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②

 2. 부랑자들, 혹은 비정한 도시의 산책자들 (2) 

 

   
   아이의 책상 서랍은 무기이자 동물원, 범죄 박물관이자 납골당이다. (……) 아이의 삶에서는 끔찍하고 기괴하고 암울한 측면이 보인다. 교육자들은 아직 루소의 꿈에 매달려 있지만 링겔네츠 같은 작가나 클레 같은 작가는 아이들의 포악하고 비인간적인 측면을 포착했다.
 -발터 벤야민, <오래된 장난감들> 중에서
 
   

 





   시궁창 밑바닥에서 인생을 시작한 주인공이 최고의 자리를 꿈꾸다가, 최고의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을때, 혹은 최고가 되자마자 처절하게 몰락하는 스토리는 갱스터 무비의 전형이다. 실제로 미국 영화에서 갱스터 무비의 원형이 확립된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의 광기가 휩쓸던 암흑기였다고 한다. 1930년대 하면 떠오르는 대공황과 금주법을 배경으로 하면서 갱스터 무비의 전형적 문법을 미묘하게 비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이제는 어느새 고전의 반열을 넘보는 이 영화는 단지 주인공 누들스(로버트 드니로)의 개인적 실패담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 혹은 아메리카니즘으로 대변되는 현대인의 ‘성공신화’를 해체하는 비극적 알레고리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대부>, <칼리토>, <스카페이스>, <저수지의 개들> 등의 갱스터 무비들과 비슷한 혈통이면서도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저마다 마음속에 갱스터 무비의 서로 다른 원형이 존재하는데, 내 마음속에서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수많은 갱스터 무비의 심정적 원본으로 느껴진다. 무려 229분의 상영시간 동안, 이 영화는 한 인물과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인생을 뒤바꾼 결정적 순간들을 빼곡하게 담아낸다. 타인의 인생을 너무 속속들이 엿본 듯한 알 수 없는 죄책감을 유발할 정도로, 이 영화의 ‘묘사’는 가혹하리만치 생생하다.   

 



   그런데 수많은 갱스터 무비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의 결정적 차이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과 맺는 관계, 즉 ‘기억’과 ‘현실’ 사이의 관계 맺기 방식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관객의 뇌리에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장면들은 어른이 된 후의 누들스가 아니라 어린 시절 누들스가 보고 듣고 만졌던 기억의 편린들이다.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한 전형적인 비극의 주인공 누들스를 괴롭히는 것은 친구의 배신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의 뇌리를 시도 때도 없이 강타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다. 정말 아픈 것은 친구의 배신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친구가 어린 시절 속에서는 여전히 선량하고 아름답게 웃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아무 것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보상할 만한 대체제가 남아 있지 않은데, 고통스럽고 무자비했지만 여전히 아련한 아름다움의 잔상으로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은 틈날 때마다 주인공의 뒤통수를 가격한다.   

 



   어린 시절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되찾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기억은 아무것도 없는데, 누들스는 바보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에 고착되어 있다. 아니, ‘기억’을 지배하는 주인공이 누들스가 아니라 오히려 누들스의 삶을 몸소 지휘하는 주체가 ‘기억’이 아닐까. 어린 시절의 누들스가 아직도 뉴욕의 뒷골목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을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된 것에 비해, 어른이 되어 여전히 이 도시의 폐허를 떠도는 누들스는 유령처럼 비현실적이다. 지금은 죽어버리거나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친구들, 성공했지만 본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친구들. 어른이 된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낯설고 삭막하지만, 한때는 ‘그들도 우리처럼’ 골목길을 후비며 까르르 웃던, 영락없는 개구쟁이 소년들이었다.   

 

 

   
 

  아이는 이미 집 안의 숨는 곳을 전부 알고 있으며 마치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라고 확신하고 있는 집으로 들어갈 때처럼 그곳에 몸을 숨긴다. 그러면 가슴이 쿵쾅거린다. 아이는 숨을 멈춘다. 거기서 아이는 사물의 세계 속에 둘러싸인다. (……) 출입문의 커튼 뒤에 서 있는 아이는 그 자체로 바람에 흔들리는 흰 것이, 유령이 된다. 식탁 밑에 웅크리면 아이는 조각이 새겨진 식탁 다리를 네 개의 기둥으로 한 신전의 목조 신상(神像)으로 바뀐다. 그리고 문 뒤에 숨으면 아이 자신이 문이 되며, 문 안에서 무거운 가면처럼 꾸민 채 마법사가 되어 아무것도 모르고 방에 들어오는 사람 모두에게 마법을 걸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9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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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udy 2010-06-08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제니퍼 코넬리의 어린 시절! 어쩜 저럴까^^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① 

 1. 부랑자들, 혹은 비정한 도시의 산책자들 (1) 

 

   
  국가는 전당포와 복권으로 프롤레타리아를 농락한다. 오른손이 베푼 것을 왼손이 빼앗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이 소년들은 도시의 쓰레기와 찌꺼기와 잔해들을 먹고 산다. 사람들이 무심코 버린 모든 쓰레기들이 이 소년들에게는 ‘사업’의 대상이 된다. 이 소년들은 이 도시의 비밀을 신문이나 뉴스가 아닌 ‘온몸의 감촉’으로 속속들이 알고 있다. 만약 이 도시에서 오늘 일어난 살인, 절도, 방화 사건의 원인이 궁금하다면 경찰이나 교사나 공무원보다는 이 소년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가장 맛있는 빵집을 알고 싶거나,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를 알고 싶을 때도, 웬만한 ‘공식적’ 정보통보다는 이 부랑자 소년들의 비공식 핫라인을 수소문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일들을, 소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알 수 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대공황시기 뉴욕의 뒷골목, 이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비상하기를 꿈꿨던 소년들의 사랑과 성공과 실패와 복수의 이야기다. 좀도둑, 소매치기, 문제아 등 이들을 규정하는 용어들은 다양하겠지만, 이 소년들의 주된 업무는 ‘어슬렁거리기(loitering)’다.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며 익숙한 거리에서 매번 새로운 작업 대상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소년들의 주특기다. 멀리서 보면 그들의 모습은 한가롭기 이를 데 없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보면 이 아이들의 눈빛은 먹이를 찾는 맹수만큼이나 날카롭게 빛난다. 소년들에게 어슬렁거리기는 이 도시의 비밀을 알아내기에 가장 적합한 창조적 퍼포먼스다. 거리를 잘 헤매야 ‘목표대상’을 잘 찾을 수 있고, 거리를 잘 헤매야 그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을(예를 들어 소매치기하기에 딱 좋은, 값비싼 시계를 찬 취객들)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소년들의 직업은 방황하고 두리번거리고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미국의 상점 입구에는 ‘Do not loiter’라고 적힌 메모가 발견되곤 한다. 분명한 목적도 없이 상점 주변을 배회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상점 주인들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로 보일 수 있다. 모범시민이 보기에 길거리를 쓸데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은 ‘범죄’로 가는 지름길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인간의 총천연색 욕망과 도시의 장구한 역사를 탐색하는 소중한 ‘연구’의 방식일 수도 있다. 셀 수 없는 상점과 간판과 광고와 쇼윈도우와 인파 속을 하루 종일 헤매도 결코 지루해하지 않는 사람, 오직 잘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하루 일과를 보람차게 보낼 수 있는 사람, 그들이야말로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도시의 산책자 혹은 만보객이었다.   

 

 

   
 

  벤야민은 1934년 저서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고통의 초상. 센 강 다리 밑인 듯. 집시 여자가 잠을 잔다. 고개를 숙이고 텅 빈 지갑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상의는 햇빛에 빛나는 핀으로 덮여 있고, 모든 가재도구와 사유재산 전부—솔빗 두 개, 칼집 없는 칼, 뚜껑 닫힌 그릇—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그녀의 주위에 실내의 느낌, 나아가 친밀감을 자아낸다.” (……) 물론 만보객은 거리를 거실로 삼고 살아간다. 그러나 거리를 침실이나 욕실이나 부엌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이와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이때는 자기 삶의 가장 내밀한 국면들이 낯선 타인에게 내보여지며 궁극적으로 경찰에게 내보여진다.
 - 수잔 벅 모스 지음, 김정아 옮김,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문학동네, 2005, 4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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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6-0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른손이 베푼 것을 왼손이 빼앗는다!! 푸하하하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마지막회

 18. 내 안의 너무 많은 나를 긍정하는 법 (3)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 한나 아렌트
 
   





   비즐러의 행동은 결코 멀리서만 짝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낭만적 희생이 아니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책을 판매하는 서점 점원이 선물 포장을 원하시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저를 위한 것입니다(Das ist für mich).”라고. 과묵하고 냉정해 보이기만 하던 비즐러가 이 영화 속에서 가장 따스하게 웃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멋진 라스트 신은 자신의 희생이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웅변하는 듯하다. 비즐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타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도청하며 타인의 삶을 파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동안, 파괴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이었음. 타인의 삶을 침해하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붕괴시키는 일이었음을. 

 




   드라이만은 비로소 자신의 자유를 말없이 지켜주었던 ‘친구’의 존재를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쟁취한 창작의 자유임을 알게 된다. 드라이만은 알고 있다.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대화조차 나눠본 적이 없지만, 한 때는 자신을 망치기 위해 도청을 일삼았던 사람이지만, 크리스타가 죽고 없는 지금 자신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바로 비즐러임을. 비즐러가 모든 것을 걸고 드라이만의 자유를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원한 창작 불능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과 공명하는 내면의 주파수가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요소로 인간의 ‘복수성’을 강조할 때, 그 ‘복수성’은 바로 혼자 있을 때조차도 언제든 ‘자기 안의 타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너무 많은 또 다른 나‘들’을 견뎌야 한다. 모순과 분열로 인해 영혼의 찰과상과 타박상이 끊이지 않겠지만, 단일한 목소리로 오직 한 가지 진리에 만족하는 지루한 정체성보다는 우리 안의 시끄러운 ‘복수의 자아들’과 시끌벅적하게 공생하는 것이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 홀로 있을 때조차도 내면의 대화 속에서 타인과 공명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한나 아렌트가 강조하는 ‘복수성’의 저력이 아닐까.  

 




   외부에서 주입된 국가의 도그마(dogma)에 복종하며, 평생 자기 자신의 독사(doxa) 안에서만 살아온 비즐러. 비즐러는 자기 안에 둥지를 튼 타인의 삶이 자신의 정체성과 불화함을 깨달았다. 어느새 비즐러는 자신의 삶이 그 뜻밖의 타인의 삶과 ‘동거’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어지는 듯한, 무의식의 일체감을 느낀다. 크리스타와 드라이만은 비즐러의 내면에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타인이다. 그들은 비즐러에게 ‘또 다른 자아’로서의 경험을 하게 해준 첫번째 타인인 것이다. “그건 나를 위한 것입니다”라는 비즐러의 마지막 대사는, 타인을 위한 삶이야말로 곧 나 자신을 위한 삶이라는 의미를 담은 복화술로 들린다. 이윽고 과묵한 독신자 비즐러의 굳은 입술에서 전에 없던 해맑은 미소가 번진다. 그렇게 비즐러라는 낯선 타인은 우리 안에 살기 시작한 또 하나의 아름다운 타인이 되었다. 

 




   우리는 타인 때문에 상처받고 타인 때문에 주눅 들고 타인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에게 사랑받고 타인에게 용기를 얻고 타인으로 인해 결코 혼자서는 배울 수 없는 세계의 비밀을 접한다. 우리는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다. 바로 그 ‘알 수 없음’ 때문에 우리는 마음속에 수많은 타인들을 초대하고, 내 안의 수많은 나와 공생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타인은 지옥이다. 하지만 타인 없는 삶은 지옥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여기, 지옥 같은 타인의 삶을 자기 안에 이식함으로써 마음속에 영원히 닳지 않는 천국의 무료입장권을 얻게 된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여전히 혼자이지만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한 여자의 못다 한 삶의 이야기가, 한 예술가의 네버엔딩스토리가 상영 중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그가 종종 하는 충고, 즉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존재가 되라”는 것, 즉 다른 사람이 볼 때 그에게 당신이 보여주고 싶은 바로 그 모습으로 당신 자신에게 나타나라는 것이다. (……) 더 소크라테스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당신이 살인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아무도 당신을 못 본다 해도 당신은 살인자와 함께 있기를 원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살인을 범한다는 것은 당신이 평생 살인자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니까 말이다. (……) 내가 전적으로 나 홀로 있을 때에도 나는 인간세계의 특징인 복수성, 즉 우리가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 인간성이라 부르는 그 복수성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전혀 행동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과 더불어 사는 만큼만 인간세계를 지속적으로 좋게든 나쁘게든 변화시킬 수 있다.
 - 한나 아렌트, 제롬 콘 편집, 김선욱 옮김, <정치의 약속>, 푸른숲, 2007, 5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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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denly 2010-06-04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존재가 된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17)

 17. 내 안의 너무 많은 나를 긍정하는 법 (2)
 

   
   이젠 뭐든 당신 맘대로 쓸 수 있잖소. 이게 당신이 꿈꾸던 나라 아니었소? 하지만, 이렇게 통일된 연방 독일이 진정으로 예술가들이 원했던 거요? 더 쓸 게 남아 있소? 사람들에겐 더 이상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소. 여긴 진정한 자유가 있는 연방공화국인데 말이오.
 -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독일이 통일된 후 2년이 지나고, 드라이만은 크리스타가 주연을 맡았던 연극을 다른 배우가 공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깊은 회한에 잠긴다. 그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내지 못한 채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듯 보인다. 그는 헴프 장관을 우연히 만나 오랫동안 참았던 질문을 던진다. 왜 나를 연금하지 않았느냐고. 왜 나만은 감시대상에서 제외되었느냐고. 헴프 장관은 코웃음을 치며 드라이만을 조롱한다. “당연히 당신도 철저히 감시를 당했소. 우리는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지. 당신의 성생활까지도. 당신의 모든 걸 말이오.” 당신의 성생활, 당신의 모든 것이라니. 소중했던 모든 것이 안보부의 도청 시스템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아내가 죽은 후에야 알게 된 드라이만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그는 집에 돌아와 자신의 서재는 물론이요 침실과 화장실까지, 일상의 숨소리가 닿는 모든 곳에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는 도청장치를 발견한다. 내 모든 것을 감시당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그는 이 고통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한다.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어가며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찾았는데, 막상 ‘창작의 자유’를 찾은 그는 무엇을 집필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누군가 나의 삶을 통째로 훔쳐갔다는 것이 분명한데, 눈에 보이는 외상(外傷)이나 피해조차 없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가 부정당하는 고통 속에서 어렴풋이 깨닫는다. 누군가 내 삶의 모든 흔적을 남김없이 ‘생방송’으로 청취하고 있었다는 것, 그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타인’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음을.    
 




   드라이만은 자신의 집이 도청당한 경과가 기록된 문서를 찾게 되고 드디어 ‘게오르그 드라이만에 대한감시 보고서’의 전모가 밝혀진다. 드라이만은 자신이 감시당한 경위를 조사하던 중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드라이만의 예상과는 달리 크리스타는 ‘모든 것’을 누설했고, ‘HGW XX/7’라는 미지의 인물이 타자기를 숨겨주었다는 것을. 드라이만은 자신을 도청한 인물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자신을 구원해준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그는 왜 나를 감시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지켜준 것일까.

   드라이만은 수소문 끝에 ‘HGW XX/7’라는 인물이 비즐러임을 알게 된다. 그는 비즐러를 찾아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우편물을 나르는 잡역부 일을 하는 비즐러의 초라한 뒷모습을 발견한 드라이만. 그는 비즐러를 차마 부르지 못하고 자동차를 멈춘 채, 마치 어떤 내면의 계시를 들은 사람처럼 희열에 찬 표정을 짓는다.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서 진정한 영감의 원천을 찾은 것 같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막상 자유를 찾은 후에도 글쓰기의 동력을 얻지 못해 방황하던 드라이만에게 마침내 ‘뮤즈’가 찾아온 것이다.  

 




   다시 2년 후. 비즐러는 우연히 ‘칼 마르크스’ 서점 근처를 지나다가 낯익은 인물의 얼굴이 찍힌 도서 광고포스터를 발견한다. 책 제목은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 저자는 게오르그 드라이만. 그는 자신의 마지막 도청 대상이었던 드라이만이 쓴 책을 발견하고 서점에 들어간다. 책의 첫 페이지에서 그는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채 커피 한 잔 마셔본 적이 없는 ‘친구’에게서 첫 번째 ‘편지’를 받는다. “‘HGW XX/7’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바칩니다.” 비즐러는 이 한 줄의 헌사로 단번에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를 찾아와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대신 2년 동안 온힘을 다해 비즐러을 위한, 그리고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를 해낸 드라이만의 ‘선의’를. 모두가 ‘악인’이라 손가락질할 것만 같은 비즐러 자신의 마음 깊숙이 감춰져 있던 ‘선의’를 알아봐주고 그 선의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내 준, 크리스타와 드라이만의 사랑을. 그는 그 한 줄의 ‘헌사’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아름다운 멜로디, 도청장치를 통해 들려오던 천상의 음악,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가 다시금 비즐러의 마음 속에서 연주되기 시작한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소유한다 해도, ‘친구’가 없다면 아무도 그런 삶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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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umn breeze 2010-06-01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모든 것을 다 소유한다 해도, 친구가 없다면 아무도 그런 삶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암기하고 싶은 문장입니다^^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16)

 16. 내 안에 너무 많은 나를 긍정하는 법 (1) 

 

   
    우리 시대의 진정한 난점은 전체주의가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후에도 전체주의의 고유한 형식이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 한나 아렌트
 
   


 



 
   그렇게 비즐러는 모든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커리어’를 잃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까지 함께 잃어버린다. 그는 기계적으로 편지봉투를 뜯는 일만 반복하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다. ‘타인의 편지’를 미리 뜯어보아 감시하는 일 또한 ‘이미 해방된’ 비즐러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을 위해 그 비루한 노동을 견딘다. 그처럼 강인한 인간이라면, 정말 20년 동안이라도, 설사 평생이라도, 그 단조로운 노동을 참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역사적 대격변이 일어난다. 크리스타가 죽은 지 4년 7개월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감시와 처벌의 세계는 이렇게 덧없이 끝난다. 죽을 때까지 편지봉투 뜯는 일만 계속할 것만 같았던 비즐러의 삶에도 뜻밖의 변화가 찾아온다. 물론 통일된 독일의 혼란 속에서 그에게 맡겨진 임무가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더 이상 밥을 벌기 위해 타인의 삶을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분명 그에게 있어 또 다른 영혼의 해방이다.

 장벽이 무너졌다!
 장벽이 무너졌어요!
 여기는 축제의 현장입니다, 젊은이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물밀듯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포옹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베를린에서 이 보도를 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 습니다. 1989년 11월 9일, 역사에 거대한 한 획을 긋는 날입니다. 생방송으로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비즐러는 누구라도 타인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표상의 세계’를 넘어, 그 누구로도 타인의 존재를 대신할 없는 ‘현상의 세계’로 옮겨갔다. 그가 자기 자신임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현상의 세계, 그곳으로 갈 수 있는 ‘편도티켓’은 역설적으로 그가 어떤 대단한 사회적 지위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했다. 내가 ‘무엇’인지에 집착하지 않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드러내고 실천할 수 있는 세계. 그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는 순간, 그는 진정한 그 자신이 된다.

   그가 예술가들의 도청을 담당하는 고위급 간부나 교수가 아니라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는 일개 말단직원이 되는 순간, 그는 진정한 ‘누구’로서의 위엄을 갖추게 된다. 그는 비로소 어떤 ‘규정된 포지션’이 아니라, 절대적인 자아나 절대적인 타자가 아니라, 그 모든 존재의 카오스 ‘사이’에 존재하는 법을 깨달은 것이다. 누구의 명령에도 종속되지 않기 위해, 누구의 자유도 빼앗지 않기 위해, 마침내 타인의 운명과 분리할 수 없는 나 자신의 운명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는 ‘단단한 정체성’이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닌’ 비인칭의 세계에서 표류하기로 한 것이 아닐까. 그 고통스러운 표류야말로 비즐러의 오랜 고뇌가 찾아낸 마지막 윤리였다. 비즐러가 ‘사이’에 존재하는 법을 깨달은 순간, 그 누구도 자신의 곁에 두지 않을 것만 같던 특유의 냉혹한 분위기는 사라진다. 그는 그저 하찮은 허드렛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웬일인지 그의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에서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영혼의 품위가 우러나오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정치적 기능이란 우정과 같은 이해에 기반을 둠으로써 어떠한 지배도 필요하지 않은, 이러한 공통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이 목적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두 개의 통찰에 의존했다. 하나는 델포이 신전에서 아폴론이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에 담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플라톤이 전하는 “하나가 되기 위해 나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전 세계와 불일치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과 연관된다. (......) 소피스트들의 가르침의 핵심이 모든 일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논의될 수 있다는데 있었다면, 소크라테스는 모든 소피스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소피스트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수의 서로 다른 로고스들이 있으며,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한나 아렌트, 제롬 콘 편집, 김선욱 옮김, <정치의 약속>, 푸른숲, 2007, 47~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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