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식물학
마이클 폴란 지음, 이창신 옮김 / 서울문화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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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과 인간의 공진화라...? 벌과 꽃의 공생 관계에만 익숙한 우리들에게 저자는 대뜸 인간과 식물간의 상호작용을 들고 와서는, '공진화'란 말을 하고 있다. 억지스럽다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막상, '사과는 씨가 다 성숙될 즈음이면, 온 몸을 빨갛게 물들이고 저 멀리서도 어떤 배고픈 이가 단걸음에 뛰어올 만한 달콤쌉싸름한 향기를 내뿜는데 그 이유가 뭘까?'에 관한 저자의 기발한 발상을 듣는 순간이라면, 이 영악한 식물에게 사기를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억지스럽다는 감이 없지 않다는 것은 저자가 제시한 서로 다른 종내의유전자 대 유전자간의 '공진화'라는 이론 때문이다. 식물의 동물을 향한 거의 완벽한 듯 보이는, 생존전략에 대한 미심쩍은 부분은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저자는 아무리 인식전환도 좋다지만 식물에 대해 너무도 많은 능력을 부과했다. 물론, 이 책도 '이기적인 유전자(리차드 도킨스의 역작)'적 입장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간단히 말해, 유전자에 대해 너무도 많은 능력을 부과했다는 사실도 될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사과의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씨를 널리 퍼뜨리는 것이 목적'이므로 사과의 전략은 이미 성공했다고 본다(거의 전 세계에 걸쳐 사과가 재배되고 있으니). 나는 친구에게 '식물의 욕망'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정말 사과가 자신을 기꺼이 변형시키면서 까지도 인간의 뇌를 이용해 번성하고자 했다면, 그럼 '씨 없는 수박은 뭔데?'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그래, 아차! 이걸 놓쳤구나!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저자의 한계구나. 지금까지 우장춘 박사가 얼마나 서러워했을꼬(그의 능력을 단순히 식물의 꼬임에 넘어간 행동으로 묘사하고 있으므로).'

하지만, 이것도 곧 나의 한계임을 나는 절절히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 바로 '감자' 부분에서 저자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생명공학에 있어서 만큼은 식물이 한없이 객체로 몰릴 수밖에는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도 결국은 유전자가 조종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니, 그 몸뚱아리 형체 조금 바꾼다고 유전자가 펄쩍 뛸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막상 자기 머리 위에 올라앉아서는 '이젠, 너까지 조작하겠어'라고 위협하니, 이것까지 어떻게 식물의 전략이니 라는 말을 운운할 수나 있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유전자 조작'까지 내려올 필요가 없다는 데에 있다. '사과가 아주 말쑥하고 안락한 드넓은 과수원에서 자기 씨를 맘껏 퍼뜨릴 수 있게 인간을 이용했을 것이다'란 부분부터 문제라는 말이다.

이 책의 주제는 결국,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경계이자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단일재배'에 대한 폐해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사과는, 애초에 왜 그 많은 농부들이 잡초 등 자기 외의 식물들은 모두 뽑아버리고 오로지 자신만 천하에 올곧게 설 수 있게 했을까. 적어도 단일재배의 폐해에 대한 저자의 생각 맞다면, 왜 이 영악한 사과는 이런 허술한(결국 자기가 도태될 테니) 전략을 구사했겠느냐는 말이다. 너무 오버였다. 사과가 인간이라는 거대 포유류를 이용했다는 사실은, 인간이 정착생활을 하지 않았을 당시까지만 유효할 것이다.

다음으로, 미심쩍은 사항은 '공진화'란 용어 자체이다. 침팬지에서 막 떨어져 나와 탄생한 초기 인간 때부터 현재 우리에 이르기까지 유전자가 변했다면 얼마나 변했을까. 비록 그 생김새는 많이 변했다손 치더라도 유전자가 '진화'라는 용어까지 쓸 만큼 변화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현재, 지배적인 입장인 것 같다('비열한 유전자'에서만 보아도). 그런데 이런 인간과 사과가 서로 공진화를 했다? 적어도 사과가 인간보다는 오래 전에 지구를 지켜왔을 법한, 다른 생물 종과 같이 진화했다는 말이라면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길어봤자 만년 밖에 안 되는, 진화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듯한 이 시간에 인간도 사과도 모두 진화했다고 볼 수 있을리 만무하다. 여기서는 '공진화'라는 용어보다는 단순히 '공생관계'라고만 했어야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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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유전자
테리 번햄 외 지음, 박윤정 옮김 / 너와나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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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함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더 강해질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란다. 나는 비로소 그가 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자기 분수나 알고 살라는 기분 나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그토록 떠들어댔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소중한 깨달음이다.

저자는 우리의 이 '나약함'이 유전자의 이기적인 비열함과 지금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방식의 차이에 의한 결과임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대단한 깨달음을 설득해 나가고 있다. 비록 그 접근방식이 한계에 다한 듯한 인상을 받을 때도 있지만(현 인간의 온갖 행동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퍼즐 게임을 하는 듯하다. 즉 결론으로 원인을 이해시키고자 하니,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생길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어떤 반발감도 갖고 싶지 않다. 지금 우리가 다른 사람과 부딪힐 거의 대부분의 '꺼리'를 이토록 유쾌하게 아주 그럴듯하게 설명해 놓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저자들의 노고에 그저 박수를 쳐주고 이 책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우리 인간을 아니, 생명체를 2등분했다는 사실에는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바로 아주 긍정적 이미지의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과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의 비열한 유전자로의 등분(이는 저자 스스로 모순을 가져온 결과이다. 책 속에서 저자는 인간 사회 내에 편가르기는 사실 무용지물이며 이것은 대단히 임의적이라 우리 사회가 좀 더 공동체적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런 막연한 편가르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왜 이 편가르기를 그만두고 유전자와 공존하는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랬다면 싸워서 얻은 이익보다, 싸우면서 낭비된 에너지까지 합친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이며, 이 둘이 무한히 경쟁을 하고 있으며, 결론은 전자가 승리를 하게 될 것이므로 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 '비열한 유전자'여야 하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유전자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약간 피해를 끼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유전자의 죄라고는 너무 빨리 변한 외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것밖에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잘못이 있다면 너무 빨리 환경을 변화시킨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토록 빨리 환경을 변화시킨 능력은 어디에서 왔는가. 어차피 유전자도 우리 몸의 일부이다. 저자가 유전자에 그토록 많은 능력(지금 우리의 사소한 행위 자체도 유전자의 판단 결과라고 까지 했으니)을 부여했으니, 환경을 빨리 변화시킨 우리의 능력도 유전자로부터 왔을 것임이 자명한데 왜 저자는 앞 뒤, 모순 되게 '유전자'와 '우리'를 떼어놓아야 했는가.

하지만 나는 책을 평가하는데 이런 근본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는 일단 접어버리기로 했다. 이 책은 너무도 유쾌할 뿐만 아니라 아주 유용한 정보로 가득 찬 책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직접 읽어보고 결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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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환경오염정화의 세계
마쯔나가 타다시 지음, 김영도 옮김 / 대영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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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환경친화적'이라는 용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그토록 장미빛 미래만을 강조한 '바이오레미데이션'이라 함은, 인간이 저지른 만행을 지금까지는 다시 화학적 방법으로 인간이 치료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다시 자연적 방법을 써서 좀 어떻게 해보자는 건데, 왜 인간이 범한 대단한 실수를 자연이 막아야 하나. 단지, 제2차 인공물을 만들지 않는 다는 것 뿐 이지 자연에 또다시 인위적으로 크게 손을 대는 격이 아닌가. 이게 어떻게 '비인공적'일 수 있을까. '단순히 예전에 비해 좀 덜 할 뿐이다'는 코멘트를 달아야 할 것이고, '친환경적 방법'이 아니라 '비화학적 방법'이라 해야 옳은 표기일 것이다. 저자는 '바이오레미데이션'에 대해 너무나 긍정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바이오레미데이션의 세가지 타입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무서운 것이 세 번째, 오염지역 주변에 그 오염원을 먹는 균이나, 균이 먹을 밥이 없을 땐 외래에서 들여와서 이용한다는 방법 말이다. 나는 예전에 '환경과학'이라는 교양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수업은, 기술들은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포커스를 맞추고 진행되었다. 따라서 바이오레미이션의 폐해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방오물질 제거에 이용되는 사례였다. 오일을 먹고 사는 균으로 인해, 일단 바다의 기름오염은 막았지만, 그 균에 의해 문제((외래종으로 인해, 토종 생태계가 흔들리거나 갑자기 개체수가 늘어난 외래종 자체가 토종 생물을 마구잡이식으로 먹어치우다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수업에서는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바이오레미데이션이 다가 아니며, 아주 신중히, 많이 검토한 후에 사용해야할 방법이라고 배웠다.우리 주변에도 황소 개구리를 통해 그 폐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생태계에 인간이 인위적으로 한 종의 수를 늘림으로 인한 폐해는 어떨까. 생태계내에서 그리 크게 작용하지 않을 것 같은 생물체라도 갑자기 종이 멸종되거나, 그 큰 폭으로 증가하면 생태계 전체에 어느 정도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먹이그물'이라 지만 말이다. '기름 먹는 균을 오염된 바다에 뿌렸는데, 다행히 먹이(기름)이 없어지자, 그 균을 제 할 일을 다 하고 그대로 죽었다.'하는 것은 긍정적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안 그럴 수도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균이 기름만 먹고살라는 법이 어디 있나. 그 다양성의 바다에, 온 천지에 먹을 게 깔렸는데, 주식 외에 맛있는 간식거리가 깔렸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그 할 일 다 한 균을 죽이면 문제 끝 아닌가. 그럼 다시 그 균을 죽일 다른 생물체를 또 물색해 보아야 하나? 아니면, 화학처리를 해야 하나. 헷갈리기 시작한다. 헷갈리는 기술 이퀄 바이오레미데이션이다.

여기에서 나는 '친환경적'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도대체 뭐가 친환경적이라는 것인가. 내가 똥 싼 걸, 인간 종노릇이나 하는 개보고 먹어치우라는 거지. 공생적인,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아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둘 다 죽고'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성인-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질 나이를 먹은 인간- 아닌가. 하지만 당장 카드를 너무 많이 긁어서 파산 날 지경이니, 어찌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당장 친척들에게 빌리거나, 정 급하면 몰래 도둑질이라도 하는 수 밖에. 나중에 옥살이를 치르든, 말든.

하지만 그나마 바이오레미데이션은 근시적으로 봐서는 꽤나 쓸만한 기술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파산 날 지경에 놓은 우리는, 이런 방법이라도 계속 연구, 토의해 그나마 자연에 피해가 덜 가는 방법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누이 좋고 매부는 그럭저럭'인 방법이라고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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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가장자리
스튜어트 카우프만 지음, 국형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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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신의 이론을 꽤 확실한 방법으로 뭐라 의심을 가질 수 없도록 철저히 제시하고 있다. 내가 거기에 대고 함부로 코멘트를 달 수 없을 정도로, 저자는 분명히 과학적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며 현대적 과학 이론가의 표상이었다.
우리는 퍽 좋은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예측 가능한,완벽할 것 같은 시스템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돈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결코 과거, 칸트가 그토록 강력히 주장하며 꿈꿔왔던 완벽한 과학적 예측 시스템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나비효과'의 완벽한 증거물인 날씨예측일 것이다. 그 외에, 우리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A매치 가상 축구 게임도 한다. 각 선수들의 특기나 성향,각 선수의 컨디션에서 그날의 날씨라는 변동 사항까지 예측해서 프로그램화한 후, 경기를 치른다 하더라도 그 경기는 결코 실제 경기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아주 방대한,정확한 자료를 입력한다 해도결과는 마찬가지이다.변수는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온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는 데서 두 가지 실수를 한 것 같다. 하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환원론적 시각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끊임없이 우리는 완벽한 예측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현재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컴퓨터시뮬레이션을 이용해 생명의 '창발'이론의 주요사항이될자료를 끼워 넣어 먼 과거의 최초 생명 탄생을 예측하고자 한 것이다. 또 환원론적 시각이 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모노가 말한, '박테리아에서 통한 것은 인간에게도 통한다'는 말이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라는 말이 들어가야 한다. 현상을 지극히 단순화하면 이해하기는 쉽겠지만, 그 만큼 예외 사항은 많아지게 되고 결국, 우리는 생명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생명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를 증명하기 위해, 단추에 실을 끼우는 간단한 모형은 참으로 그럴 듯 하다. 나는, 비록 분자들의 수가 충분히 다양하고 충분히 복잡하다는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상황하에서 일어나는 결과(정말 갑자기 큰 분자가 만들어지는)에 너무 깜짝 놀랐다. 하지만 문제는 전제가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그 현상이 생기게 하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저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란 표현을 자주 썼는데, 그 전제 자체가 비현실적일 것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상은 재미있었지만, 그는 단순히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전제를 만들어 다시 그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결과론적인 방법이다. 저자는 늘 이런 식이다. 증명하는 방식엔 늘 전제가 존재한다. 언뜻봐서는 참 그럴 듯하다. 전제하이므로 우리의 사고는 그 전제 하에 갇혀, 결국 그가 제시한 증명 방법에 한치의 오류도 없다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그가 추구하고자했던 '확실한 증명을 할수있는 과학적 이론'의 설명방법으로는 부적합하다. 저자가 설정한 전제부터 우리에게 충분히 납득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할 것이다. 되게 모호하지 않은가. 충분한 양과 충분히 다양한 분자들이 떠 있는 원시 수프라...
확실히 생명이 질서와 혼돈의 경계에 존재해야할 이유에 대해서는 퍽 와 닿는다. 저자는 책제목을 '혼돈의 가장자리'라고 지은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도킨스의 '밈'을 인용하면서 은근히, 자기의 이론도 새로운 '밈'이 되기를 바라고있다. 나는 어느 정도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우리의 생각이 미치는 한계다.생명을 한없이 기계적으로, 분자적으로봐야 그나마 어떤 결론이라도 낼 수있을 것이므로. 그 외에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종교집단에서나 해야할 고민거리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우리를 굉장히 허무하게 만들 것이다.비록 그가'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예정된 존재였어요'라 말은 하지만,'우리 몸은 결국 분자 조가리에 불과하며 결국 죽으면 썩어문드러지고만다'는 허무주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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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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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하려하는 여자. 소통해야만 낯선 세상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여자가 있다. 이 소설 속 세상은 그런 여자를 절벽 끝에 몰아 세우고는 과감히 아주 냉철히 밀어 버리고 만다. 벼랑 끝으로 곤두박질쳐지는 순간, 그제서야 미련스럽게도 여자는 세상을 어느정도 알게 되지만 여전히 혼자 설 수는 없었다. 인간이라는 종이 과감히 홀로 설 수 있는 존재라면, 왜 하느님은 굳이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을까. 비록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기분 나쁜 해설이라 해도 결국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서로는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고 하나가 되게 한다. 끊임없이 남자에게서 버림받는 여자. 그런 여자를 남자(화자)는 자기 삶과의 연계를 경계하여 관심 밖의 여자로 두려고 노력한다. 철저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남자(화자)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이나 '거의 무의식적으로'라는 말을 하면서도 수술대 위의 여자의 한쪽 발에 이불을 덮어준다거나 하는 행동을 통해, 자신은 전혀 남에게 관심도 없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감정적 흐름을 지닌 존재임을 여실히 드러내고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남자는 철저히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통해 타인과 연계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이성적인 것이 좋다는 것은, 근대 과학 방법론의 선구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 철저히 이성적이어야 할 자연과학 분야에서조차, '이성이 다가 아니며 이성 보다 오히려 감정에 의한 사물 인식이 오히려 더 진실 되게 사물을 탐구할 수 있게 한다'는 이론이 떠오르고 있다. 그야말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감정의 동물인 탓이며 이 감정이라는 것의 힘이 대단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감정이 필요 없는 것이라면, 왜 굳이 우리의 뇌는 이다지도 복잡하게 설계되었단 말인가. 우리는 공공연히 '감정'이란 말에 부정적인 의미를 붙이고있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는 철저히 비감정적인 사회를 만들어 놓았다. 왜 이다지도 남자는, 그 사회는, 감정을 철저히 배격하며 (완전하지는 않은) '냉정함'이라는 이성을 택하게 되었을까. 작가는, 이미 이성으로 무장된 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맹목적으로 감정에 파묻힌 지금의 여성이라는 존재로의 삶을 지양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는 신파조로 표현되기 쉽다. 옛날 영화 속의 남자는 출세를 위해, 쉽게 여자를 버렸다. 그런 영화에서는, 버림받은 여자가 이렇게 불쌍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아주 힘없고 가냘픈 여자를 이성적인 파렴치한 남자에게서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는 '신파'로도 부족했는지 아예 그 여자를 불쌍히 여기지도 못 하게끔, 아주 눈치 없게 경우답지 않은 행동 등을 하게 함으로써 '그런 여자는 결국 이런 꼴을 당하게 된다'고 소설 속의 화자 보다 더 냉정한 태도로 여자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작가의 사상에 대해 반의를 표하게 된다. 옛날 신파극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인 이 사회나 그 사회 속의 남자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 여자가 굳이 너무 성급한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일단 벗어나자는 식의 '여성의 철저한 이성화'에 반대한다는 말이다. 이성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성이 전부'라는 것을 배격하고 '이성과 감정 중 차라리 숨기지 말고 감정 자체에 충실한 진실 된 인간이 되자'는 의미이다. 감정만 있는 사회는 '사회'라는 시스템을 가진 종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다. '여자를 쉽게 버리는 남자. 이꼴 이성적인 남자'도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식어서 여자를 버리는 것이 아닌, 철저한 계산에 의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과감히 버리고 대신 '성공'을 선택하는 남자를,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해 그다지 크게 성공하지 못한 듯한 남자 보다 우대하는 이 사회적 분위기를 버리자는 것이다. 비록 지금 사회가 이 소설처럼 되어 가고 있고, 실로 그런 면이 많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는 홀로 일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것이 최고라는 식으로 잘못 교육받아져 온 남성이,또는 사회가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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