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네의 끝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끌림, 오해, 슬픔, 직업과 생활, 그리움이 잔잔하게 녹아 있는, 세상에서 자신이 지켜야만 하는 자리가 있는 '어른'들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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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
처음 남났을 당시 그들은 '인생길의 반 고비에 이르러 올바른 길을 잃고' 있던 중이었다. 즉 마흔 살이라는 일종의 독특하고도 섬세한 불안의 나이에 접어든 참이었다. 그들의 환하고도 소란스러운 일상은 그것이 지속된다고 상상하든 지속되지 않는다고 상상하든, 어느 쪽도 그리 내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또한 [신곡]의 시구에 나오는 그대로,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지는 알길이 없건만' 문득 깨닫고 보니 그 '컨컴한 숲 속'에 헤매 들었던 것이다.

p58
아버지가 '베니스에서 죽다' 증후군이라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지어낸 말이지만, 그 정의는 '중년이 되어 돌연 현실사회에 적응하는데 염증이 나서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려고 파멸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이라네요.
바로 나를 가리키는 말이죠.^^ 살아서 돌아오라고 몇 번이나 다짐하셨어요. 아버지에게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 어떻게든 무사히 잘 지내야 한다고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p59
[베니스에서 죽다]의 주인공 에셴바흐는 예술과 현실의 균형을 부단한 정신적 노력으로 유지해나가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 같은 미소년 타지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이후 그의 뒤를 추적하는 것으로 일상을 버리고 이윽고 파멸에 이른다.

p62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그는 자신이 음악가로서 다시 한 단계 높은 곳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무래도 지향하고 있었던 것과는 또 다른, 어떤 따분한 산에 올라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뿐만이 아니다. 주위에도 사실은 그렇게 보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고독을 느끼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품었다. 그런 경험은 음악가가 된 이후로 여태까지 한 번도 없어싿.
그리고 마흔을 코앞에 둔 자신의 나이를 새삼 의식하고, 헤어지던 참에 서로 마주 보았던 그날 밤 택시 안의 요코의 얼굴을 침통한 표정으로 다시 떠올렸다.

p118~9
무엇이 달라졌기 때문이냐고 한다면 서로 간의 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육체와의 경계쯤에 매우 가연성이 높은 부분이 있다.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그 한끝에 불이 붙으면 그것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서 손을 댈 수 없게 되고 만다.
 그 불길에 상대의 마음이 만나 불타버리면 두 사람은 단지 고통에서 달아나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원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만일 그러한 것이라면 애초에 길게 이어질 리 없다. 그 불길은 어딘가에서 좀 더 온화하게 지속되는 열기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이란 그러므로 젊은 사람에게는 일종의 느슨해진 연애일 뿐이다. 그 앞에 빤히 보이는 결혼에는 아무리 큰 축복이 넘치더라도 한 줌의 체념이 섞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코가 리처드와 재회한 것은 나이상 이제는 슬슬 결혼해야 한다고 느끼던 때였다.
진보적인 통신사 여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아이가 있는 인생과 아이가 없는 인생, 양쪽 모두를 가능한 일로 상정하고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그리고 마흔이라는 나이를 코앞에 두게 되자 역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그녀의 육체와 마음 사이에는 나이에 걸맞은 자유로운 틈새가 생겨나 있었다. 굳이 불길이 일지 않더라도 그녀는 리처드와의 미래를 온건하게 상상하고 그 몸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와 생활을 함께하는 것이고 그가 부친으로서 적합한 인물인가 하는 것이었다.
p129
마키노의 이야기에는 허세가 없고, 희화화되는 대상은 결국 그 본인이어서 타인을 조롱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풍자적인 효과가 있고, 딱히 얌전한 것은 아니지만 외설적인 내용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전체적으로 기품이 있었다.
p161
한 곡이 끝낼 때마다 그녀가 앉았어야 할 왼편 깊숙한 계단 옆의 빈 좌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제는 오지 않겠구나, 하고 그는 깨달았다. 그 좌석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곁으로는 오지 않으니라는 것을. 그녀를 향한 마음의 찢어진 틈새에서 느릿느릿 출혈이 이어졌다.
p186
'누구의, 과연 누구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인가, 결코 만족하는 일이 없는 의지로 그들의 몸을 쥐어짜는 것은'이라는 [두이노의 비가]의 시구가 뇌리를 스쳤다.
p198
그 대신 상대의 시선에서 뭔가 포옹을 대신할만한 것, 그 벌충으로서의 열기화 촉촉함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중략)
마키노는 행복했다.
생활 곳곳에 사랑의 빛이 비쳐들어 그 반사가 때때로 그를 놀라게 하고 실눈을 뜨고 웃게 만들었다.
행복이란, 매일매일 경험하는 이 세계의 표면에 관해 함께 이야기할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p206
마키노는 예전에는 당연한 듯 가득 채워졌던 창조적인 삶의 충실이 하필 지금 이런 때에 자신에게서 완전히 바쪄나간 불우함을 저주했다.
p211
리처드와 헤어지고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자유로운 몸이 된 다음에야 그녀는 스스로 마키노와의 사랑을 허락했다. 하지만 리처드의 인식으로는 그녀가 아직 그와 사랑의 권내에 있고 다만 변덕이 나서 잠깐 스트레스도 풀 겸 근처를 방황한 정도인 것이다.
(중략)
리처드는 그런 요코의 배려를 일종의 흔들림으로 간주하고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연락을 끊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매번 재결합을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고 둘이 사귈 때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투로 명랑하게 용건만 전하고 전화를 끊는 일도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이미 다 해결된 것처럼.
p227
그녀 자신도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하루빨리 그를 만나고 싶었다. 결혼해서 그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어느 틈엔가 간절히 그런 바람을 가진 그녀는 마흔이라는 자신의 나이에도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p239
고레나가의 암울한 분석에 따르면, 오카지마는 '그런 것'을 자신이 여태까지 알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게 무엇보다 화가 나서, 자기도 당연히 다 알고 있고 그런데도 시도하지 않은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누누이 변명을 늘어놓는 전형적인 '거품 아재'라는 것이었다.
(거품아재 : 일본의 거품경기 때인 1965년~1970년에 출생하고 부유함을 누리며 성장하여 사회의 중견이 된 세대)
p240
노다의 생각을 간추리면 이런 것이었다.
예술의 가치는 칸트의 정의 이래로 '아름다움(beautiful)'이냐 '숭고함(sublime)'이냐, 둘 중 하나였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특히 현대의 인터넷 사회에서는 그것이 그대로 '멋있다(cool)'와 '대단하다(awesome)'가 되었다. 현대 아트 중에서도 있기 있는 것은 역시 게르하르트 리히터처럼 '멋있는' 작품이거나 안드레아스 거스키처럼 '대단한' 작품으로,
p253
내가 지금 대체 뭘 하는 건가, 하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마키노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싶다...... 그 마음은 순수했지만 그에 대한 사랑은 아무래도 보답받을 길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 불가능함을 지금 제 손으로 확정 지으려하고 있었다.
p254
미타니는 요코가 마키노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워졌으며 또 이제부터 마키노를 만나기 위해 아름다운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몸이 부르르 떨리는 듯한 격한 질투에 휩싸였다.
p258
가슴이 아파왔지만 그것도 이윽고 잊힐 게 틀림없다. 자신은 지금까지 남들보다 더 성실하게 살아왔다. 세상 누구라도 죽기 전까지는 분명 각자 나름대로 죄를 범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용서받을 죄의 무게에는 아직 여유가 있을 터였다.
p266
PTSD 발작은 파리에서 오는 항공편 안에서도 내내 걱정스러웠지만, 도쿄에 도착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꿈꾸었다. 생각지도 못한 감정의 폭발로 이 사랑을 망쳐버리는 것을 염려했지만, 그래도 그의 사랑이 주는 평안 뒤에서 위안을 찾고 있었다.
p267
그와 마주하면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인생의 기쁨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그것은 거의 불가사의하다고 느껴질 만큼 기적 같은 일이었다.
p285
마키노와 대화를 나눈 뒤에는 매번 가슴속에 잠시 마음껏 쾌활할 수 있었던 여운이 따듯하게 남았다. 다른 어느 누구와 이야기해도 그런 식으로 웃음이 끊이지 않은 적은 없었고 그와의 대화 어디를 찾아봐도 자신이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이외의 다른 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와 함께 있을 때의 자신에 대해 요코는 인생에서 지금껏 알지 못했던 종류의 애착을 느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살수도 있구나, 하는 깨우침을 얻은 것만 같았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와 다른 어딘가에 있었을 때의 자신과는 다르게 기분 좋은 것이어서 집에서 혼자 있을 때조차 그가 바로 곁에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계속 그런 자신으로 남고 싶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앞으로 그런 자신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단지 추억 속에만 있을 뿐. 그리고 그 '구멍이 뚫린 듯'한 가슴속의 공백에는 이제 한없는 쓸쓸함만 스며들었다.
p311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심에 대해 "왜?"라는 질문이 오래도록 꼬리를 끌었지만, 미타니와의 결혼생활에 그런 되풀이를 끌고 들어가는 것은 남편으로서 불성실한 일이었다. 지금 의미가 있는 것은 요코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미타니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었다.
p326
리처드는 헬렌과의 관계를 통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위로를 얻었지만 죄책감이 그것을 손상시키지는 않았따. 오히려 그 양심의 가책이 만만치 않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꼭 필요한 의외의 효능을 가진 묘약이 되었다. 남몰래 '악'을 범하고 있다는 우월감이 그를 다그쳐 겸허하게 만들었다.
인내에는 대부분 이해득실의 계산이 따르는 법이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인내를 강요당하는 애타는 번민에는 남들이 당연히 지키는 금지를 몰래 깨뜨린다는 욱신거림이 오히려 한 알의 청량제가 되었다.
p334
지금까지 사회의 부정을 엄격히 파헤쳐운 자신이 막상 남의 일이 아니라 남편의 문제와 직면했을 때, 그것을 없었던 일로서 눈을 감아야하는가.
p340
"당신에게는 그런 차가움이 있어. 항상 느꼈어. 너무 차가워. 그래서 나는 항상 불안했어. 내가 인생에서 정말로 힘들어할 때 당신이 과연 내 옆에 계속 있어줄까 하고. 당신은 늘 혼자야. 아주 많이. 당신의 성장 과정 때문인지도 모르지. 누구와 결혼했더라도 당신은 분명 그랬을 거야.
p353
그는 [히프노스의 문집] 속의 수수께끼 같은 한 문장에 마음을 빼앗겼다.
'명석함이란 태양과 가장 가까운 상처다.'
(중략)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 화제들이 너무도 많이 쌓여 있었다.
p360
마키노는 자신도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그게 아니라 지금 자신이 그녀에게 품고 있는 호감에 그대로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요코에게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일정 바라서는 안 된다. 그녀의 존재와 함께 그것은 이제 다 잊어버려야 한다.......
p361
사나에는 결국 그 죄의 밤에 돌연 번뜩였던 자기에 대한 변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죄의 총량'이라는 이론이다. 한편생 어떤 죄도 범하는 일 없이 살아가는 인간 따위, 이 세상에 있을 리 없다. 누구라도 죄를 범하게 마련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거우냐 가벼우냐의 차이밖에 없다.
p367
어딘지 불안한 기색으로 임신을 털어놓은 사나에를 마키노는 조심스럽게 포옹했다.
인생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고 느꼈다. 그리고 지난 밤에 강하게 몰려왔던 요코에 대한 미련을 이번에야말로 끊어 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p374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보다는 상대와 함께할 때의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서로에게 더 큰 불행이었다.
p397
눈앞에 마키노의 아이를 가진 여자가 앉아 있다. 요코는 예전에 자신이 얼마나 강하게 그것을 꿈꾸고 원했는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키노가 결국 다른 여자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자시느이 나이를 생각하면 그건 이미 불가능한 바람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고 그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요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p402
'그냥 팬'에 머물지 않는 마키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사나에가 꿰뚫어본 것만 같아 졸지제 얼버무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는 결코 그런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심으로는 분명 그와의 재회에 전혀 기대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p407
사랑을 위해서는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 짓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뻔뻔함에는 혐오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키노를 위해 나는 저토록 낮은 곳까지 떨어질 수 있을까, 하고 요코는 불안해졌다. 어쩌면 그런 방법을 동원할 것도 없이 마키노에게서 사랑을 받아버린 자신에 대한 통렬한 복수인 것 같기도 했다.
p409
요코는 홀로 호텔 방 카펫에서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고는 침대에 엎드려 드디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호읍했다.
p412
줄리안 브림과 존 윌리엄스의 편곡에 의한 드뷔시의 달빛, 브라우어의 트립티코, 피아졸라의 탱고모음곡 등 (중략) 토드 렌그렌의 어 드림 고즈 온 포에버 (중략)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 제17번 '사냥' 제4악장
p417
페르난도 소르 전곡을 친다면서
p418
카르팡티에의 사라진 발자국이었어.
p421
라흐마니노프와 라벨, 빌라 로보스의 보컬리즈 작품
p425
이제는 때때로 그의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상상하면 무서워졌다.
p426
하지만 그 모든 행복이 이상함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p432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그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가슴을 쳤다.
p433
마키노의 머릿속에는 요코의 표정이 언뜻언뜻 떠올랐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든 지워버리려고 해온 사나에와의 2년간의 결혼생활이 더 선명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사나에가 얼마나 필사적인 심정으로 그 거짓 메일을 보냈을지,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마키노는 손에 잡힐 듯이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을 여태껏 속여왔는데도 마키노는 당장 아내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없을 만큼 이미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따. 아이러니하게도 마키노는 그것을 지금 이런 때에 새삼 깨달았다.
p436
요코는 오랜만에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공감하는지를 다시 떠올렸고, 앞으로의 인생을 가능한 한 그런 사람들과 함께 보낼 수 있기를 원했다. 그것이 아마도 삶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일 터였다.
p437
사나에가 한 짓에는 경멸의 감정을 품었지만, 그녀 본인을 원망한다기보다 인생 그 자체에 대한 허무감이 더 강했다.
p442
"자유의지라는 것은 미래에 관해서라면 없어서는 안 될 희망이야. 인간은 자신이 뭔가를 해낼 수 있다라도 반드시 믿을 필요가 있어. 그렇지? 하지만 요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과거에 대해서 깊은 회한이 드는 법이야. 뭔가 좀 더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라고 말이야. 운명론이 오히려 위로가 되는 경우도 있어."
p443
그녀는 사나에가 털어놓은 자신과 마키노의 이별의 진상을 생각했다. 그것은 역시 완전하게 어쩔 수 없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더 괴로웠다.
p448
티토는 [달마티아의 아침 해]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지에 누운 주인공의 사체를 파르티잔의 희생에 대한 시적인 오마주라고 이해했었지. 하지만 민족주의자들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었어.
p449
"그러니까 지금이에요,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내 과거를 바꿔주는 지금 이 순간."
p453
사나에의 고백 이후 마키노는 아내에 대한 겹겹의 모순된 감정으로 괴로워했다.
차갑고 거센 분노와 쓸쓸한 배려. 떠밀어낼 듯한 경멸과 못본 척해버릴 수도 없는 연민. 그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과 더 깊은 이해. 그리고 수없이 헤어지자는 결단까지 마음이 기울었던 혐오와 이제는 애착이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할 익숙해진 애정.......
p456
마키노는 마침내 잠이 든 자식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 아이에게는 부모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안심하고 믿게 해주자고 생각했다. 자신을 품에 안은 아버지의 마음속에 실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성이 늘 존재했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 아닌가.
p460~1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아다지오, 바리오스의 대성당, 빌라 로보스의 가보타 쇼로, 무반주 첼로 모음곡
p467
4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서 요코도 역시 나이가 느껴졌지만 그 모습은 정채를 내뿜었다. 예전에 거의 매일 컴퓨터 너머로 대화하던 무렵의 기억이 연달아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그리웠다.
마키노는 요코의 인생도 그때로부터 크게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했다.
p468
이 멋진 세계~뷰티풀 아메리칸 송스
p469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사나에와 유키와의 생활 속에서 그에게 죄책감을 안겼다. 마키노는 특히 유키의 삶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싶었다. 그걸 못해낸다면 자신은 인간으로서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린 일이라고 수없이 자신을 타이르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미련에 화를 내곤 했다.
요코의 생기 있는 모습을 보고 마키노는 내 일처럼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그런 만큼 이제 새삼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느낌도 들었다.
p470
마키노는 지금 이 삶의 사실성에 발이 묶여 있었다. 현재는 이미 각자 충실한 것이 되어버렸고 그 생활에 따르는 감정 또한 싹터버렸다.
과거는 바꿀 수 있다. 그렇다, 하지만 과거를 바꾸면서 현재를 바꾸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가능한 일일까.
p475
바루으어의 3부의 명곡 검은 데카메론, 빌라 로보스, 다케미쓰 도루, 로드리고, 브라우어의 소나타
p478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 번, 5번, 제3번, 아란후에스 협주곡
p479
마키노와 자신 사이에 흘러간 시간의 기억이 그녀의 가슴을 옥죄었다.
요코는 감은 눈커풀 틈으로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떨구면서 그것을 꾸욱 견뎠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왜일까?'라고 다시금 물었다. 왜 자신은 그와 따로 떨어져 사느 인생을 걷고 되고 만 것일까.......
p480
그를 만나서는 안 된다고 요코는 생각했다. 이미 때늦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중략)
자신은 이곳에 이생의 매듭 하나를 짓기 위해 찾아온 것이니까...... 그러나 이 최소한 이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그르 향한 사랑 안에 머물고 싶었다. 지금까지 단 세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그러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깊이 사랑했던 사람...... 음악이 앞으로 내달려갔다. 이 한때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녀는 기도했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기를
p482
"그럼 오늘 이 마티네의 끝에서 한 가지, 매우 특별한 곡을 연주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And now, at the end of the matinee, I will play one more melody-a very special melody-for you)."
(중략)
그 첫머리의 아르페지오를 들은 순간, 요코의 감정은 억누를 길 없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p484
아까부터 그는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중에서 [행복의 동전]의 한 구절을 단편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천사여! 우리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광장이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닐까. 그곳에서는 이 세계에서는 끝내 사랑이라는 곡예에 성공한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이...... 그들은 분명 이제 더 이상 실수하지 않으리니...... 다시금 고요함을 되찾은 양탄자 위에 서서, 마침내 참된 미소를 짓는 그 연인들......'
p485
마키노는 이미 그녀 쪽으로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 모슴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점점 커져갔다. 눈시울을 붉히며 요코도 마침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처음만나 주고받았던 그날 밤의 미소로부터 5년반의 세월이 흘러가 있었다.
p490
마티네(matiness)는 프랑스어로 '오전 중'이라는 뜻의 마탱(matin)에서 유래한 말이다. 연극, 음악회, 오페라 등의 낮 공연을 가르키는 용어로, 주로 저녁에 이루어지는 공연을 낮 시간이 자유로운 학생과 주부들도 즐길 수 있게 시간대를 넓혀 대상을 확대하려는 예술경영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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