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내 안의 너무 많은 나를 긍정하는 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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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 한나 아렌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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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즐러의 행동은 결코 멀리서만 짝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낭만적 희생이 아니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책을 판매하는 서점 점원이 선물 포장을 원하시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저를 위한 것입니다(Das ist für mich).”라고. 과묵하고 냉정해 보이기만 하던 비즐러가 이 영화 속에서 가장 따스하게 웃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멋진 라스트 신은 자신의 희생이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웅변하는 듯하다. 비즐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타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도청하며 타인의 삶을 파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동안, 파괴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이었음. 타인의 삶을 침해하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붕괴시키는 일이었음을.
드라이만은 비로소 자신의 자유를 말없이 지켜주었던 ‘친구’의 존재를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쟁취한 창작의 자유임을 알게 된다. 드라이만은 알고 있다.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대화조차 나눠본 적이 없지만, 한 때는 자신을 망치기 위해 도청을 일삼았던 사람이지만, 크리스타가 죽고 없는 지금 자신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바로 비즐러임을. 비즐러가 모든 것을 걸고 드라이만의 자유를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원한 창작 불능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과 공명하는 내면의 주파수가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요소로 인간의 ‘복수성’을 강조할 때, 그 ‘복수성’은 바로 혼자 있을 때조차도 언제든 ‘자기 안의 타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너무 많은 또 다른 나‘들’을 견뎌야 한다. 모순과 분열로 인해 영혼의 찰과상과 타박상이 끊이지 않겠지만, 단일한 목소리로 오직 한 가지 진리에 만족하는 지루한 정체성보다는 우리 안의 시끄러운 ‘복수의 자아들’과 시끌벅적하게 공생하는 것이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 홀로 있을 때조차도 내면의 대화 속에서 타인과 공명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한나 아렌트가 강조하는 ‘복수성’의 저력이 아닐까.
외부에서 주입된 국가의 도그마(dogma)에 복종하며, 평생 자기 자신의 독사(doxa) 안에서만 살아온 비즐러. 비즐러는 자기 안에 둥지를 튼 타인의 삶이 자신의 정체성과 불화함을 깨달았다. 어느새 비즐러는 자신의 삶이 그 뜻밖의 타인의 삶과 ‘동거’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어지는 듯한, 무의식의 일체감을 느낀다. 크리스타와 드라이만은 비즐러의 내면에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타인이다. 그들은 비즐러에게 ‘또 다른 자아’로서의 경험을 하게 해준 첫번째 타인인 것이다. “그건 나를 위한 것입니다”라는 비즐러의 마지막 대사는, 타인을 위한 삶이야말로 곧 나 자신을 위한 삶이라는 의미를 담은 복화술로 들린다. 이윽고 과묵한 독신자 비즐러의 굳은 입술에서 전에 없던 해맑은 미소가 번진다. 그렇게 비즐러라는 낯선 타인은 우리 안에 살기 시작한 또 하나의 아름다운 타인이 되었다.
우리는 타인 때문에 상처받고 타인 때문에 주눅 들고 타인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에게 사랑받고 타인에게 용기를 얻고 타인으로 인해 결코 혼자서는 배울 수 없는 세계의 비밀을 접한다. 우리는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다. 바로 그 ‘알 수 없음’ 때문에 우리는 마음속에 수많은 타인들을 초대하고, 내 안의 수많은 나와 공생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타인은 지옥이다. 하지만 타인 없는 삶은 지옥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여기, 지옥 같은 타인의 삶을 자기 안에 이식함으로써 마음속에 영원히 닳지 않는 천국의 무료입장권을 얻게 된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여전히 혼자이지만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한 여자의 못다 한 삶의 이야기가, 한 예술가의 네버엔딩스토리가 상영 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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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대답은 그가 종종 하는 충고, 즉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존재가 되라”는 것, 즉 다른 사람이 볼 때 그에게 당신이 보여주고 싶은 바로 그 모습으로 당신 자신에게 나타나라는 것이다. (……) 더 소크라테스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당신이 살인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아무도 당신을 못 본다 해도 당신은 살인자와 함께 있기를 원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살인을 범한다는 것은 당신이 평생 살인자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니까 말이다. (……) 내가 전적으로 나 홀로 있을 때에도 나는 인간세계의 특징인 복수성, 즉 우리가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 인간성이라 부르는 그 복수성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전혀 행동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과 더불어 사는 만큼만 인간세계를 지속적으로 좋게든 나쁘게든 변화시킬 수 있다.
- 한나 아렌트, 제롬 콘 편집, 김선욱 옮김, <정치의 약속>, 푸른숲, 2007, 5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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