테는 언제 말할 셈이었을까? 입원할 날이 돼서야 알려줄 생각이었을까?
p109~10
공포와 후회가 나를 자꾸만 이곳으로 끌어당긴다.
(중략)
사랑하는 누군가를 죽이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 죄의식이 내면에서 커지고 부풀어 오른다. 마치 기행충처럼. 마치 독해파리처럼 심장에 똬리를 튼다.
(중략)
나는 내 자신을 완벽하게 숨기는 법을 통달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비법은 너무 높은 기준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절대 너무 영리하게 굴지 말고, 절대 자진해서 나서지 말고, 절대 목소리를 높이거나 손을 들거나 한 걸음 앞으로 나서지 말라. 첫째나 꼴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평균에 머물고 평범해지고 군중 속에 보이지 않게 스며들라.......
p111
어머니는 그런 연극을 무시했다. 아버지에게 아침을 차려주었다. 집을 청소했다. 일을 하러 갔다.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왜 그럴까, 나는 궁금했다. 왜 어젯밤에는 그렇게 조용히 할 수 없었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무엇보다 어머니의 침묵에 상쳐받았다. "당신 때문에 죽겠어." 아버지는 말했다. "차라리 나한테 욕을 해. 때리라고. 뭐라도 던져. 날 수녀원으로 보내지만 말아줘."
p112
어떻게 누군가를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애정을 갈구할 수 있을까? 사랑과 증오는 위아래가 뒤바뀐 동일한 감정이 아니다. 하나는 심작의 착각이고 또 하나는 배반당한 사람의 부산물이다. 둘 가운데에는 무관심이 놓여 있다.
p139
이 순간까지, 줄리안과 나는 익숙하고 편안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각자 본인 집에서 딸들을 공유하며 나람의 삶을 살고 있었다. 짧은 정사, 근심, 웃음, 그리고 온갖 짜증나는 일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동일한 두 사람이 약간 다른 궤도를 돌고 있었다.
p143~4
루이스는 취향은 단순하되 품성은 복잡한 남자다. 이 친구는 과거를 떨쳐내려고 노력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봤자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p155
도미니크가 서글픈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 여자가 저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셔야 해요. 저는 일주일에 7일을 일했어요. 간신히 생활을 꾸려나갔죠. 나는 간신히 물 밖에 머리만 내놓고 발버둥치는 꼴이었는데 그 여자는 같이 익사할 생각 따위는 애당초 없었어요. 대신 내 망할 놈의 돈을 챙겨서 석양을 향해 항해해갔죠. 저는 죄다 남김없이 잃었다고요."
p156
왜, 한번은 엘리자베스더러 뭐가 어찌 됐든 너를 떠받들어줄 남자하고 결혼해야 한다고 했다지 뭡니까. 차이거나 버림받지 않으려면요. 딸한테 그런 충고를 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잊어. 안정이 최고야."
p162
이건의 눈동자에 불꽃이 타오른다.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의 일로도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긴 한 모양이지. 하지만 이건은 자긱 저지른 실수를 후회하거나 자신을 의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일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잘나가는 나르시시스트답게, 자기성찰이나 반성이 불가능한, 으스대는 냉정함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따. 이 세상의 문제는 바보들과 광인들은 늘 자기 확신이 넘치는데, 더 현명한 사람들은 오히려 의심으로 가득하다는 데 있다고, 일찍히 버트런드 러쎌이 말했더랬지.
p165
"도깅이 뭔지 아십니까, 이건 씨?" 내가 묻는다.
"공공장소에서 알지도 못하는 아무나하고 섹스하는 거죠."
"줄겨 하십니까?"
"성병에 걸리고 싶으면 뭘 못 하겠어요."
p166
당신은 자신이 누구보다 잘났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지배하는 규범이나 도덕적 분별 따위를 어겨도 되는 특별한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죠."
p167
입은 스웨터는 당신 부인이 사줬을 테죠. 캐시미어. 아마 매년 생일 선물로 사주는 것 같은데요. 그건 당신이 부인한테 질려하는 이유 중 하나겠죠. 또한 부인은 살이 쪄서 볼품없어지면서 장모님과 닮아가고 있고, 그래서 당신은 딴 방에서 잘 겁니다. 아니, 내가 틀렸어요. 당신은 여기 시내에 아파트가 있을 겁니다. 부인은 큰 집에서 아드님들과 함께 살고 있을 테고요.
p169
나는 상담실에서 외롭고 사회적으로 서투른 젊은 남자들을 숱하게 봤다. 거의 예외 없이 학창시절 둔하고, 멍청하고, 뚱뚱한 남자애였다.
(중략)
그래도 대부분은 자라면서 어렸을 때의 서투름과 낮은 자존감을 극복한다. 친구나 썩 괜찮은 역할 모델, 또는 숨은 가능성을 알아봐주는 여자애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는 우울증과 지속적인 사회적 불안을 겪는다. 알코올과 약물 남용에 빠지고 병리적인 완벽주의를 발전시킨다. 자신의 예전 자아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p189
학자들이 하는 말로, '팩트드르이 절반의 수명'이라는 개념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 아는 사실의 절반은 진실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연구, 더 나은 기술과 더 늘어난 지식 덕분에 현재의 진실이 거짓이 되거나, 더 개선된 형태가 받아들여지는데, 이 역시 다시 노후하기 시작한다. 흡연은 한때 의사의 권장 사항이었다. 명왕성은 예전에 행성이었다. 지구는 한때 평평했다.
이 가설을 기반으로, 내가 이 범죄에 관해 알아낸 사실의절반은 틀렸음이 입증될 것이다. 시간의 틀이 더 길어질수록 더 많이 바뀐다 .한데 거짓으로 판명되는 것은 어느 쪽 절반일까? 나는 내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증거를 기반으로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다.
셜록 홈스가 이런 격언을 남겼다. '불가능한 것을 모두 삭제하고 남은 것은, 그게 무엇이든 아무리 그럴싸해 보이지 않더라도 진실일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개소리다. 불가능한 것은 정의하거나 정량화하거나 꼬리표를 붙이거나 목록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삭제할 수 있단 말인가?
p193
사람들이 왜 휴일을 매년 같은 장소에서 보내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매번 똑같은 가족 옆에서 캐러밴을 세우고, 같은 카페와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같은 이야기를 듣고, 마치 영원히 끊기지 않는 고리에 인생이 갇혀 있는 사람들 같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거주지들이 있고, 일부는 휴가철마다 새로 지어진다.
p196
마시는 여전히 땅콩버터 숟가락을 차지하려 애쓰고 있지만 목소리를 갈수록 쇳소리가 된다.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란 말야."
"망할 놈의 숟가락 좀 그냥 동생한테 줘버려.' 남자가 아들의 귀를 철썩 갈기며 말한다.
"하지만 제 거란 말이에요."
"가족끼리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어."
"재도 지 걸 나한테 준 적 없단 말이에요."
"조용히 안 하고 계속 성가시게 굴면 확 뺏어버린다. 아빠가 분명히 말했다."
(중략)
"바람을 피울 작정이었죠." 루이츠가 말한다.
"아니에요. 그래요. 맞아요." 남자가 겨드랑이를 긁적인다. "그냥 데이트란 걸 해보고 싶었어요. 뭔가 아이들하고 시끄러운 개들하고 연체된 고지서 말고 다른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어요."
p204
"생일은 다음 날이었어요. 여자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지...... 자기들 생일이 무슨 축제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요."
"인생의 진리지." 루이스가 말한다. "거기에 쓸데없는 의문을 제기해선 안 돼."
p213
나는 관음증과 노출증의 심리학을 설명하려 애쓴다. 이는 인간의 두 가지 핵심 본능인 생존 및 재생산과 관련이 있다. 위험과 섹스 모두 우리를 흥분시킬 수 있으며, 이따금씩 뇌가 양자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헷갈려서, 우리는 반항 행위에 의해, 노출 행위에 의해, 또는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의해 흥분한다.
p220
클리프턴 나비는 기억하면서 내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화가 난다. 지각 있는 나는 마음속으로 지금의 나란 인간을 증오한다. 본성은 양육에 승리하지 못했다. 둘 다 글러먹었다.
p226~7
제 잘못이죠. 저는 결혼으로 신분상승을 했다가 몰락하는 남자의 고적적 본보기거든요. 아내는 준 남작의 막내딸이었죠. 그래도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다만 여자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죠."
p242
"우리 사회는 남자들의 공격성을 너그러이 바주는 것 같아요. 남자들은 나약하고, 불행한 존재로 여겨지죠. 예전과 달리 통제력뿐만 아니라 특권이나 권력도 잃어버렸으니까, 그래서 남자들이 우리한테 주먹을 날리더라도 용서해줘야 한다는 식이지."
"그분은 엘리자베스를 때리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멍든 자국을 내 눈으로 봤는걸."
"그분이 따임을 때리는 걸 보셨습니까?"
베티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들의 문제는....."하고 베티가 말한다. "자기들 젠더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에요.
p244
"이혼녀였다고. 예뻤다고. 그 애는 자기 앞가림을 하는 아이였어요. 결혼은 망쳤지만 삶을 즐기고 싶었죠. 그게 뭐가 잘못인데" 그애는 독립적인 여성이었어요. 해방되었고 자주적이었죠. 결혼이라는 굴레가 자신을 옭아매서는 안 된다고 믿었어요."
이 연설은 어째 이전에 한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기 사람들을 지키고 이방인, 게으름뱅이, 회피하는 자, 청교도주의가, 위선자와 작은 마을의 뒷담화를 증오하는 여자의 훈계.
p246
죽음은 최종 행위여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 급작스럽게, 또는 예기치 않게 죽었을 때는 너무 많은 일들이 미완인 채로 남는다.
(중략)
지금까지는 이 범죄를 해결할 열쇠를 우연히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가문의 문서, 일기장 한 뭉치, 또는 연애편지 묶음. 하지만 무언가가 우편으로 배달되거나 내 무릎으로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p263
뭔가 안심이 될 만한 말을 해주고 싶지만 여전히 반쯤 잠든 상태인 나는 줄리안의 실망을 달래줄 말 한 마디도 떠올리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따금 영어에서 가장 강력한 세 단어가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틀렸다. 정답은 이렇다. '제발 나를 도와줘.'
p274
이 남자의 동기가 뭡니까? 권력, 질투, 아니면 성적인 만족?"
"복수와, 아마도 통제겠죠." 내가 대답한다.
"어째 자신이 없는 말투네요."
"저는 아직 그 남자를 모르니까요.'
p281
어머니가 수모당하는 것을 보면서 자란 아들은 자신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중략)
남자는 여전히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근육 단련을 시작해, 하루하루 더 중량을 늘려가며 자신을 몰아붙였다.
p297
"내 자궁을 떼어낼 거래."
"암 덩어리를 잘라내려는 거잖아."
"내 일부가 사라질 거야. 나를 여자로 만드는 무언가가."
"당신은 더는 아이가 필요 없잖아."
"핵심은 그게 아니야"
줄리안이 소매에서 티슈를 한 장 꺼내 코를 풀고 젖은 종이를 주먹에 말아 쥔다. 나는 여자가 된다는 것은 아기를 낳는 일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해준다. 줄리안은 그걸 이미 지나왔다. 이제는 부모가 됐고, 그게 더 중요하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야. 당신은 똑같은 여자일 거야. 당신 머리, 당신 개성, 당신 영혼도."
"당신은 우리가 영혼이 있다고 믿지 않잖아."
"당신은 예외야."
p305
범죄심리학은 잔혹하다. 인간 행동에서 최악의 사례를 캐 들어가는 학문이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강간범, 소아성도착증, 피학대 음락증, 폭력의 피해자들...... 이는 대가를 챙긴다. 사람을 갉아먹는다.
p309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전도서 3:1-15). 모든 일에는 시간이 있다. '태어날 시간, 죽을 시간, 울 시간 그리고 웃을 시간, 죽일 시간, 치유할 시간......'
(중략)
인생사 타이밍이 핵심이다. 좋은 농담은 타이밍이 핵심이다.
p323
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들을 위해 변명을 한다. 사건을 축소한다. 용서한다. 서사를 바꾼다. 그들의 피가 우리의 피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샘솟는다. 내일은 새로운 날이야. 내년이 되면 더 나아질 거야. 우리는 돈을 절약하고 살을 빼고 담배를 끊고 운동을 더 하고 사랑에 빠지고 충만해질 거야.
p328
"우리 주님은 진정 뉘우치는 죄인들을 용서하십니다."
"지옥을 공짜로 벗어나는 카드 말씀이시군요."
p366
"부인이 공격받은 사건은 잊으려고 아무리 애쓰셔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내가 말한다. "부인이 진실을 대면하고 화해하지 않는 한은요. 이 남자는 다른 사람들을 사냥하는 동안에도 부인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p366~7
누구에게나 세 개의 심장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심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심장, 그리고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는 심장. 내가 사랑들에게 찾는 것은 마지막 심장이다. 보통 가장 상처받는 심장.
p382
줄리안이 이 이야기를 이제 와서 처음 하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전기가 한 번 쓰이고 다시 고쳐 쓰여서, 이제는 놀랄 거리가 조금도 남지 않을 줄 알았는데. 모든 질문이 제기되고, 모든 일화들이 불려나온 줄 알았다.
p384
처음 만난 이야기를 윤색하고, 특별한 순간을 낭만적으로 색챌하고, 반짝이는 창조 신화로 세세한 부분까지 광을 낸다. 이건 모든 커플이 마찬가지 아닐까.
p385
나는 내 일은 너무 가까이 가져왔다. 줄리안과 딸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
그래도 우리 사이가 지속될 수 있었을까? 누가 알겠는가? 제아무리 최고의 결혼생활이라도 핀터(해럴드 핀터, 영국 출신의 부조리 연극의 대표적인 작가--옮긴이)의 연극처럼 될 수 있다. 중간에 긴 막간이 비거나,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대사를 끝마치거나 아예 아무런 대화도 없는
p388
왜 여자들은 성차별과 남성우월주의를 불평하면서 애덤 랜드리 같은 자식이 자기 찌찌를 건드리게 가만 놔두지?
사람들이 세상이 남자의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그런 식으로 굴도록 놔두는 쪽은 녀자들이다. 여자들은 여만인을 내좇아버리거나 야만인들에게 변화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데, 반대로 근육남과 알파메일(강한 이미지의 남성을 이르는 말-옮긴이)과 야민인 들에게 영합한다. 어쩌면 자기들이 야만적인 야수들을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실은 남성우월주의와 여성혐오를 영속화하고 있을 뿐이다.
심리학자가 내 생각에 동의할지 궁금하다.
p403
"당신은 내가 왜 인간보다 개를 더 사랑하는지 알아요?" 총경이 소리친다. 전반적으로 더 누그러졌다. "개들은 먹여주고 쓰다듬어 주기만 하면 나를 사랑해주거든. 사람은 누구 하나 날 사랑해주지 않을 때도."
p408
"당신 말씀이 옳습니다, 콜리어 씨. 제가 뭘 알겠어요? 저는 그저 폭행당한 여자들, 강간 피해자들, 아동성도착자들, 아동학대범들과, 학대로 너무 심한 외상을 입어서 남자 목소리만 들어도 침대에 오줌을 싸는 아이들을 치료하느라 20년을 보냈을 뿐이니까요. 당신은 아마 어떤 여자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계시겠지만, 저는 파편들을 줍는답니다. 그 사람들이 다시 완벽해지게 만들죠. 그렇지만 젠더 일반화와 충고에 감사드려요."
p413
사이먼이 저한테 전화를 걸었죠. 몇 시간씩 통화했어요. 누군가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면 그렇게 되는 법이죠. 서로 시시덕대고, 서로에게 빠져들고. 서로를 원하게 되고. 이런 과정이 순식간에 진행되는데, 서로를 연결하는 지점이 있거든요. 공통의 과거라는."
p419
나는 언제나 그들을 찍어낼 수 있다. 그들은 따로 차를 타고 오거나 각자 다른 시간에 오고, 때로 자기들의 속임수를 감추려고 방을 하나 더 예약한다. 부부 사이인 척하며 내게 집에 아이들을 두고 왔다는 둥 두 번째 신혼여행을 왔다는 둥 주절대는 치들도 있다.
가명과 가짜 주소를 대는 것은 표준화된 절차에 가깝다. 현금으로 지불하고 적어도 집에서 30킬로미터는 넘게 떨어진 곳을 찾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야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마주칠 염려가 없을 테니까
(중략)
내가 '혹시 모르니까' 신용카드를 이용해달라고 하면, 그들은 즉각 현금을 내놓거나 악수를 청하는 척하며 내 손바닥에 20파운드 지폐를 밀어 넣는다.
p421
상습범들, 말하자면, 용서받았지만 회개는 하지 않고 기만을 배운 자들. 대부분은 딴짓을 숨기는 데 더 능숙해진다. 비밀 이메일 계정과 별도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여분의 옷을 두고 주머니의 영수증을 꼼꼼히 확인한다.
p437
좋은 사람들이 왜 나쁜 짓을 저지를까? 수많은 이유들이 있다. 부인, 또래 압력, 좁은 시야, 낮은 자존감, 무지, 교만, 무질서, 경쟁, 시간 압박, 인지부조화, 중독, 복수심 또는 손신을 만회하려는 마음, 계속 댈 수도 있지만, 핵심은 수학과 판다 외에 '예스 노', 혹은 흑백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p440
내가 자기를실망시킬 때마다 써먹는, 흡족해하며 얕잡아보는 미소다. 나는 한 번도 충분히 좋지 못했다. 나는 그녀와 충분히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그녀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충분히 영리하지 않다. 충분히 돈을 벌지 못한다. 야망이 없다. 모든 면에서 실해작이다. 그렇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지켜준다.
(중략)
직장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면 나는 일 중독자다. 하루 결근을 하면 게으름뱅이다. 그녀는 나의 공포와 나약함을, 공감과 불완전함을 먹이로 삼는다. 나를 밀어냈다가 다시 다정하게 다가온다.
(중략)
날 욕망하지 않고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심지어 내가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존재임을 온갖 방법으로 보여준다.
p443
나는 거짓말을 할까 궁리하지만 진실이 더 잘 먹히는 법이다.
p451
나는 천성적으로 문제를 푸는 사람이다. 구체적인 질문과 답을 좋아한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매듭이 안 지어진 일은 내 주의를 잡아끌며 성가시게 구는, 팔랑거리는 신발근이 된다.
p456
조지 오웰은 1946년에 살인이 뉴스가 되려면 극적이고 비극적인 요소들, 스펙터클하고 시각적인 이미지, 그리고 도덕적 분노 따위가 필요하다고 썼다. 거기다 '이상적 피해자'를 보탰어도 좋았으리라, 약자이고 우리의 동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누군가.
p459
"'사자의 시선'이라는 말을 들어봤나?"
"아니"
"개한테 막대기를 던지면, 막대기를 쫓아갈 거야. 하지만 사자한테 막대기를 던지면, 너를 쫓아오겠지."
p472~3
"당신 다리는 멋져 보여."
"가슴은 어떤데?"
"무척 생기 넘쳐 보여."
"생기?"
"왼쪽도 그렇고. 핑키도 나쁘지 않아."
"내 가슴에 이름을 붙였다. 이거지."
"그게 잘못됐어?"
"아마 성적 대상화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건 내가 당신 가슴을 단순히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한다는 말이잖아.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당신의 모든 부분을 동등하게 사랑하는걸."
p490
틀림없이 내가 전화를 건 줄 모르고 우연히 통화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p533
아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지만, 천국에서 꼭 다시 만날 거라고 믿는다. 또한 악이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다는 것도 믿는다. 그날 일어난 사건은 의사와 병원의 잘못이라고 믿는다.
p534
나는 많은 이유로 울었지만, 대부분은 다양한 자기연민으로 인한 눈물이었다. 줄리안이 보고 싶어서 울었다. 찰리와 엠마 때문에 울었다. 내 죽음이 두려워서 울었다.
나는 이제 시간을 다르게 잰다. 시간은 줄리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중략)
음, 나는 어쩌면 죽음에 사로잡히고 싶은지도 모른다. 어쩌면 추억 속에서 뒹굴고 싶은지도 모른다.
p534~5
나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악의도 품지 않는다. 너무 많은 원인이 만들어낸 많은 상처들을 목격한 지금, 내 역할은 다른 사람들이 더 달콤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고통을 빨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임을 알지만, 슬픔에 잠겨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은 남편이 계속 버티는데 도움이 되는 거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그 남자는 잠이 들면 잊고 깨어나면 기억한다. 그리고 비극적인 소식을 처음 듣는 양 다시 충격을 받는다.
그 남자는 물에 빠지지만 헤엄치고, 숨이 막히지만 숨을 쉰다. 그리고 이따금, 밤늦게, 모든 이불을 걷어차 버릴 때, 누군가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바닥에 메세지를 적어나가는 것을 느끼리라.
나......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