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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사회
N.H 클라인바움 지음, 한은주 옮김 / 서교출판사 / 2004년 3월
평점 :
개인의 노력과 깜냥, 그리고 주위의 약간의 도움만 있다면 얼마든지 인생은 다양하고 풍요로울 수 있다. ‘이 답답한 지구’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다양한 생물이 모여 사는 지구’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알을 깨고 나오느냐, 갇혀 사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는 청소년기이며 이때를 잘 보내기위해서는 주위 어른들의 도움이 크다.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인생이 결론적으로는 편향되고 좁은 인생이었는지, 다채롭고 넓은 인생이었는지가 판가름되어 버리는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청소년 시절, 불우하게도 자신이 생각하는 오직 한 가지 잣대만으로 아이의 인생을 한정지어 버리려는 부모를 만난다면 그 아이는 평생 답답한 학교 생활, 지루한 공부, 더 나아가 안정된 직장을 구했다하더라도 고된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자신이 살아온 대로 똑같이 본인의 아이들을 그렇게 키울 것이고 그렇게 좁은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며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를 잘 되뇌어 봐야한다. 아이들이 본인의 분신이 아니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게 하기 위해 아이를 낳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아이는 자신과 또 다른 인격체가 아닌, 도구로 전락해버리게 된다. 아이가 부모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을 때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게 될 것이고 그러할수록 아이들을 더욱 옥죄어 버리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항변하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보니,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참 힘들더라, 그래서 자신과 같은 힘들고 불행한 삶을 살게 하지 않기 위해 인생을 더 살아온 선배로서 따끔하게 충고를 해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핑계일 뿐이다. 그 부모도 똑같이 그 윗세대들에게 편향된 인생의 충고를 들어왔기 때문에,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그러한 충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공부 말고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가. 의사 말고, 변호사 말고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직업이 있나. 그 아이가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의사나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삶을 살게 되더라도 그 일을 통해 성취감이든지, 삶에 대한 목적의식이라든지, 조그마한 보람하나 못 느낄 정도라면 그 사람에게 그 일은,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돈만 받아 쥘 뿐 그저 똑같은 ‘고역’에 불과한 일일 뿐이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처럼 평생을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면서 고통스러운 삶의 운명을 지우게 할 것인가.
‘닐’의 부모는 다시 한 번 자문해 봤어야 했다. 정말, 정말 자신들이 닐을 사랑했는지. 그 사랑이 스스로의 욕심에서 비롯된 왜곡된 애정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봤어야 했다. ‘닐’이 본인들처럼 평생을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가길 원하는지. 소득이 아무리 높아봤자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의사라는 직업은 공사판 인부만큼 그저 ‘힘든 일’일 뿐이며, 하루하루 일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평생을 살게 할 뿐이다.
세상 모든 일이 힘들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부모라면 내 아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조금 덜 힘들어할 수 있는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었을 것이다.
닐은 평생 처음으로 자신에게 희열을 줄 수 있는,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일을 찾았다. 부모의 도움은커녕 갖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인생의 보물찾기를 기특하게도 혼자서 끝낸 것이다. 그랬던 닐에게 연극을 그만두고 의대 진학을 위해 공부만 해라는 명령은 사실상 닐에게서 삶의 의미를 빼앗는 도둑질에 불과한 것이었다.
키팅 선생의 조언은 비단 직업 선택에서만 끝나는 문제는 아니다. 오늘을 즐겨라, 인생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꾸며라. 그런 의미에서 낡고 고지식한 전통의 상징인 책상 위에 올라가 멀리 세상을 내려다보게 하는 장면은 큰 의미가 있었다. 책상 위에 쪼그려 앉아 교실 높이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생만을 살지 말고 당당히 더 높이 있는 세상을 보라는 것.
간혹 주위에 보면, 부모의 사사건건 간섭으로 좁은 세상만 사는 친구들이 많다. 부모가 공부해라해서 공부를 하고, 잠을 자라고 하면 자고, 대학을 가라해서 가는 아이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은 ‘독특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사고방식과 똑같은 걱정으로 가득하다.
연봉 얼마짜리인 직업을 선택해야할지, 그래서 어느 대학을 가고, 학점을 잘 따서, 빨리 졸업한 후에 적당한 배우자를 만나서 어떻게 결혼을 할지. 똑같은 고민들뿐 이다. 오늘 미용실에서 한 머리가 잘 됐는지, 옷은 누구 옷이 더 예쁜지, 화장은 잘 먹었는지. ‘미’의 기준도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이어서 ‘예쁘다, 예쁘지 않다’의 판단도 똑같다. 여자는 아름다움을 위해 살아야하는 좁은 세상이기에, 꾸미는 데만 전체 인생에서의 3분의 1을 소비하고 있고, 안정적이고 경제력이 높은 배우자를 만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서는 자기 자식들도 똑같은 삶을 살게 할 것이다.
내 주위엔 그 누구하나 ‘태양은 왜 저렇게 빛나는지’, ‘우주에는 누가 살고 있을지’, ‘나는 여기 외에 또 다른 행성 어디로 가고 싶은지’, ‘궁극적인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지’, ‘우리는 왜 태어나고 죽는 건지’, 정말 기본적으로는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을 청소년기에 할 시간도 없었고 사색을 할 수 있는 여건도 받쳐주지 못했으며 생각할 방법도 몰랐기 때문에 다 큰 어린이 돼서도 이러한 고민 하나 못해보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저 별 의미 없이, 남들과 똑같이, 모두 그렇게 사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왜 하늘은 그렇게 똑같이 별 의미 없이 사는 사람들을 60억 명이나 태어나게 했을까. 모두 사는 건 똑같은데 왜 다들 다르게 생긴 얼굴로 태어나게 했을까. 나는 ‘서로 다르게 살라고’ 외향을 다양하게 꾸며놓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너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니, 다른 생각도 할 수 있고, 따라서 다른 세상을 살게 하려는 것 말이다.
공부를 게을리 해서 육체적으로는 힘든 일을 하게 되더라도 마음 속에 넓은 세상을 가득 품고 산다면 그 사람은 이 좁은 공장 안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다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머릿 속에서 그 사람은 현재 뉴질랜드의 목장을 뛰어다닐 수도 있고, 하늘을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얼굴에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내가 닐의 부모였다면 아니, ‘죽은 시인의 사회’ 속에 나오는 모든 부모와 키팅 선생을 제외한 모든 선생이었다면 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가 결론이다. 똑같은 의사가 되더라도 아픈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고 싶은 의지 하나만 심어준다면 입시 공부는 더 의미가 있어지고 공부하는 순간도 더 이상 고역은 아닐 것이다.
마음 다짐이 먼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사’자 들어가는 직업뿐만이 아니라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으며 세상을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며 선택은 본인에게 달렸음을 인지해 주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인생 교육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고 어떤 세상을 만나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지 사색할 시간을 주는 것만으로도 사랑하는 아이는 얼마든지 더 행복할 수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다행히 사색할 시간들로 충분했다. 일일이 학원갈 시간으로 하루를 주입식 교육으로 물들게 하지 않았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친구들과 놀면서 하늘을 보고 땅에 먹이를 이고 줄 지어 기어가는 개미들을 보며 자랐다. 내가 더 큰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지금 현재는 이 정도의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 깊고 넓은 눈을 가지며 인생을 살고 싶다. 이 영화의 라스트 씬인 아이들이 책상 위에 올라 서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때 나도 당당히 책상 위로 두 발을 세우고 더 멀리 세상을 보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또한 내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나는 똑같이 세상을 넓게 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