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하려하는 여자. 소통해야만 낯선 세상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여자가 있다. 이 소설 속 세상은 그런 여자를 절벽 끝에 몰아 세우고는 과감히 아주 냉철히 밀어 버리고 만다. 벼랑 끝으로 곤두박질쳐지는 순간, 그제서야 미련스럽게도 여자는 세상을 어느정도 알게 되지만 여전히 혼자 설 수는 없었다. 인간이라는 종이 과감히 홀로 설 수 있는 존재라면, 왜 하느님은 굳이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을까. 비록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기분 나쁜 해설이라 해도 결국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서로는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고 하나가 되게 한다. 끊임없이 남자에게서 버림받는 여자. 그런 여자를 남자(화자)는 자기 삶과의 연계를 경계하여 관심 밖의 여자로 두려고 노력한다. 철저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남자(화자)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이나 '거의 무의식적으로'라는 말을 하면서도 수술대 위의 여자의 한쪽 발에 이불을 덮어준다거나 하는 행동을 통해, 자신은 전혀 남에게 관심도 없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감정적 흐름을 지닌 존재임을 여실히 드러내고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남자는 철저히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통해 타인과 연계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이성적인 것이 좋다는 것은, 근대 과학 방법론의 선구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 철저히 이성적이어야 할 자연과학 분야에서조차, '이성이 다가 아니며 이성 보다 오히려 감정에 의한 사물 인식이 오히려 더 진실 되게 사물을 탐구할 수 있게 한다'는 이론이 떠오르고 있다. 그야말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감정의 동물인 탓이며 이 감정이라는 것의 힘이 대단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감정이 필요 없는 것이라면, 왜 굳이 우리의 뇌는 이다지도 복잡하게 설계되었단 말인가. 우리는 공공연히 '감정'이란 말에 부정적인 의미를 붙이고있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는 철저히 비감정적인 사회를 만들어 놓았다. 왜 이다지도 남자는, 그 사회는, 감정을 철저히 배격하며 (완전하지는 않은) '냉정함'이라는 이성을 택하게 되었을까. 작가는, 이미 이성으로 무장된 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맹목적으로 감정에 파묻힌 지금의 여성이라는 존재로의 삶을 지양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는 신파조로 표현되기 쉽다. 옛날 영화 속의 남자는 출세를 위해, 쉽게 여자를 버렸다. 그런 영화에서는, 버림받은 여자가 이렇게 불쌍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아주 힘없고 가냘픈 여자를 이성적인 파렴치한 남자에게서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는 '신파'로도 부족했는지 아예 그 여자를 불쌍히 여기지도 못 하게끔, 아주 눈치 없게 경우답지 않은 행동 등을 하게 함으로써 '그런 여자는 결국 이런 꼴을 당하게 된다'고 소설 속의 화자 보다 더 냉정한 태도로 여자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작가의 사상에 대해 반의를 표하게 된다. 옛날 신파극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인 이 사회나 그 사회 속의 남자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 여자가 굳이 너무 성급한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일단 벗어나자는 식의 '여성의 철저한 이성화'에 반대한다는 말이다. 이성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성이 전부'라는 것을 배격하고 '이성과 감정 중 차라리 숨기지 말고 감정 자체에 충실한 진실 된 인간이 되자'는 의미이다. 감정만 있는 사회는 '사회'라는 시스템을 가진 종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다. '여자를 쉽게 버리는 남자. 이꼴 이성적인 남자'도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식어서 여자를 버리는 것이 아닌, 철저한 계산에 의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과감히 버리고 대신 '성공'을 선택하는 남자를,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해 그다지 크게 성공하지 못한 듯한 남자 보다 우대하는 이 사회적 분위기를 버리자는 것이다. 비록 지금 사회가 이 소설처럼 되어 가고 있고, 실로 그런 면이 많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는 홀로 일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것이 최고라는 식으로 잘못 교육받아져 온 남성이,또는 사회가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